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부산유형문화재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3호 다대포객사

오늘의 쉼터 2010. 6. 28. 15:04



종     목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3호

명     칭다대포객사(多大浦客舍)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1동 산144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부산광역시

관 리 자

사하구

일반설명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의 하나로 각 지방의 행정중심지에 있었다. 수령이 부임할 때 의식을 치르고 또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안치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하는 것)를 드리던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현재 다대포 몰운대 내에 있는 객사는 조선 후기 다대포 일원의 방어를 담당하던 다대첨절제사영(多大僉節制使營)의 객사 건물이다.
다대포를 비롯한 남해안은 예로부터 왜적들의 침략이 심했던 곳이다. 조선 세종 때 삼포의 개항으로 남해안의 방어가 중요시 되어 부산포와 제포(薺浦)에 첨절제사영을 두고, 경상좌도에는 다대포 등 10포(十浦)에 만호영(萬戶營)을 두었다. 이때 다대포영은 장림포(長林浦)에 있었는데, 언제 다대포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명종 이후 수군제도의 변경에 따라 진보제(鎭堡制)가 실시되자 부산포와 다대포는 방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진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군제의 개혁으로 다대진은 부산진, 두모진(豆毛鎭), 개운진(開雲鎭), 포이진(包伊鎭), 서생진(西生鎭), 서평진(西平鎭)과 함께 경상좌도의 7진의 하나가 되었다. 다대진은 부산진과 함께 중요한 곳으로 인식하여 다른 진보다 2배의 병선을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첨사는 정3품 당상관의 높은 벼슬이 주어졌다.
다대포객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대진이 설치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가 1825년(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벽체가 없이 기둥만 남아 마치 누각 건물처럼 보인다. 객사 건물은 가운데 정당(正堂)과 좌우에 날개처럼 익실(翼室)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임을 볼 때 현재 남아 있는 정당 건물 외에 좌우에 익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관청 건물이 그러하듯이 다대첨사영 역시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로 전용되면서 다대포객사 건물도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1970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복원하였다. 그러나 이 객사 건물을 원 자리인 다대초등학교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역사적․문화재적 가치 뿐 아니라 교육적인 효과가 보다 컷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대포객사

다대포객사 민·관·군합동 소방훈련

다대포객사 문화재 안내간판 보수

다대포객사

다대포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