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2호 (진주시) |
---|---|
명 칭 | 경남일보 창간호(慶南日報 創刊號)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근대문서류/ 근대문서류 |
수량/면적 | 1매(4면) |
지정(등록)일 | 2009.08.06 |
소 재 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169-17 |
시 대 | 대한제국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하원준 |
관리자(관리단체) | 하원준 |
상 세 문 의 | 경상남도 진주시 문화관광담당관실 055-749-2053 |
일반설명
일제의 침략으로 민족의 국운이 기울던 1909년 10월 15일 진주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신문의 효시라고 일컫는 경남일보가 창간되었다. 경남일보 창간호에는 21명의 각계 유력자의 축사와 축전이 게재되었는데, 매국노 이완용 등 1급 친일파 12명과 진해만요새사령관 궁강 해군소장 등 일제통감부의 일본인 유력자 9명이 실려있다. 이들 가운데 조선인 유력자는 철종의 사위였던 금릉위 박영효를 비롯해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표훈원 총재 조희연, 내각 서기관장 한창수, 경남관찰사 황철, 충남관찰사 최정덕, 동래부윤 김창한 등이었는데, 이들은 이듬해 한일합병 공로자로 한결같이 일제의 귀족이나 총독부의 고위관리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인 귀족을 임명할 때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된 이등박문이 당시 1급 귀족에 해당하는 공작이었던 관계로 조선인들에게는 2급부터 5급까지 작위를 수여했다. 먼저 경남일보 창간호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축사를 했던 박영효는 2급 귀족(후작)으로 합병공로 은사금을 무려 28만원이나 받았다. 이어 한일합병 조약체결에 수훈을 세운 이완용은 3급 귀족(백작)으로 15만원의 은사금을 받았고 이후 2급 귀족인 후작으로 승급되었다. 또한 을사오적 박제순과 정미칠적 고영희와 조중응은 4급 귀족(자작)으로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특히 고영희는 이완용처럼 백작으로 승급되었다. 이밖에 민병석은 4급 귀족(자작)으로 은사금 10만원을 받았고, 진주에서 남강의 수도사업을 벌이던 조희연은 5급 귀족(남작)으로 은사금 2만5천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한창수도 5급 귀족(남작)의 작위를 받고, 훈2등에 서훈되었다. 일제 통감부에 의해 경남관찰사로 등용되어 의병을 폭도로 규정하고 일본군 수비대장과 폭도귀순에 앞장섰던 황철은 한일합병 후 일본에서 여생을 보냈다. 또 최정덕은 총독부에 의해 진주에서 무려 10년간 경남참여관(현 부지사급)을 지냈으며, 김창한은 한일합병 후 일제 참여관과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이들 가운데는 박제순을 비롯해 조중응과 민병석 등은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당한 일제침략의 원흉 이등방문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래서 경남일보도 11월 5일자로 발행한 제2호에서 이등박문를 애도하는 추모사를 게재하는 등 이등박문 추모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경남일보는 ‘이등박문씨가 금번에 북만주 여행중에서 불행히 암살을 당함은 우리의 지실(知悉:죄다 알고 있음)하다’며 상보를 게재하는 이유를 밝혔다. 또한 경남일보는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행흉자(行兇者)’, 즉 ‘흉악한 행위를 한 범죄자’라고 표현한 제목을 기사에 달았다. 무엇보다 경남일보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위암 장지연일 것이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을 황성신문에 발표해 문명을 떨친 항일언론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장지연은 경남일보 창간호에 실린 박제순에 대해 을사조약을 체결했던 장본인이라며 황성신문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으로 규탄한바 있었다. 그래서 장지연을 2004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이다. 이러한 장지연이 진주에 내려와 경남일보의 주필을 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경남일보가 창간호부터 친일파의 축하로 지면을 도배하고, 창간2호에 안중근 의사를 흉악범으로 묘사했지만 장지연은 애국계몽의 논조를 그런대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례로 경남일보는 1910년 국치를 당한 직후 한일합병 때 자살한 ‘매천 황현(黃玹)’의 절명시를 게재함으로써 정간까지 당했다. 하지만 복간 이후 경남일보의 행태는 일제의 최대 명절인 천장절을 기해 180도로 바뀌었다. 한일합병이 되던 그해 경남일보는 첫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쌍으로 신문의 제호 밑에 큼직하게 걸어놓았다. 또 그 이듬해인 1911년 천장절에는 신문에 이를 축하하는 기념한시를 게재했는데, 그 시에는 즉위 44년을 맞은 일본왕 명치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빌고 있었다. 더구나 경남일보는 1911년 11월 2일자에 “오는 3일은 천장가절인 고로 경축하기 위하여 하루 휴간한다”는 기사를 게재하고, 11월 3일 밤에는 신문사가 직접 ‘천장절(天長節) 축하의절(祝賀儀節)’을 경축하는 행사를 주최했다. 이날 경남일보사는 진주의 중심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수정봉 정상에서 천 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천장절(祝天長節)’이란 4글자로 밤하늘을 밝히면서 대대적으로 천장절 경축회를 개최했다. 이게 모두 ‘항일언론인’이라는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로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경남일보를 탄생시킨 주역들의 그 후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창간 때 주필을 맡았던 장지연부터 살펴보자. 한일합병이 되자 의기를 꺾은 장지연은 1913년 말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그의 문장도 본격적으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마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에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친일논조의 글을 쓰면서 만년을 변절한 언론인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경남일보 창간 때 초대 사장을 지냈던 김홍조는 울산의 대부호로서 나중에 명치신궁 봉찬회(奉贊會) 조선지부원에 위촉될 정도로 친일성을 인정받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후보까지 추천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홍조의 흔적으로는 박영효가 쓴 공덕비가 있다. 또한 창간 때 대판사장을 했던 정홍석은 한일합병 후 진주에서 조동면장 겸 문산면장으로 발령받았으며, 나중에 총독부 직속의 경남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과 진주군 참사를 지냈다. 그리고 창간 때 임시사무소장과 회계감사장을 지낸 김기태는 더욱 화려하다. 그는 한일합병 후 진주면협의회원, 경남도평의원,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또한 창간 때 부사장을 지낸 강위수도 한일합병 후 진주군 가차례면장 겸 축동면장을 역임했던 자였다. 더구나 이 두 사람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비행기헌납금으로 무려 1만원씩을 나란히 기부했다. 이밖에 창간 때 대판총무을 지낸 서진욱은 한일합병 후 진주군 대안면장으로 발령받았으며 나중에 금융수탈기관인 식산은행 진주지점 이사까지 지낸 자였다. 마찬가지로 창간 때 서진욱처럼 대판총무를 지낸 정희엽도 나중에는 진주에서 학무위원과 총독부 직속의 경남토지조사위원 및 경남도 참사를 지낸 자였다. 이처럼 경남일보 창간 당시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나중에 일제의 관공리를 하거나 부역자의 감투를 둘러썼던 것이다. 그후 경남일보는 어떻게 되었는가. <경남일보>는 1915년 운영난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경남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더불어 한일합병 후 살아남은 한글로 된 신문 2개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현재의 경남일보는 사사를 해방 직후 창간된 경남일보로 보지 않고 친일행각을 벌인 대한제국 말부터라고 기간을 늘려 잡고 있는데,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이다.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각종 검색사이트에서도 경남일보의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잘못 기록된 경남일보의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유력한 포탈사이트 야후와 다음의 백과사전을 검색해보면 경남일보가 ‘구국운동의 민족지’ 또는 ‘항일논설로 폐간됐다’는 등의 기록이 나오는데, 실로 가당치 않은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경남일보-전면 경남일보-후면 |
'문화재 > 경남유형문화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4호 법륜사 구품탱 (0) | 2010.08.31 |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3호 진주 월명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해제> (0) | 2010.08.31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1호 도천리 하륜 부조묘 소장 삼공신회맹록 (0) | 2010.08.31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0호 하동 쌍계사 감로탱 (0) | 2010.08.31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79호 하동 쌍계사 범종 (0) | 2010.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