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남문화재자료

문화재자료 제23호 (창녕군)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

오늘의 쉼터 2010. 9. 19. 13:35

 

종 목 문화재자료  제23호 (창녕군)
명 칭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忠翼公忘憂郭再佑遺墟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219㎡
지정(등록)일 1983.07.20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93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창녕군
관리자(관리단체) 창녕군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창녕군 문화관광과 055-530-2236
 
일반설명
 
유허비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그를 기리고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곽재우(1552∼1617)는 호가 망우당이며 선조 18년(1585) 34세의 나이에 별시에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무효가 되자, 일찌감치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크게 패하자 의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하여 적과 싸웠다. 그 공으로 유곡찰방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현풍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 때에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의 네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을 지키며 적의 접근을 막아내기도 하였다가,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라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광해군 2년(1610) 왕의 간청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 일을 맡아보았으나 곧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광해군 9년(1617)에 생을 마치었다. 그 후 ‘충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망우정 뒷편에 서 있는 비는 의병을 일으켰던 공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들이 세워놓은 것으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에 비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모습이다.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전경
 

유허비(전면)

 


유허비(후면)
 

충익공망우곽재우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