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하고 싶었다
1.
어제 오후부터 결혼식장에서 오래 머물렀던 탓으로 무척이나 피곤했다.
피곤한 게 지나치면 밤에는 깊이 잠들지 못할 터.
새벽 5시를 훌쩍 넘은 시각에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오랫 만의 산책, 오른발바닥에 생긴 티눈의 통증으로 뒤뚱거리며
천천히 잠실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갔다.
단지 안의 인도변에는 잘 가꾼 조경수, 화목, 수변의 창꽃, 붓꽃들이
한데 어울려서 녹음과 화사한 꽃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석촌호수 서편 공터의 쉼터에는 간이 운동보조 기구가 있어서 노인네들이 가
볍게 흔들면서 몸을 풀고 계셨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서 두 팔을 뒤로 제끼며,
등을 굽혀서 허리의 유연성을 유지하고 싶었다.
시골에서 노동으로 굳어진 삭신이 잠깐만의 아침 체조로 풀릴 성질은
아닌 만큼 몸이 지나치게 묵직하고 행동거지도 어뚠했다.
퇴직한 뒤 시골로 내려 간 시간만큼 나도 버썩 늙어 갔다는 것을 절감했다.
조금은 마음이 속상하고 답답해서 등신처럼 팔 다리를 흔드는 것조차 그만 두었다.
석촌호수 안에는 여러 종류의 꽃단지가 조성되었기에 장미원으로 갔다.
형용색색의 장미가 붉고, 붉으스레하고, 노랗고, 하얗게 피어 있었다.
키 작은 것으로부터 줄기가 엄청나게 긴 줄장미도 탐스러운 꽃망울을 밀어내며,
꽃 피우고 있었다. 꽃은 풍만한 여인네의 젖통만큼이나 동그랗고 탐스러웠다.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감흥조차 발동했다.
예쁘다, 고혹스럽게 탐스러웠다는 느낌으로도 나는 얼굴을 붉혀야 했다.
호수 수변가의 산책로를 따라서 천천히 완보했다.
5월의 녹음이 초여름으로 짙어가는 길목에서 수목마다 푸른 잎새가 아침해를 가리고,
잎사귀에서 나는 내음새는 수면 위에 떠올랐다.
호수의 물결이 잔잔한 파문을 일렁이고......
산책로 가생이에 식재한 작은 화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새순 한 가지를 잘라서 물에 담궜다가 땅에 심으면 싹이 움틀 것 같다.
어린 가지 하나를 한 뼘만큼만 잘랐으면 하는 욕심이 끈질지게 일어났다.
보라빛 창포, 노란 붓꽃의 줄기를 손으로 잡아 당겨서 한 뿌리만 캐 올 수만 있다면야
참으로 행복해 하련만, 풀 한 포기조차도 손대지 못했다.
내가 花木과 풀에 욕심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 시골로 가져 가 번식시키고 싶은 욕심일 뿐.
조경수의 새순을 자르고, 꽃 모종 한 포기를 훔치고 싶은 盜心을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떳떳하게 구입해서 키우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거렸다.
시골 장터에서 화목, 꽃의 모종을 조금씩 사야겠다는 결심만 굳어졌다.
적은 돈으로는 어린 묘목과 싹에 불과한 모종만을 사야할 터.
오랫 동안 돌보고 키워야만 成木이 되고, 꽃망울 피울 터.
키우는 시간이 더디고, 기다리는 시간이 마디면 어떠랴 싶다.
텃밭에서 어린 묘목을 키우고, 풀 한포기라도 가꾸는 재미로 세월을 보내야겠다.
한 20년 동안, 내가 살아 있는 날까지 잘만 키운다면 나름대로 푸르름으로 가득 찰 게다.
나무를 가꾸고 꽃을 피우고 싶다는 작은 소망만으로도 노년이 행복해질 것 같다.
우람하고 멋진 수목과 꽃들이야 잘 가꿔진 정원, 공원, 화원, 산과 들판에서
눈요기하면 족할 터.
시골 텃밭에 무성하게 나는 그 많은 망초, 개망초, 억새와 같은 잡초도
잠실 석촌호수 정원 안에서는 그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미움덩어리 잡초라도 이따금 한두 포기 눈에 띄이니까
그게 수수해서 조금은 눈길이 갔다.
지나치게 많은 것은 우리를 질리게 하지만
때로는 작고 적을 때에는 그 존재가치가 돋보이게 마련.
빽빽한 것보다는 조금은 성기고 때로는 빈 듯한 것이
오히려 더 정이 가는 이치는 무엇일까?
나이 듦어감에서 일렁이는 여린 감흥이겠지.
2.
생질 결혼식은 끝났고, 아비의 기제사를 내일밤에 지낸 뒤인
모레 아침에는 또 시골로 내려가 텃밭을 돌보렵니다.
며칠간 자리를 비웠으니 잡초들은 몰라보게 웃자랐겠지요.
내가 키우고 가꾸는 작물은 고작 눈꼽만큼만 더디게 자라는 데에 비하여
잡초는 왜그리 무성하게 잘만 자라던가요?
다른 작물의 성장을 더디게 하고(他減, 억제),
枯死시키는 잡초를 호미로 뽑아 줘야겠습니다.
풀을 뽑으려면 고개를 숙이고 흙을 가까이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잘디잘은 작물의 모종이 보이니까요.
고개를 더 낮게 숙일수록 事物과 眞實이 더 잘 보이더군요.
<수필가 최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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