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이자 목조(穆祖)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李陽茂 將軍)의 무덤이다. 이양무는 원래 전라도 전주에 살았는데, 아들인 목조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고려 고종 18년(1231)에 삶을 마쳤다. 나중에 목조가 함경도로 이주하면서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잊히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를 비롯한 조선의 임금들은 조상의 무덤을 찾으려고 매우 애썼다. 이곳이 5대조의 무덤이라고 해서 삼척군(三陟郡)을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는 등 조선 초기부터 능(陵)이라고 불렀지만, 진위가 분명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서야 무덤을 대대적으로 고치고 공식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곳이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목조가 한 스님이 시키는 대로 이양무를 이곳에 안장하였기 때문에 태조가 탄생하였고 이후 조선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준경묘는 부인의 무덤인 영경묘(永慶墓)와 더불어 남한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 왕실 선대의 능묘로서 중요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경묘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이자 목조(穆祖)의 어머니 평창 이씨(平昌 李氏)의 무덤이다. 이씨 부인은 원래 전라도 전주에 살았는데, 아들인 목조와 함께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삶을 마쳤다. 나중에 목조가 함경도로 이주하면서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잊히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를 비롯한 조선의 임금들은 조상의 무덤을 찾으려고 매우 애썼다. 이곳이 5대조의 무덤이라고 하여 삼척군(三陟郡)을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는 등 조선 초기부터 능(陵)이라고 불렀지만, 진위가 분명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서야 무덤을 대대적으로 고치고 공식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영경묘는 높은 봉분, 홍살문, 비각(碑閣)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재실(齋室)과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그리고 남편의 무덤인 준경묘(濬慶墓)와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는 남한 지역에서 유일한 조선 왕실 선대의 능묘로서 중요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추봉(追封): 죽은 뒤에 관위(官位) 따위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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