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북기념물

시도기념물 제162호 (성주군) 성주 옥천서원(星州 玉川書院)

오늘의 쉼터 2010. 11. 2. 21:22

 

종 목 시도기념물  제162호 (성주군)
명 칭 성주 옥천서원(星州 玉川書院)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곽/4,378.0㎡
지정(등록)일 2009.07.06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778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성산이씨의사공파종중
관리자(관리단체) 이상연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성주군 새마을과 054-930-6063
 
일반설명
 
이 서원은 조선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서원은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 안방준(安邦俊)과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 사액되었다. 그 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중기의 무인이다. 그는 인조 18년(164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으로 징발되어 동북지방의 전투에 출전하였는데, 이듬해의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 17년(1793)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서원은 산록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였고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뒤쪽에 사당인 충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다.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제향 주인공인 이사룡이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