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북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477호 (영양군) 태화당고택(太華堂古宅)

오늘의 쉼터 2010. 12. 30. 12:57

 

 

종 목 문화재자료  제477호 (영양군)
명 칭 태화당고택(太華堂古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1526
지정(등록)일 2005.01.10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71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정종철
관리자(관리단체) 정종철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영양군 문화관광과 054-680-6063

 

일반설명

 

태화당고택은 19세기 말엽에 건축된 고택이다. 이 집은 동래정씨의 집성촌인 연당리에 입향했던 정영방의 후손인 정익세의 고택이다.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대문채, 마당 좌측에 있는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태화당고택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 안으로 대문채와 고방채, 살림채인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양반가옥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건물은 거기에다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였는데, 바로 정침의 전면 좌측칸의 사랑마루와 우측칸의 새방 1칸을 좌,우로 1칸씩 돌출시켜 양날개집의 형상을 한 점이 돋보인다.

태화당고택은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마당 좌측에 있는 고방채 외에 대문채를 별도로 두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일자형 건물로, 가운데 칸에 대문을 두고 대문의 좌우로 온돌방을 두어 행랑사람들이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의 좌측에 3칸 규모의 고방채를, 정면에 정면 6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의 정침을 두었다.
정침은 기단을 쌓고 출입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2칸 규모의 방을 두고 좌측에는 사랑을 두었다. 사랑은 온돌방 2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하였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퇴칸의 전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씨는 대부분 신라시대 6부촌 중 하나인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서기 32년(유리왕9) 봄에 지백호가 정씨로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정씨는 경주가 본관이었으나 뒤에 여러 개의 본관으로 갈라졌다. 이 과정에서 동래정씨도 경주정씨에서 분적(分籍)되었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1세조는 역시 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인데, 그 뒤 후손들이 동래에 터를 잡으면서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동래정씨로 연당마을에 처음 입향한 정영방(鄭榮邦)은 본래 지금의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포내리(浦內里)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4살 때 종숙부 정조(鄭澡)의 양자로 입적하여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후에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천 용궁으로 피난을 가서 친형인 정영후(鄭榮後)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처음에는 청부현(淸鳧縣: 지금의 청송군) 진성(眞城)으로 피난했다가, 1596년경에 다시 용궁으로 돌아온다. 이후 1636년(인조14)에 영양(榮陽)의 임천(臨川)으로 거처를 옮기니, 동래정씨가 연당에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