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都名妓紅桃之墓’의 비문
홍도 최계옥에 관해 살필 수 있는 자료는 현 경북 경주시 도지동 627-1의 兄弟山 가지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무덤 앞에 ‘東都名妓紅桃之墓’라는 비가 있다.
발견 당시 묘는 둘레 10m 높이 2m정도로 일반의 것 보다는 2배 내외로 커 보였고, 비석은 화강암으로 되었는데 반으로 깨진 것을 시멘트로 접속시켜 놓은 상태였다.
비의 높이는 대략 120cm이고 너비는 50cm이며 두께 20cm 크기로 비문은 388자의 예서체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가 깨어지면서 글자도 몇 개 부서져 버렸다.
그 비문의 내용을 편의상 (1)~(7)의 번호를 붙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東都名妓紅桃之墓
伶 李尙福
妓 允惠 松切
(1) 逮至辛亥 州之風流諸俠及敎坊諸伶妓 以娘之爲樂府師宗 不欲泯晦 各損若干財 立石表其墓 屬余爲文
余以娘之實蹟 書而歸之 傳之不朽云爾 爲之銘曰 有美一人兮 擅大東. 容之丰兮 藝之工. 詩以歌兮 諧律音.
山花寂寂兮 月蒼蒼.
(2) 崇禎后四 辛亥八月 日立前僉知 崔南崑識 監役 閑良金周海 折衝張斗寅 敎坊有司 方⌧範 妓有司 福節 雲悅.
(3) 娘之姓崔 名桂玉 字楚山月. 世以紅桃稱者 其尙宮時 御賜別號也. 父嘉善大夫諱鳴東 母⌧⌧東都世妓也.
娘生於戊戌 天姿潁異 年才十歲 通詩書 曉音律 十四歲 色藝雙絶 二十選入于尙醫院 以歌舞獨步長安 名振三國
(4) 國舅苧洞朴相公 見而悅之 納爲外婦 深居數十年 朴相公 戱之曰 汝近何鎖瘐也.
(5) 娘題鸚鵡詩 喩意曰 緣衿紅裳鳥 每向雲霽鳴 雕籠深鎖久 那得不鎖形
(6)及相公捐館 服闋後 歸鄕里 守紅 歲壬午 遘疾疾革 取筆書身後事 以無后嗣 家眥物 施親戚 投筆 就枕而逝
得年四十五
(7) 葬于東都之兄弟山 先隴下負艮原.
이를 필자가 해석하여 제시하면,
동도 명기 홍도의 묘
소리꾼 李尙福
기생 允惠 松切
(1) 마침내 辛亥年(철종 2, 1851)에 이르러 州의 風流客 및 敎坊의 여러 악공과 기생들이 娘[紅桃]을 樂府의 師宗으로 여겨,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각자 약간의 재물을 모아 석돌을 세워 무덤을 표시할 적에 나에게 碑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娘의 실적을 써서 보내니 세상에 오래 전하도록 할 뿐이다. 銘하기를 美人이 있어 東方에 으뜸이었으니 귀여운 얼굴 藝術이 능하였도다. 詩로써 노래하여 음률에 맞았도다. 산에 꽃은 寂寂하고 달만 蒼蒼하도다.
(2) 崇禎後四 辛亥 八月 日에 碑를 세우다. 前 僉知 崔南崑이 글을 쓰고, 監役은 閑良 金周海, 折衝 張斗寅이며,
敎坊 有司 方⌧範이고, 妓有司는 福節 雲悅이다.
(3) 娘의 姓은 崔요 이름은 桂月이며, 자는 楚山月이다. 세상에서 紅桃라 부르는 것은 그가 尙宮이었을 때 임금께서 내린 별호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嘉善大夫[종2품]로 諱는 鳴東이고 어머니는 ⌧⌧인데 東都의 세습 기생이었다. 娘은 戊戌年(정조 2, 1778)에 태어났는데, 天姿가 빼어났다. 나이 겨우 10세에 詩와 書에 통달하고 音律을 깨우쳤으며, 14세에 얼굴과 재주가 모두 뛰어났고, 20세에 尙醫院에 선발되어 들어가 노래와 춤으로 장안에서 독보적 존재가 되고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쳤다.
(4) 國舅인 苧洞에 사는 朴相公[朴準源]이 보고 좋아하여 外婦(妾)로 삼고 수십년을 함께 살았다. 朴相公이 농담으로 놀려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야위었느냐 하니
(5) 娘이 鸚鵡詩를 지어 자기의 뜻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푸른 옷깃에 붉은 치마입은 새는 / 매양 하늘과 무지개를 향하여 울고 있으니 / 깊숙한 새장 속에 갇혀 오래 있음에 / 어찌 얼굴이 야위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6) 相公이 죽자 喪을 마친 뒤에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敎坊에서 일하였다.
壬午年(순조 22, 1822)에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붓을 가지고 죽은 뒤에 부탁할 일을 적기를, 後嗣가 없으니 집안 살림을 친척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붓을 놓은 자리에서 죽으니 나이 45세였다.
(7) 東都의 兄弟山 선영 아래 艮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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