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북유형문화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3호 구미 용암 박운 효자 정려비

오늘의 쉼터 2012. 11. 10. 17:04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3호
명 칭 용암박운효자정려비(龍巖朴雲孝子旌閭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2005.03.14
소 재 지 경북 구미시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밀양박씨용암공파종중
관리자(관리단체) 밀양박씨용암공파종중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구미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54-450-6063
 
일반설명
 

조선 중기의 학자로 효자로 이름났던 용암(龍巖) 박운(薄雲 1493~1562)은 1578년(선조 11) 정려를 받았으며, 정려비는 1580년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 ‘효자 성균진사 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라 새겨져 있는데 명필 석봉(石峰) 한호(韓濩 1543~1605)가 글씨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비석 뒷면의 비문은 박운과 친분이 두터웠던 해평리 출신으로 당시 한성우윤(漢城右尹)이던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1514~1580)이 지었다. 박운은 선산부 해평현 괴곡리(현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 출신으로, 송당(松當) 박영(朴英 1471~1540)의 문도이며 151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항상 곁에 모시며 시중을 들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초막을 짓고 나물죽으로 끼니를 이으며 3년 시묘를 하였다. 어머니가 임종 때 외를 찾았으나 겨울이라 구해드리지 못했기에 평생 외를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저서로 『자양심학론(紫陽心學論)』, 『격몽편(擊蒙篇)』, 『경행록(景行錄)』, 『삼후전(三候傳)』, 『위생방(衛生方)』 등이 있다. 1562년(明宗 41년) 몰(歿)하고 1642년(仁祖 20년) 낙봉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묘갈문(墓碣文),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의 묘지명(墓地銘)이 있다. 유적으로 부조묘(不祧廟), 명경당(明敬堂) 등이 있다.

 

 

용암박운효자정려비

 

용암박운효자정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