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고미술

나옹 이정(懶翁 李楨)

오늘의 쉼터 2011. 1. 20. 18:55

 

 

나옹 이정(懶翁 李楨) ; 1578(선조 11)~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간(公幹), 호는 나옹(懶翁)·나재(懶齋)·나와(懶窩)·설악(雪嶽). 증조부 소불(小佛), 할아버지 배련(陪連), 아버지 숭효(崇孝)로 이어지는 화원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배련은 이상좌(李上佐)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인물로 보는 2가지 설이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작은아버지 흥효(興孝) 밑에서 자랐다. 5세 때 저절로 그림을 그릴 줄 알아 흥효가 가법(家法)을 가르치니 10세에 이미 대성하여 산수·인물·불화를 모두 잘 그렸다고 한다. 11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신여상인(信如上人)을 스승으로 삼아 승려가 되려 했으나 임진왜란의 발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89년(선조 22) 장안사(長安寺)를 개축할 때 벽에 산수와 천왕도(天王圖) 등을 그렸고, 1599년에 도솔원(兜率院) 미타전(彌陀殿)에 백의대사도(白衣大士圖)를 그렸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의 수행화원으로 활약했는데, 이때 중국사신 주지번(朱之藩)이 그린 불화첩(佛畵帖)을 보고 칭찬하며 제문을 써주었다.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했다. 최립(崔岦)으로부터 시문을 배웠고, 허균(許筠)을 비롯하여 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춘영(李春英)·신흠(申欽)과도 교유했다. 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며 지냈으나 성격이 고매하고 의리가 강했으며 좋은 산수를 보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낭만적이기도 했다. 불교에 심취하여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술을 매우 좋아하여 과음으로 평양에서 30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허균 등에 의해 당대 최고의 화가로 손꼽혔으나 천성이 다소 게을러서 그림을 자주 그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전하는 작품이 당대부터 드물었다고 한다. 화풍은 전통적인 안견파(安堅派) 화풍과 당시 유행하던 절파(浙派) 화풍, 그리고 새로 유입된 남종화풍을 융합한 절충적 경향을 보였다. 유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와 〈산수화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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