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유형문화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순천 팔마비

오늘의 쉼터 2010. 7. 21. 18:32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명 칭

순천 팔마비 (順天八馬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1980.06.02
소 재 지전남 순천시 중앙로 95 (영동)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
관 리 자순천시

 

설명

 

비석은 현재 영동 우리은행(구 승주군청)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팔마비의 건립내역을 적은 내용이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되어 내용 판독이 힘들다. 이 비의 건립 배경에 대해서는『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고려사』권34의 열전 최석에 기록된 관계 사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승평부에서는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태수에게는 말 8필을 주고, 부사(副使)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석碩이 갈려감에 미쳐서도 읍인들이 말을 바치고 좋은 것 고르기를 청하니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이어늘 말을 골라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내니,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으므로 석이 말하기를“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그 망아지까지(모두 9필) 아울러 돌려주니 이로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으므로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까지 순천지역에 널리 알려진 팔마비의 유래이며, 이 비는 한국의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현재 세워진 비석은 당시의 비석이 아니다.

1365년(공민왕 14)에 다시 세워 전해 내려오던 중 조선시대인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훼손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승주부사(昇州府使)로 부임해와 그 이듬해 최석의 뜻을 기려 복원한 것이다. 이때 대석은 처음 중건 당시의 것을 그대로 쓰고 그 위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원래 남문 통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1930)에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하천 확장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인 옛 승주군청 앞 도로변으로 옮겨진 것이다. 복련좌대석 위에 놓인 직사각의 비석으로, 조선시대의 일반형 비석과는 다른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다.

 

크기는 높이 160㎝, 너비 77.5㎝이며 재질은 화강암으로 대석은 가로 140㎝, 세로 85㎝, 높이 40㎝이다.

앞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팔마비(八馬碑)’는 진사 원진해(元振海, 1594~1651)의 글씨이며, 뒷면에 음각되어 있는 팔마비 중건기는 이수광이 짓고,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이 썼는데 마멸이 심하다.

비문은 승평지(昇平志)에 수록되어 있으며,1977년 8월에 비석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건립하였다.





순천 팔마비

순천 팔마비

순천 팔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