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충남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393호 (천안시) 이귀. 이시백 영정

오늘의 쉼터 2010. 12. 31. 21:21

 

종 목 문화재자료  제393호 (천안시)
명 칭

천안이귀.이시백영정

분 류회화/일반회화/인물화/초상화
수량/면적

2점

지정(등록)일 2005.10.31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시 대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연안이씨종중
관리자(관리단체) 연안이씨종중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천안시 문화관광담당관실 041-521-2034

 

일반설명

 

묵재(默齋) 이귀(李貴)와 그의 아들 조암(釣巖) 이시백(李時白) 영정은 문중에서 제작한것으로 추정되며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본과 함께 동일한 초본을 옮겨 그린것으로 판단된다. 천안 박물관에 기탁되어 제2전시실에 전시되었다가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 묵재(默齋)와 조암(釣巖)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1623)년때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묵재(默齋)는 1등 공신으로 67세, 조암(釣巖)은 2등공신으로 32세때 나이로 등록 되었다. 반신상 초상화로서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중후기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조반정의 핵심 주역인 이귀(李貴, 1557~1633)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로 부사용(副司勇) 이정화(李廷華)의 아들이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
이다. 선조36년(1603)에 문과에 급제하고 평산 부사로 있던 광해군 15(1623) 인조반정을 주도하
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호위대장이 되었으며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모단령에 1품관이 착용하는 공작흉배와 서대를 착용하고 있어 도상 자체는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1등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져 1품에 오른 당시의 품계와 일치한다. 그리고 사모가 낮고 둥글며 모정을 거의 명함 차이가 없이 짙게 칠한 점, 양각의 큰 운문, 붉은 주사를 바탕에 칠한 공작흉배 같은 도상들도 정사공신상 단계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어 이 반신상이 본래 이귀(李貴)의 정사공신상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해준다. 얼굴에 연분을 섞은 분홍색을 배채하고 비단 앞면에서 다시 연분을 섞은 분홍색을 후채한 뒤 적갈색 필선으로 얼굴을 선묘하고 주름 사이를 더 어둡게 선염(渲染)하여 명암을 표현했다. 이귀(李貴)의 초상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뾰족하며 눈이 부리부리해 평소 성품이 강개하여 주주 분개했다는 그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초상 상부에는 "정사공신 증영의정 연평부원군 충정공 묵재 이선생진상(靖社功臣 贈領議政 延平府院君 忠定公 默齋 李先生眞像)"이라고 쓰여있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으로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장남이다. 광해군 15년(1623) 아버지를 따라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공신 2등 영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인조 초기 여러 국난에서 많은 전공을 쌓고 효종1년에 우의정에 오른 뒤 효종4년에 연양부원군(延陽釜院君)에 봉해지고 효종6년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사후 충익(忠翼)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시백(李時白)의 사모단령 반신상은 부친 이귀(李貴)의 반신상과 함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데 초상 상부에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 이선생진상(靖社功臣 領議政 延陽府院君 忠翼公 釣巖 李先生振像)"이라는 표제가 단정한 해서로 횡서 되어 있다. 얼굴을 섬세한 적갈색 필선으로 가늘게 선묘한 뒤 흰색을 엷게 배채하고 적갈색 담채로 섬세하게 선염하며 명암을 넣되 콧등과 광대뼈등 볼록하게 나옹 부분에도 적갈색으로 홍기를 강조하는 이중명암법을 매우 고아하게 사용했는데,이는 화법상 17세기 초반의 정사공신상의 특징을 잘 전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주도 뛰어난 편이라 주목된다. 단령은 청색이 강해 통상 짙은 흑자색이나 회청색이 감도는 정사공신상의 전형적인 단령과 다르다. 다만, 현존하는 정사공신상의 원본과 달리 주사를 칠한 붉은색 흉배 바탕에 금분으로 뇌문을 그려 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표제에도 이시백(李時白) 사후에 내려진 충익공(忠翼公)이라는 시호가 쓰여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초상화 자체는 최소한 이시백(李時白) 사후인 17세기 중반 이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시백(李時白)은 평소 청렴하고 근신하며 항상 나라를 걱정하는 충의로운 마음이 넘쳤다고 하는데, 이 이시백(李時白) 초상은 얼굴 전체에 얽은 자국이 가득하지만 매우 청수하고 준수한 용모가 그러한 풍모를 잘 전해주는 듯하다.

 

 

 

천안 이귀·이시백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