문화재/경기유형문화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수원 김후 영정 및 영정함, 호수·호수함 일괄

오늘의 쉼터 2014. 8. 7. 23:42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수원시)

명 칭

김후 영정 및 영정함, 호수·호수함 일괄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기타
수량/면적

일괄(8점)

지정(등록)일

2014..07.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문길 7 수원화성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화성박물관

관리자(관리단체)

화성박물관

상 세 문 의

경기도 수원시 문화관광과 031-228-3085

 

일반설명

 

김후(金喉) 영정 및 영정함, 호수(虎鬚)·호수함’은 정조시대 무신이었던 김후(1751~1805)의 초상화와 모자에 꽂는 장식이며, 김후(金喉) 영정은 문신초상화에 비하여 전하는 수량이 많지 않은 무신 초상화 중에서도 회화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며, 화성 축조와 관련한 중요 인물의 초상화로서 의미 있다. 조선 후기 초상화의 뛰어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며, 보관 상태가 매우 좋으며, 관련 유물인 영정함, 호수(虎鬚,무인의 모자에 꽃는 장식의 일종으로 호랑이 수염으로 만들어졌으나 수량이 워낙 부족해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것은 찾기 힘들고 지정 문화재 또한 호랑이 수염이 아님), 호수함 등과 함께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김후(金喉)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 김상걸(金相傑, 1727~1798)의 아들이다. 해풍(海豊)은 풍덕(豊德)의 또다른 이름이며 경기도 개풍(開豊)의 옛 이름이다. 해풍 김씨(海豊金氏)의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됐다. 김후(金喉)는 경기중군(京畿中軍)에 재직하던 1794년(정조18) 2월에 화성성역의 별감동(別監董)에 임명됐다. 별감동(別監董)이란 성역 등의 큰 공사가 있을때 특별히 임명하던 감독관으로 성역 사업의 주요 직책중 하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김후(金喉)는 별감동으로 총 886일을 근무하면서 개울을 파내는 준천(濬川) 공사를 비롯해 화홍문, 방화수류정, 동북성, 동장대 등의 건설을 감독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한때 공사 도중인 1794년 9월에 독성 중군(禿城中軍)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음해 윤2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승진 임명돼 나갔지만 곧 경기중군(京畿中軍)과 독성 중군(禿城中軍)으로 다시 복직해 화성 성역이 완공될 때까지 맡은 바 임무를 다해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정조는 1796년 1월 22일 “독성 중군(禿城中軍) 김후(金喉)는 그 공로가 몹시 크니, 우선 길이 잘든 숙마(熟馬) 1필을 특별히 하사하라”는 전교를 내려 포상했다. 또한 정조는 수문(水門)과 동장대(東將臺)의 터를 닦기 전에 김후(金喉)를 보내 그 토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화성내에 건설한 성신사(城神祠)의 봉안제(奉安祭) 축문(祝文)도 짓게 했다. 이로보면 김후(金喉)는 무예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갖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조도 이를 간파해 그를 더욱 신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997년 7월 화성 성역이 끝났음에도 김후(金喉)를 재차 수원의 중군으로 다시 내려 보낸다. 아마 화성 신도시의 군사적 안정과 현륭원의 보호를 위해 김후를 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화성성역 당시 감동당상 조심태(趙心泰)가 정조에게 올리는 보고서마다 김후(金喉)의 이름 앞에는 항상 ‘본부인(本府人)’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정조는 일찍부터 김후(金喉)가 수원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니, 이 같은 사실이 그를 신임하게된 원인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이듬해 2월이 돼서야 모든 상황이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는지, 김후(金喉)를 승급시킴과 동시에 황해병사(黃海兵使)로 내 보낸다. 이때 장궁(長弓), 장전(長箭), 편전(片箭) 등을 함께 하사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정조 사후에 김후(金喉)는 1801년 내금위장(內禁衛將)만 잠시 지냈을 뿐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805년에 죽으니 향년 55세였다.

 

 

김후 영정

 

호수·호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