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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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정태제 묘 출토 전적류 일괄() |
분 류 |
기록유물/ 전직류/ 기타 |
수량/면적 | 일괄 39점 |
지정(등록)일 |
2014.08.02 |
소 재 지 | 서울 광진구 긴고랑로 22길 10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 |
관리자(관리단체) | ?? |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광진구 문화체육과 02- |
일반설명
이 자료는 1987년 3월 13일~14일에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상동면(上東面) 장안리(長安里) 관곡(官谷) 능촌(陵村;능마리) 산 79번지 동래정씨 사암공파(東萊鄭氏思菴公派) 선영의 천묘작업 중 정태제(鄭泰齊)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이 유물이 나온 무덤의 주인공인 정태제(鄭泰齊)는 1612년(광해군 4) 진천(鎭川)에서 출생하여 1633년(인조 11)에 사마시에, 1635년에는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던 인물이다. 26세가 되던 1637년(인조 15) 12월 25일자로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사관(史官)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사초(史草)는 조정에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서, 실록의 기초자료가 되는 것이다. 왕이 죽으면 그 다음 왕때 이 기록자료를 수집해서 실록을 제작하였다. 원칙적으로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실록편찬을 위한 기초자료로 제출되어야 하고 다른 1부는 사관이 개인적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 이번에 지정되게 된 사초(史草)는 그 시작 날자가 12월 26일로, 정태제(鄭泰齊)가 사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다음날부터 작성된 것이다. 정태제(鄭泰齊) 사초(史草)에는 ‘근안(謹按)’, ‘사신왈(史臣曰)’, ‘사관왈(史官曰)’ 등으로 시작되는 사평이 매 중요기사마다 해 총 57번 등장한다. 이러한 정테제(鄭泰齊)의 사론은 같은 시기 실록의 사론에 저본으로 적용되었다. 다만 실록의 사론이 정태제(鄭泰齊)가 사초(史草)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을 가감하여 보다 완화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정태제(鄭泰齊)의 사초(史草)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론들은 그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분명하여 어떤 점에 있어서는 지나치리만큼 강경한 입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임금인 인조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다. 인조의 자질에 대해 “성덕이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다(聖德之不及於古也)”라든가 “그 백성의 민생고 해결이 급선무라고 대신들이 아뢰어도 머뭇거리는 것은 왕의 자세가 아니다.(其媚悅君上之態, 不忍正視)" 등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관의 이러한 표현과 사평은 실록에서는 찾아보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사례이다. 정태제(鄭泰齊)의 사초(史草)는 사관의 직필과 그것이 실제 실록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단초를 열어주고 있음. 바로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어느 사초보다도 정태제(鄭泰齊) 사초(史草)가 지니고 있는 가치가 크다. 이 중기(重記)는 1644년(인조 22, 갑신) 정월 모일자로 작성된 강원도 홍천현(洪川縣)의 비품출납 중기(備品出納重記)로서 각종 창곡의 수입과 지출, 이관과 비품의 재고와 유실, 파손 경위 등 전곡과 무기류, 재물류 등에 대한 관청 재고와 흠결, 차액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중기(重記)가 작성된 1644년(갑신) 정월 경에 정태제(鄭泰齊)가 우부승지로 있으면서 지방 관아의 재무현황과 관련하여 보고 받은 문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계미갑신을유역일(癸未甲申乙酉曆日)』,『병정역일(丙丁曆日)』 등 2책의 대통력은 해당연도의 대통력으로는 유일하며, 1654년에 시헌력으로 교체되기 수년 전의 대통력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일력에 적어놓은 정태제(鄭泰齊)의 일상사를 통해 1643년~1647년 사이의 개인사를 살필 수 있고, 나아가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과 사회사도 엿볼 수 있다. 부가적인 가치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법 등이 기록된 부전지에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의 한방치료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한글 문서류 12건은 17세기(1650~1664년 경) 당시의 재화와 물목에 대한 가격을 알 수 있으므로 경제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한글 물목에 대한 다양한 표기들을 통하여 17세기 국어사 특히, 어휘사 방면의 가치를 지니며, 17세기 자료 중에 드물게 양반 남성이 아내에게 직접 쓴 편지로 국어생활사적 측면에서도 연구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또한 한문과 한글을 병행해서 쓴 병록(病錄) 문서도 당시 국어생활사의 한 측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한문문서류 22건은 문건의 대부분 정태제(鄭泰齊)의 아버지 정양우(鄭良佑)가 배소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모두 정태제(鄭泰齊)가 유배 중이었던 1647년에 작성된 것으로, 아마도 정태제(鄭泰齊)가 생전에 간직했던 것으로서, 그가 죽자 유족들에 의하여 부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부자간에 주고받은 것으로서 자식에 대한 걱정과 안부를 묻는 것이며, 그 밖에 「송월헌기」는 내용이 정태제(鄭泰齊)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아마도 부친의 친필이기 때문에 정태제가 소장했고, 따라서 함께 부장된 것으로 보인다. 여타의 문건도 그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니 대략 이와 같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한문문서는 특별한 내용이나 가치를 가진 것은 없으므로 문화재적 가치는 부족하나 유물 전체를 일괄할 경우 지정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사초
중기
책력(병정역일)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치부책
한글간찰
병록
소출관련 기록
노비안
시권(金花揷頭賦)
화제(처방전)
사본(송월헌기, 松月軒記)
한문간찰
물목
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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