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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53호 원구단 정문(圜丘壇 正門)

오늘의 쉼터 2011. 11. 5. 11:12

 

 

종 목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53호
명 칭 원구단 정문(圜丘壇 正門)
분 류 ?
수량/면적 ?
지정(등록)일 2011. 7. 7.
소 재 지 서울 중구 소공동 97-3
시 대 ?
소유자(소유단체) 서울특별시
관리자(관리단체) ?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일반설명

 

원구단(圜丘壇) 정문은 1897년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한 원구단(사적 157호)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200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이 문은 비록 오랜 기간 제 위치를 벗어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창건 당시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훼손ㆍ변형되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대외적으로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선포를 알리기 위해 창건한 원구단의 첫 관문에 해당하는 건축물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건축사적으로도 창엽문(종묘 정문), 사직문(사직단 정문) 등과 같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위용을 잘 간직하고 있고, 이전 복원 시 최대한 원부재를 활용하여 복원하였으므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원구단(圜丘壇) 일명 천제단이라고 하는 원구단(圜丘壇)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둥근단으로 된 제천단(祭天檀)을 말한다.”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땅에 제사를 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다. 황제가 정결한곳에 제천단을 쌓고 기원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이미 고대 이전부터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천손족인 환웅은 하늘의 권리를 명받아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 하늘에 맹세하는 의식에서 영고탑을 쌓고 천제를 드리는 때에서 비롯되어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983년 성종2년 정월에 황제가 원구단(圜丘壇)에 풍년기원제를 드렸다는 <고려사>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었는데 태조 7년 (1398) 4월, 가뭄이 심할 때 종묘(宗廟).사직(社稷).원단(圓檀)과 여러 용추(龍湫)에 비를 빌었다는 기록과 세조 때에도 원구단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원구단(圜丘壇)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역성혁명을 하여 황권을 잡은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중화족의 명나라에 속국임을 자처 했고, 그 들 태종때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왕으로서 천제(天際)를 지냄이 합당치 않아 제천단을 폐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성 바깥에 남단을 두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 뒤 고종이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천의식이 행하게 되었다.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달리 하여 황제국이 되어 지금의 소공동 해좌사향(亥坐巳向)에다 길지를 정하고 제단을 쌓아 원구에서 천제를 드리고 황제위에 올랐던 곳이다. 이때 조성된 원구단(圜丘壇)을 보면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 제1층 북동쪽에서 남향하여 있고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북서쪽에서 남향하였다.

2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위와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 뇌사(雷師)오진(五鎭) 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위가 모셔졌다. 또한 제를 올릴 때 영신궁가(迎新宮架)에는 중화(中和)의 악, 진찬궁가(進饌宮架)에는 응화(?和)의 악 등 여러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 뒤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고 원구 황지기 위에 동남에 배천(配天)하였다.

화강암 기단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 기단위에는 돌난간이 돌려져 있고, 1.2층은 통층 인데, 중앙에 태조의 신위(神位)가 있다. 3층에는 각 면에 3개의 창을 내었다.

건물의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인데 청나라 영향의 장식이 많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하여 황궁우 옆에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한 듯 3개의 석고(石鼓)가 있는데 동부에는 용문이 화려하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圜丘壇)의 건물과 터는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일제는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圜丘壇)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 평의 조선호텔(1914년 10월 완공)을 지었다. 그러나 원구단(圜丘壇)의 정문은 그대로 두면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원구단 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