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기념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나주역사

오늘의 쉼터 2014. 5. 22. 08:33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 
명 칭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나주역사(光州學生獨立運動震源地羅州驛舍)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근대교통·통신시설/ 철도
수량/면적 18,281㎡
지정(등록)일 2000.12.29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죽림동 601외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나주시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나주시 문화공보실 061-333-5891
 
일반설명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봉기를 "광주학생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진원지는 나주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주역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 신문의 기사와 재판기록 조선총독부의 기록 등에는 10월30일의 나주역 사건이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운동의 발단에 대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사"를 비롯해 1970년대 이후의 자료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희롱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일단의 일인 중학생(광주중)복전, 말길 ,전중 등 수명이 같은 기차통학생이었던 광주여고 보생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한국인 여학생을 차 중에서부터 희롱하고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의 4촌 동생인 광주고보 2학년생 박준채가 격분하여 출찰구를 나오자마자 복전을 불러 세운 다음 "너는 명색이 중학생이 된 놈이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은 야비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일 학생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곳을 순찰하던 삼전순사가 박준채의 빰을 때리자 함께 있던 한인 학생들이 왜 한인 학생만 나무라느냐고 항의하였다.


이와 같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1월1일 광주역에서의 학생충돌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11월3일 폭발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독서회 회원들이 주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전국154개교 54,000여명이 거국적으로 참여한 민족독립운동이었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1930년대 사회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이끌어 갔으며 나주지역에서 참여한 학생들은 훗날 나주지역의 핵심적인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나주역에서 일어났던 한일 학생간의 충돌에서 앞장섰던 나주통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 발단에서부터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30여명이 퇴학 당하고 구속 기소되어 고초를 당한 이들이었다.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11월27일 봉기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독립정신은 1896년 단발령에 저항한 나주의거로부터 한말 의병운동의 뿌리깊은 전통 속에서 잉태되어 왔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일제에 의해 내륙 수탈 기지로 새롭게 영산포라는 신시가지를 조성하고 이러한 수탈의 현장을 어느 지역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느끼고 살았던 당시 나주지역의 정서는 1920년대 청년회, 신간회, 노동운동, 야학운동 등을 통해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의 역할을 하였고 훗날 주도 했던 학생들은 나주지역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나주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