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수트라>
************
I. 요가의 목표
************
1-1. 이제부터 요가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요가'yoga라는 말은 '결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소나 말에) 멍에를 씌우다'라는 뜻의 yoke는 산스크리트어의 요가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요가란 육체와 정신 또는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요가는 유한한 현상세계의 배후에 있는 실재, 즉 神性과 결합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 하나이다.
완전한 요가의 상태에 도달하면 神性과 합일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비적인 결합'이라는 말로 요가와 비슷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요가 수트라>의 주석가 중에서 고전적인 인물인 브호자(Bhoja)는,
파탄잘리가 쓴 요가라는 말의 개념을 '참 나가 아닌[非眞我] 현상세계에서 참 나[眞我]인
실재를 떼어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 했다. 요가 수행자를 요기yogi라고 부른다.
S: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파탄잘리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요가를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학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말만으로는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실제적인 수행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1-2. 요가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파탄잘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마나스manas, 붓디buddhi,
그리고 아함카라ahamkar라고 하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마나스는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세계에서 받아들인 느낌을 모아두는 속성을 가리 킨다.
붓디는 그 느낌들을 분류하여 어떤 특정한 느낌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하도록 구별하는 속성이다.
아함카라는 어떤 느낌을 받는 것도'나'이며 그러한 여러가지 느낌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것도
'나'라고 생각하는 에고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마나스는 '어떤 살아 있는 큰 물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 '저건 몹시 화가 나서 누군가를 공격하려고 달려오는 황소로구나'하고 붓디가
재빨리 판단한다.
그러면 아함카라는 '나를 받으려고 달려오는 거로구나'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달아난다.
화가 난 황소를 본 것도 '나'이고, 놀란 것도 '나'이며, 도망간 것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함카라의 작용이다.
잠시후 아함카라는 근처 나무가지에 매달린 채로 "이제 '나'는 이황소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체험해서 알았으니 앞으로는 이 황소를 만나면 피해야지."라고 말할 것이다.
만물의 토대인 신[主人空]은 만물 속에 두루 깃들어 있는 실재다.
실재가 진정한 실재가 되려면 없는 곳이 없어야 한다. 감각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나 생명이 없는 사물에나 모두 깃들어 있어야만 진정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이렇게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참 나인 신[主人空]을 아트만Atman
또는 푸루샤Purusha라고 한다.
파탄잘리는 푸루샤 라는 말만 썼다.
(푸루샤의 문자적인 뜻은 '몸 안에 거하는 神性'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푸루샤 대신 아트만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가 아트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푸루샤 보다는 아트만이라는 말에 훨씬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는 하나의 아트만이 만물 속에 깃들어 있다.
[만물은 동일한 主人空의 나툼이다]고 가르친다.
파탄잘리는 상키야 철학을 따라, 모든 개체와 대상은 각자의 푸루샤를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루샤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각자의 푸루샤'와 관련된 '서로 다름'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는 영적인 구도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은 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요가철학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아트만[主人空]이 지성 그 자체이자 순수의식이며, 마음은 아트만[主人空]의 지성과 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지성과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을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지식과 인식은 마음 즉 거울 속을 지나가는 일종의 사고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앎은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구 심리학자들이 내성(內省) 또는 자기에 관한 앎이라고 부르는 것도 파탄잘리에 의하면
객관적인 앎이다.
마음은 '보는 자'(the seer)가 아니라 외부세계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자'인 아트만[主人空]은 알려지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주체이기 때문에 마음을 통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모든 인식작용은 '내가 이것을 안다'는 식의 에고의식[我想]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에고이지 참 나인 아트만[主人空]이 아니다.
에고의식[我想]은 마음이나 감각 등을 참 나와 동일시하는 데서 생긴다.
마음이나 감각을 참자아인 아트만[主人空]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구가 자신을 전기電氣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속에 텅스텐 필라멘트가 있는 서양배 모양의 유리로 된 작은 물건이 자신을 전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에고가 스스로를 참 나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전구가 전기는 아니다. 전구를 밝게 빛나게 하는 것은 전기다.
전구가 전기가 아닌 것처럼 모든 개별적인 존재와 사물이 아트만[主人空]은 아니다.
하지만 전기가 전구를 밝게 빛나게 하는 것처럼 아트만[主人空]은 모든 개체와 사물의 존재의
근원이다.
외부로부터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감각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마음 속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에고의식은 그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즐거운 생각이 들면, 에고의식은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즐겁지 않은 생각이 들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즐거운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시적인 에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집착하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불행하게 될 가능성을 준비하는 것이다.
참 나인 아트만[主人空]은 생각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히 순수하고 자유로운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참나[主人空]만이 참되고 불변하는 행복이다.
개체로서의 '나'라는 에고의식[我想]이 있는 동안,
즉 생각의 흐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안에는 결코 참 나[主人空 ]를 알지 못한다.
참 나[主人空]를 깨닫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그릇된 에고의식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
<기타>는 "요가란 고통과 만나는 접촉점을 부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석가들은 생각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호수의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호수 표면에 거친 물결이 일면 호수 전체가 흙탕물이 되어 바닥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호수는 마음을 가리키고 호수 바닥은 아트만[主人空]이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생각의 흐름의 통제'은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요가의 수행이 '마음을 공백상태로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마음을 공백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요가 보다는 친구에게 쇠망치로 뒷통수를 힘껏 때려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훨씬 쉽다.
자신에 대한 폭력을 통해서는 아무런 영적인 진보도 이룩하지 못한다.
생각의 흐름을 일으키는 육체의 기관을 때려 부수는 것이 요가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의 흐름과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런 작업이 곧 요가다.
그래서 요가는 훨씬 더 어렵다.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성격도 완전히 변한다.
성 바울의 말처럼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요가와 성격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서 예로 든 호수의 비유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
파도는 호수 표면만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다.
쉬지 않고 출렁이는 물결은 호수바닥에 모래나 자갈을 쌓아 놓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래밭이나 자갈더미는 파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생명력이 길다.
파도가잔잔해져도 바닥의 모래밭이나 자갈 더미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수 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나 자갈은 잠재의식과 무의식 영역에 존재하는 잠재력,
가능성, 또는 어떻게 하려는 경향에 비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이것을 삼스카라(samskaras)라고 부른다.
삼스카라는 계속되는 생각의 흐름에 의해 쌓인다.
그리고 일단 삼스카라가 형성되면 삼스카라는 새로운 생각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삼스카라와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상호 상승작용을 한다.
마음속에서 분노의 파도가 일면, 이 분노의 파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분노 삼스카라를 남긴다.
이렇게 형성된 분노 삼스카라는 어느 때이고 화를 터뜨릴 기회만 기다리고 있게 된다.
사람들은 분노 삼스카라를 많이 쌓아 놓고있는 사람을 '성격이 못 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쌓아 놓은 삼스카라의 총체가 곧 우리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결의 흐름의 방향이 바뀌면 모래밭도 옮겨지거나 모양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삼스카라도 마음 속에 종류가 다른 생각의 흐름을 도입 함으로써 바꿀 수가 있다.
요가와 서구 과학은 이 문제에 관해 서로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삼스카라는 이 생에서 모두 획득된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떤 성격적인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서구 과학은 타고나는 성격적인 경향을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요가철학은 삼스카라를 전생前生에서 얻은, 즉 수많은 윤회의 삶을 거치면서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로 쌓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출생은 한 개인의 영혼이 삼스카라의 힘
에 의해 자신의 삼스카라와 비슷한 삼스카라를 가진 부모를 선택해 이
땅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질을
'유전적으로' 물려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가 상태를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삼스카라가 어디서 왔는지,
또는 자신의 삼스카라가 얼마나 오 래 된 것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시
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삼스카라를 변형시키거나 제거하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
마음 상태가 아직 고차원적인 요가를 수행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약하고 경직된 육체를 가지고 어려운 발
레 동작을 하려다가는 다치기 십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쉬운 동작부터
차근차근 연습해 나가야 한다. 마음이 산만한 사람은 마음의 작용을
쉬고 집중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게으르고 느슨한 성격의 소유자들에
게서는 건설적인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활력은 있으나 쾌락만
을 추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든지 모든 사람은 수행을 통해 변할 수 있으며,
파탄잘리가 말하는 완전한 요가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S: 파탄잘리는 이 구절에서 요가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명민
한 수행자라면 이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나머지 경
구들은 모두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작용
이 통제된다면 요가의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흔히 요가를 '결합'이라
고 번역한다. 그러나 결합하기 위해서는 결합하는 두 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가의 경우 무엇과 무엇이 결합한다는 말인가? 그래
서 나는 요가를 (결합이라기 보다는) 요가 수행자의 체험을 뜻한다고
본다. 의식의 작용을 통제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비일상적인 체험을
요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외부세계는 전적으로 그대의 마음과 생각 여하에 달려 있다. 외
적인 세계는 모두 그대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그대의 가치관은 순
식간에 변할 수 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여인
이 오늘은 꼴도 보기 싫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여자가 변했기 때문
이 아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외부세계를 향해 지금까지 해온 것처
럼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으리라.
1-3.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거한다.
마음의 호수가 잔잔해지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
였는지, 누구일 것인지를 알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이 아트만이라는 것
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라는 그릇된 믿음에 기초를 둔 개인적인 '인격' 내지는 '성격'이
사라진다. '아무개'라는 것은 겉옷이나 가면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포
장에 지나지 않는다. 외적인 포장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둘러 치든
지 벗어던지든지 할 수 있다. 외적인 포장을 벗어버리면 깨달음을 얻
은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S: 그대가 '보는 자'[主人空]이다. 육체나 마음이 그대가 아니
다. 그대는 '보는 자' 또는 '아는 자'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 움
직이는 것을 알고, 그대의 육체가 움직이는 것을 본다. '보는 자'인
그대는 이렇게 그대의 마음과 육체를 보고 있지만, 결코 보여지는 대
상인 마음과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고자 하
는 '보는 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는 자'인 그대가 '보는 자'인 자
기 자신을 볼 수 있을까?
그대는 그대의 얼굴 조차도 항상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보는
기관인 눈이 얼굴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얼굴은 보는 자 또
는 주체이다.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 서야 하는데, 거울에
비친 영상은 보는 자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다. 만약 거울이 찌그
러졌거나 더러워져 있다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찌그러지고 더러울 것
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찌그러지고 더럽다고 슬퍼
하거나 괴로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거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영상
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울이 맑고 깨끗해야만
있는 그대로의 얼굴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한 그대인 '보는 자'는
거울 역할을 하는 그대의 마음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파도가
일고 있으면 진정한 그대인 '보는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대의 참 나인 主人空을 보려면, 그대의 主人空을 비추는 거울인 그
대의 마음이 완전히 잠잠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1-4. 다른 때 즉 요가상태에 있지 아니한 경우에는,
생각의 흐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 머무른다.
S: 그대는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채 그대의 생각이나 육체를 그
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대가 '나는 남자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남성의 육체와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는 교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대의 두뇌 속에 모아 놓은 지식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 하
는 것이다. '나는 누구 엄마다'라고 말하거나 '누구 남편이다'라고 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키가 작다' 또는
'나는 흑인이다', '나는 백인이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자신의 피부색
이나 육체의 형태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와 이름
은 동일한 에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파탄잘리같은 요가 과학자들
은 불변하는 의식 또는 참 나[主人空]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동일한
에너지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현대의 과학자들도 그
렇게 말하고 있다.
1-5. 생각의 흐름은 다섯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고통스러운 것과 고통스럽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진다.
파탄잘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은,
그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부터 고통스러운 것을 뜻하지 않는다.
파탄잘리는 무지를 증가시키고 무엇에 탐닉하여 스스로 굴레를 쓰는
결과를 낳는 생각을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더 큰 자유와 깨달음을 향
해 몰고 가는 생각의 흐름은, 처음에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실제로는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탐욕은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
름이다. 욕심대로 만족을 누려 기쁨을 얻는다해도, 탐욕의 대상에 탐
닉하게 되고 더 큰 욕심을 불러 일으켜 스스로 굴레를 뒤집어 쓰는 결
과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정심은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
이다. 동정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이타적인 감정으로
서 이기심의 굴레를 벗겨준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그런 동정심과 자비는 우리를 깨
달음과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아플지라도 고통스러
운 생각은 아니다.
실제로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을 '고통스러운
것'과 '고통스럽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생각의 흐름이 일시에 통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고통스
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잠재워야 한다. 분노, 욕망, 망상 등을 사랑, 관용, 진리에 대한 생각
의 흐름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이 완
전히 잠잠해져야만 다음 단계의 수행을 해 나갈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수행이란,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 낸 고통스
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을 잠재우는 훈련을 말한다.
선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생각의 흐름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잠재
워야 한다는 말이 서구식 도덕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숙고해 보면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쉽
게 납득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아름답고 고상하다 할지라도, 외적인
세계는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이다. 외적인 세계는 결코 근본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외적인 세계의 내면을
통해서 아트만[主人空]을 깨달을 수 있다. 미워하는 것 보다는 사랑하
는 것이 좋고, 착취하는 것 보다는 나누는 것이 좋다. 그리고 거짓
말 하는 것 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확실히 더 좋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더 좋은 덕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의 흐름 역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는 마찬가지이다.
개혁운동이나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불철주야 애쓰는 사람
들이 있다. 그들은 뭇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의 마음은 고요하지 못하다. 열망으로 들끓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는
휴식이 없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마음은 고요하다. 그들의
마음이 고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만물 속에, 심지어는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싸움과 투쟁이 그치지 않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에는 아트만[主人空]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고요할 수 있는 것이다.
S: 생각의 흐름을 '고통스러운 것'과 '즐거운 것'으로 나누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 소위 즐거운 생각 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어떤 생각은 고통스럽게 시작되지만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어떤 생각은 즐겁게 시작되지만 고통을 안겨 준다.
1-6. 생각의 흐름은 올바른 앎, 그릇된 앎, 언어에 의한 망상,
잠, 기억이라는 다섯 가지 형태를 띤다.
1-7. 올바른 앎이란 직접적인 지각과 추론과 경전의 증거를
통해 얻는 앎을 말한다.
오관을 통해 직접 지각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올바른 앎
이다. 직접적인 지각을 근거로 합리적으로 추론한 것 역시 올바른 앎
이다. 경전의 가르침은 완전한 요가상태를 이룬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얻은 초의식超意識적인 깨달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시올바른 앎이다.
경전의 가르침들은 초의식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진리로써, 우리의 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지각 보다 훨씬
더 자명하다.
S: 그대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직접 경험한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직접 경험이 확실한 앎을 얻는 한 방법이다.
올바른 앎을 얻는 다른 방법으로 추론이 있다. 그대는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불이 있다는 것을 추론해낸다.
불이 없이는 연기가 날 수 없기때문이다.
그대는 젖소 '한 마리'가 우유를 내는 것을 보고, 모든 젖소를 보지 못했음에도
'젖소들'이 우유를 낸다는 것을 안다. 추론을통해서 그렇게 아는 것이다.
올바른 앎을 얻는 길이 하나 더 있다.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니고 추론을 통해 얻은 것도 아니지만, 믿을만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대에게 전해주는 것을 통해 올바른 앎을 얻을 수 있
다. 우리는 보통 이것을 경전이라고 부르는데, 경전의 가르침은 현자와 성자와
예언자들의 말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1-8. 그릇된 앎이란 대상의 참다운 본질에 기초를 두지 않은 앎을 말한다.
요가문헌은 밧줄을 뱀으로 착각한 비유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면, 밧줄을 무서워하고 도망치든지 아니면 밧줄을 죽이려 들 것이다.
S: 그대는 어둠 속에서 밧줄을 보고 뱀인줄 알고 놀랄 것이다.
실제로는 뱀이 없다. 착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렇듯, 확실한 앎 뿐만 아니라 그릇된 느낌 역시 생각의 물결을 일으킨다.
1-9.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들을 때 마음 속으로 그리는
그림[心象]이 언어에 의한 망상이다.
결론으로의 비약은 언어에 의한 망상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성급하게 그가 말하는 뜻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확하지 않은 결론을 내린다. 정치연설에서는 언어에 의한 망상이 이중적으로 생긴다.
연사는 자기는 어떤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청중은 그의 말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한다. 이 경우 연사나 청중은 다 함께 언어에 의한
망상을 일으킨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정신'이나 '미국인의 생활방식' 등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둘러싸고 각 신문과 라디오가 언어에 의한 망상을 얼마나 심각하게
일으키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S: 그대는 무언가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다.
그릇된 앎의 경우에는 뱀으로 착각한 밧줄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언어에 의한 망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어떤 말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는다.
1-10. 잠이란 無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말한다.
꿈 조차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생각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잠이란 적극적으로 無를 체험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잠과 생각의 흐름이 멈춘
요가 상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잠자는 동안에는 생각의 흐름이 정지된다면,
깨어난 다음 자는 동안에 아무 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hnan)은 자신의 저서 <인도철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개는 잘 자고 난 후에도 역시 아무개이다.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후의 그의 경험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으며, 멈추지 않는 생각이 그의 경험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경험으로 연결 한다.
이러한 경험의 연속성은 모든 의식상태 밑바닥에 영원한 자아[主人空]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S: 흔히 자는 동안에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동안에도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 생각없이 잘 잤다"고 말한다.
즉 자는 동안에도, 자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1-11. 기억이란 인지했던 대상이 잊혀지지 않고 다시 의식 영역으로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기억은 일종의 2차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직접적인 지각이 일으키는 생각의 흐름은 보다
작은 생각의 파문을 연속적으로 일으킨다.
잠이라고 하는 생각의 흐름 역시 잔물결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꿈이란 자는 동안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 의식의 활동이다.
S: 기억이란 마음 속에 인상을 남겼던 것이 때가 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인상은 때로는 원할때, 또 때로는 원하지 않아도 떠오른다.
기억은 꿈과 몽상이라고 하는 두 가지 형태로 의식 표면에 떠오른다.
꿈은 자고 있는 동안 떠오르는 기억이며, 몽상은 깨어 있을 때 떠오르는 기억이다.
과거에 받은 인상이 서서히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았다가 어떤 이유에서 다시 불이 붙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꿈과 몽상이다.
마음을 비우고 내적인 평화에 들기 위해서는 이상의 다섯 가지 생각의 흐름을
통제 해야만 한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당연히 생각의 흐름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일 수 밖에 없다.
마음을 통제하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이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12. 이들은 훈련과 집착하지 않음으로 통제된다.
1-13. 훈련이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행을 반복하는 노력을 말한다.
S: 파탄잘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루나 이틀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항상 수행상태에 있어야 한다.
하루에 단 몇 분 훈련하고 나머지 시간은 마음이 끌고가는 대로 끌려 다니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항상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시해야 한다.
파탄잘리는 다음 구절에서 훈련에 필요한 세가지 조건을 말한다.
1-14. 오랜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정성을 다해 훈련해야 확고한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S: 파탄잘리는 단지 '오랜 세월'이라고만 말할 뿐,
얼마나 오래훈련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훈련을 시작한 지가 아무리 오래 되었다해도,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하는 식으로는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정성을 다하라'는 말은 철저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훈련에 임하라는 뜻이다.
1-15. 집착하지 않음이란 보고 들은 것을 갈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물결은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욕망의 형태로 대상 세계를 향해 흐르든지, 아니면 참 나[主人空]에 대한 깨달음
즉 해탈의 경지를 향해 흐른다.
그러므로 훈련과 집착하지 않음은 둘 다 필요하다.
집착하지 않음이 결여된 상태에서 행하는 훈련이나 훈련이 안 된 상태에서 집착하지 않으려는
것은 둘 다 쓸모가 없고 심지어는 위험하기 조차 하다.
욕망이라는 생각의 물결을 통제함이 없이 행하는 영적인 훈련은 마음에 심한 동요를 일으켜
조화와 균형을 깨트린다.
반면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과 같은 반대되는 생각의 물결을 일으키는 훈련은 하지 않고,
욕망의 물결만을 엄격하게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훨씬 더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엄격한 청교도가 갑자기 자살을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엄격한 청교도는 '악한 생각'은 품지 않고 '선한 생각'만 하려고 극단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악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에 빠져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고자 하는 영적인 훈련은 흔히 '요가 8지칙八支則'이라고 부르는데,
훈련의 단계가 8단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순서에 따라 각 단계의 훈련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수행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의와 좌절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일시적인 실패도 용맹정진을 멈추게 하는 핑계가 될 수 없다.
스키를 배운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 배울 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진다고 해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위엄있게 보이고자 하는 위선자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이 웃건 말건
그런데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노력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결코 어떠한 실패도 영원한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실패란 수행자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은총이다.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나는 왜 저것을 갖고 싶어 할까? 저것을 가지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그 이득은 영원한 것일까? 저것을 갖는 것이 깊은 깨달음을 얻고 보다더 자유롭게 되는데
도움이 될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짐으로써 순수하지 못한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점진적으로 통제해 나가야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대상은 영원한 자유를 얻는 데는 필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무지의 굴레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잠재적인 무기일 뿐이라는 답이 나올 것은
뻔한 이치다.
더 나아가 욕망은 꼭 어떤 것을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라기 보다는,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일어나는 욕망 이라는 생각의 물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마음이 고요할 때는 이런 생각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마음이 분노,정욕, 탐욕의 거대한 물결에 휩싸이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런 때에는 과거에 생각했던 합리적인 결론을 되살려 내야만 한다.
즉 "지금 감각적인 대상으로 인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결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또 지금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에고의식 역시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이런 것은 근본실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되살려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결연한 의지의 노력이 없이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는 매우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조차도 새로운 느낌의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금욕이 아니다.
자기학대의 일종인 금욕은 고통스럽지만 집착하지 않음은 그렇지 않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닦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적인 사건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띠고 다가온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따분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 커짐에 따라,
우리가 포기한 것은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상상한 것'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면 참혹한 재앙을 만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내 멍에를 메는 것은 쉽고 내짐은 가볍다."고 말했다.
이 말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수행보다는 감각에 집착하는 무분별한 삶이 훨씬 더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이 십자가라는 비극으로 끝났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이 말의 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 처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깨달은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그리스도 옆에서 함께 처형당한 강도처럼 무지와 고통의 굴레를 벗지 못한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쉬울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하리라.
우리 인생의 십자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S: 집착하지 않음과 무관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집착하지 않음'으로 번역된 '바이라가(vairagya)'는 문자적으로 '색깔이없음'이라는 뜻이다.
모든 욕망은 마음을 각기 자기의 색깔로 물들인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이는 것처럼, 마음이 색깔로 물드는 순간 생각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욕망이 옮겨가면서 계속 생각의 물결을 일으킨다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렇게 쉼이 없는 마음으로는 훈련을 지속하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하려면 마음이 다른 욕망을 향해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훈련과 집착하지 않음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훈련이든지 집착하지 않는 마음상태를 도외시 한다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1-16. 가장 높은 경지의 '집착하지 않음'은, 아트만[主人空]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만물이 主人空의 일시적인 나타남인줄 알아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게 될 때 이루어진다.
'집착하지 않음'이란 무관심이 아니다.
이 점은 명심해 두어야 한다.
요가 철학의 목표를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여기고 요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요가를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과 세상을 멀리하는 차가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사랑은 가장 고귀한 감정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이기심을 극복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사랑은 소유욕과 배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트만[主人空]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의 특성, 예를들어 외모의 아름다움이나 지성이나 힘이나 유머감각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과 '그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고귀한 사랑인지는 새삼 따져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아트만[主人空]이다.
나 자신 속에 있는 아트만[主人空]을 사랑하는 것은 곧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아트만
[主人空]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인 아트만[主人空]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사랑은 현상세계로 부터
현상세계의 내면에 존재하는실재를 향해 고양된다.
이런 사랑은 일상적인 마음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실재에 대한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이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제한된 인간적인 사랑이 그 깊이와 폭에 있어서 무한히 확장되면
그것이 곧 실재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 됐든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영원하고
빛나는 그 무엇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그 또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자질 등은 외적인 현상이다.
그런 외적인 현상이 실재를 보는 눈을 가리면, 실재는 속에 감춰지고 우리의 에고의식은
외적인 현상에 반응하게 되는데 그 결과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는 영원한 그 무엇을
그 또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느끼는 그 어렴풋한 빛은 확실한 영적 체험이다.
그 체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무한한 主人空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기를 북돋아 준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무한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처럼 동요하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고요하며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
그 사랑 안에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가 하나가 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바가바드기타>는 그런 경지에 이른 자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물은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마음 속으로 욕망이 끊임없이 흘러들지만 동요하지 않는 자는 평안을 얻는다.
.....
.
모든 욕망을 벗어 던지고 아무런 갈망도 없이 행하는 사람,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조차 버린 자는 평안에 이르나니.
1-17. 어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얻어지는 삼매三昧에는 집중하고 있는
대상의 이름과 형태와 질과 그런 것을 아는 앎이 따로 떨어져 분별되고,
대상의 내적인 본질을 통찰하는 관조觀照와 평안한 기쁨과 순수한
자아의식이 동반된다.
(이러한 삼매를 생각이 있는 삼매, 즉 有想三昧라고 한다.)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단타 철학이 말하고 있는 우주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단타는 가장 오래된 힌두경전인 베다의 가르침에 근거한 철학이다.)
먼저 근본적인 실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실재란 만물의 핵심이자 뿌리인 아트만[主人空]을 가리킨다.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이 실재를 브라 흐만이라고 한다.
서구인들에게는 이 말이 혼동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낯선 개념은 아니다. 기독교에서도 만물 속에 깃들어 계시는 하느님과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비슷한 구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과 만물을 초월해 있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다.
힌두교와 기독교 문헌들은 만물 속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이 곧 만물을 초월해 있는 하느님
이라는 역설을 거듭거듭 천명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의 원자속에 거하는 자가 동시에 만물을 초월해 있는 자이다.
내재자와 초월자는 별개의 두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실재이다.
하나의 神性[主人空]이 만물 속에 내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만물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동일한 하나의 실재를 내재자와 초월자로 구분하는 것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함일 뿐이다.
(만물 속에 내재하는) 아트만과 (만물을 초월해 있는) 브라흐만은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우주란 무엇이며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베단타는 우주란 마음과 물질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근본 질료質料인 '프라크리티'
Prakriti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열熱을 불의 힘 또는 불의 효과라고 한다면, 프라크리티는 브라흐만의 힘 또는 브라흐만의
효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열은 자신의 원인이 되는 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프라크리티 역시 브라흐만과 별개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이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불에서 열이 나오는 것처럼, 브라흐만으로부터 프라크리티가 생성되어 나온다.
이 점에 있어서 파탄잘리의 가르침은 베단타의 가르침과 다르다.
파탄잘리는 푸루샤(또는 아트만)와 프라크리티를 둘 다 실제적이고 영원한 서로 다른
두 존재로 본다.
그러나 개별적인 푸루샤가 프라크리티를 초월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 영적인 수행의
목표라는 점에서는 파탄잘리와 베단타의 가르침이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브라흐만이 프라크리티를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철학으로는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인간의 지성 자체가 프라크리티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으로는 프라크리티의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다.
(통을 굴리려면 통 밖으로 나와야지,통 속에서는 통을 굴릴 수 없는 까닭이다. 譯註)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자는 완전한 요가상태에서 브라흐만과 프라크리티의 관계를 체험 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용어나 개념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라크리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라크리티는 실재가 아니다.
그러나 실재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근본 실재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비뚤어지고 제한되고 왜곡된 것이 곧 프라크리티이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은 엄청난 우주의 신비를 왜곡하고 있으며,
반면에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 체험한 '그렇다'는 깨달음은 진실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초의식적인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가정과 상상을 통해서 그 세계를 그려볼 수 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대한 셀리의 유명한 싯구가 있다.
인생이란 여러가지 색유리로 뒤집어 씌운 둥근 천정처럼, 순수한 영원의 빛을
여러가지 색깔로 물들인다.
이 싯구는, 만약 브라흐만을 '순수한 영원의 빛'이라고 가정한다면 순수한 빛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색깔이 곧 프리크리티일 것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프라크리티는 마음과 물질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근본 질료이다.
그러면 우주의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이 어떻게 이런 프라크리티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한 과정을 그 시작부터 끝까지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냥 창조 과정이라고 하지 않고 '창조의 한 과정'이라고 한 것은, 힌두 철학 에서는
창조와 해체를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해체 되면서-또는 해체되는 것처럼 보일 때-
마음과 물질의 미분화 상태 인프라크리티로 돌아가 '씨앗상태'로 머문다.
그리고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 다시 재창조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면 재창조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라크리티는 사트바 구나sattwa guna, 라자스 구나rajas guna,타마스 구나tamas guna라고
하는 세가지 힘 또는 세가지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구나는 평형상태와 평형이 깨진 상태를 오락가락 한다.
그런데 평형 상태가 깨져 세 힘 상호간의 관계가 다양하게 변함에 따라 영원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 세 가지 구나가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프라크리티는 미분화 상태로 남아 있으며,
현상적인 우주는 잠재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우주의 재창조가 시작된다.
세 힘의 상호관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변한다.
어느 한 힘이 다른 두 힘 보다 우세하거나 또는 다른 한 힘이 나머지 힘 보다 우세해지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힘의 조합 결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은 엄청나게
다양한 물질 현상과 정신 현상이 생겨난다.
현상세계는 세 구나가 다시 평형상태를 찾아 미분화된 잠재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그 형태와 수를 늘려 나간다.
(현대 과학을 공부한 사람은 베단타의 이러한 우주론이 원자 물리학 이론과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사실 베단타의 우주론과 현대 물리학의 이론은 많은 점에서 유사한 게 사실이다.)
'구나'라는 말은 '에너지'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성질性質'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성격과 기능을 온전히 나타낼 적당한 말이 없다.
세 가지 구나는 서로 반대되면서 동시에 상호보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힘의 삼각형으로서, 각 구나는 삼각형의 각 꼭지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트바구 나는 원형原型이고 타마스 구나는 사트바 구나가 자신의 형태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힘이다.
그리고 라자스 구나는 방해하는 힘을 제거하고 형태의 본질인 원형原型을 형상화시키는 힘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진흙으로 말의 형상을 빚어내려는 조각가가 있다고 하자.
이때 그 조각가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말의 형상[한 생각]은 사트바 구나에 해당한다.
그가 사용할 진흙 덩어리는 타마스 구나이다.
진흙 덩어리는 아무런 특정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다.
이 '형태 없음'은 말의 형상이 구체화 될 때까지 말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타마스 구나의 요소는 조각가 자신의 마음 속에도 있다.
조각가는 혼자 생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 이 일은 어렵겠는데", "몹시 피곤하구나", "이 일을 꼭 해야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작업을 방해하는 타마스 구나이다.
그러나 작업을 계속해 말을 형상을 빚어 내도록 만드는 라자스 구나의 힘이 있다.
자신의 게으름과 작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조각가 자신의 의지가
곧 그것이다.
또 의도한 말의 형상을 빚어내기 위해 손발을 움직이는 것도 라자스 구나에 해당된다.
라자스의 힘이 타마스의 장애를 극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발휘되면 말의 형상은 성공적으로
현상화 된다.
즉 사트바 구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창조에는 세 가지 구나가 함께 작용한다.
사트바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 공허한 이상에 그칠 것이고, 사트바가 없는 라자스는
방향성 없는 에너지일 뿐이다.
또한 타마스가 없다면, 라자스는 디디고 올라설 발판이 없는 받침대 없는 지렛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세 가지 구나를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사트바 구나는 밝고 순수하고 고요한 성질[純質]이고
라자스 구나는 행동 또는 움직임[動質]이다.
그리고 타마스 구나는 어둡고 우둔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성질[暗質]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어느 한 구나는 강하고 나머지 두 구나는 약한 상태이긴 하지만,
모든 것 속에는 세 가지 구나가 함깨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양빛의 경우에는 사트바 구나가 우세하고, 폭발하는 화산의 경우에는 라자스
구나가 우세하며, 화강암 덩어리의 경우에는 타마스 구나가 우세하다.
사람의 마음도 세 가지 구나의 균형 여하에 따라, 사트바 구나가 우세할 경우에는 욕망에 끌리지
않고 명상상태의 평온한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라자스 구나가 우세해지면 분노와 격정에 휩싸이게 되어 마음이 평안히 쉬지 못한다.
하지만 라자스 구나가 우세해지지 않으면 창조적인 에너지가 분출되지 않으며 용기 있는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사트바 구나와 라자스 구나가 힘을 잃고 반대로 타마스 구나가 우세해지면 정신적인 늪에 빠진다.
게으름, 우둔함, 완고함, 절망감 등은 모두 타마스 구나가 우세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구나와 각 구나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 장을 할애하고 있다.
<기타>에 나오는 스승은 영적인 구도자에게 분별력의 훈련을 통해 구나의 영역을
초월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이미 생각의 흐름을 통제해야 한다는 구절을 다룰때 이 훈련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생각의 흐름이란 구나의 힘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여 초월한다는 것은
곧 구나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트바의 빛과 라자스의 활동 그리고 타마스의 망상이 생겨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사라져도 갈구하지 않는 사람은 세가지 구나를 초월한 자이다.
그는 초연하게 앉아서, 구나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으며 구나들이 그저 작용하고 있을 뿐이라
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흔들림 없이 간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트만
[主人空]의 내적 고요 속에서 평안한 쉼을 얻는다."(16:22-24)
지금까지는 구나들의 상호작용이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고, 이제는 창조 과정의 각 단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하자.
힌두 철학에 의하면, 미분화 상태의 프라크리티로부터 창조가 전개되어 나오는
진화의 첫 단계는 '마하트'(mahat, 大原因)이다.
마하트는 우주적인 자아 의식으로서, 프라크리티에서 의식이 분화分化되어 막 눈을 뜨는 단계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 초두에 언급된, 수면 위를 운행하는 '하느님의 영'에 비교할 수 있다.
진화는 마하트로부터 분별 능력인 '붓디'buddhi로, 그리고 붓디에서 개인적인 자아의식인
'아함카라'ahamkara로 전개된다.
아함카라부터는 서로 다른 세 방향으로 진화가 전개된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아함카라는 지배적인 힘이 사트바냐 라자스냐 타마스냐에 따라
세 방향으로 발전한다.
운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라자스는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발전을 하지 않고 사트바와 타마스를
돕는 역할만을 한다.
사트바의 힘이 지배적인 아함카라는 기억 능력[또는 생각하도록 만드는 능력]인
意根manas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능력인 五智根jnana-indriya,
그리고 말하고,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능력인
五作根karma-indriya을 산출한다.
여기서 根indriya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이 작용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뜻한다.
한편 타마스의 힘이 지배적인 아함카라로부터는 색, 소리, 향기, 맛, 감촉의 미묘한 본질인
五唯tanmatra가 생기고 五唯의 결합에 의해 흙, 물, 불, 바람, 공기라는 五大bhuta가 산출된다.
이리하여 비로소 눈에 보이는 외적인 우주가 탄생된다.
여기서도 五唯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고, 五大의 성질에 입각해서 역으로 추리해낸 일종의
성질 내지 힘을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말해 창조란 외부로 향한 진화이다.
즉 미분화 상태에서 분화된 의식으로, 그리고 마음에서 물질로 진화가 전개되는 것이 창조다.
달리 말하자면, 최초의 순수한 의식 위에 단계적으로 무지와 분별의 껍질이 씌워진다.
껍질은 위로 갈수록 점점 두꺼워지다가 마침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외적인
세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곧 요가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상키야 철학의 인식론 내지 창조론이다.
파탄잘리의 명상 테크닉을 이해하려면 앞서 설명한 상키야 철학의 진화와 발전에 대한 사상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파탄잘리가 말하는 명상이란 외적인 세상을 향한 진화의 과정을 거꾸로 돌려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명상이란 일종의 퇴화 과정이다.
삶의 표면에서 내면을 향해 들어가면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인을 찾으며,
하나의 원인이 발견되면 또 다시 그 원인의 원인을 찾는다.
이렇게 해서 궁극적인 실재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그 원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곧 명상이다.
이제 파탄잘리가 말하는 '어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一心觀을 통해] 도달하는
삼매상태', 즉 有想三昧의 네 가지 단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有想三昧는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無想三昧,
즉 [無心觀을 통해] 대상에 대한 생각마저도 미분화된 순수한 의식 속에 통합되는 보다 깊은
삼매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無想三昧에 이르기 위해서는 有想三昧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有想三昧의 경지가 깊어지면 대상에 대한 생각 마저도 사라지는
無想三昧의 언저리에 도달한다.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파탄잘리가 有想三昧의 네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산스크리트어를 적절하게 번역할만한 대응어가 없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의미의 전달에만 촛점을 맞추기로 하자.
첫번째 단계인 "집중하고 있는 대상의 이름과 형태와 질과 그에 대한 앎이 따로 떨어져 분별되는"
것은 마음이 어떤 외적인 사물에 완전히 집중될 때 도달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를 일컬어 심삼매尋三昧 또는 유심등지有尋等至라 한다.
이 책에서는 뜻을 살려 분별삼매分別三昧로 부르기로 하겠다.
譯註) 이 상태 다음에는 마음이 외적인 형태를 뚫고 들어가 사물의 내적 본질인 五唯를 통찰하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 상태를 일컬어 사삼매司三昧, 무심등지無尋等至 또는 유사등지有司等至라 한다.
이 책에서는 분별을 초월했다는 뜻을 살려 초-분별삼매超-分別三昧라 하겠다.
譯註) 다음 상태는 "평안한 기쁨"이다.
이 상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내적인 능력 혹은 마음 자체에 집중하여 관조할 때
찾아온다.
(이 상태를 일컬어 환희삼매歡喜三昧 또는 무사등지無司等至라 한다.
여기서도 뜻을 살려 관조삼매觀照三昧라 하겠다.
譯註) 有想三昧의 마지막 단계는 "순수한 자아의식"이다.
마음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깊어지면, 두려움이나 욕망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아[主人空]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이런 사람도 아니고 저런 사람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이 깨달음이 곧 순수한 자아의식[내가 곧 主人空이라는 의식]이다.
(여기에 도달해도 아직은 '나'라는 인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상태를 일컬어
아상삼매我想三昧라 한다.
이 책에서는 관조삼매를 넘어선 경지라는 뜻으로 초-관조삼매超-觀照三昧라 하겠다.)
이러한 집중 상태 즉 有想三昧에 이르기는 대단히 어렵다.
어쩌면 일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有想三昧는 아직 프라크리티 영역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그러기에 유혹과 위험이 남아있다.
어떤 사물의 내적인 본질을 파악하면 그것을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계속해 有想三昧에 도달한 구도자들에게는 물리적인 능력이 생긴다.
병을 고친다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거나, 아니면 미래를 보거나 자연의 힘을 조정하는
능력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능력을 갖게된 구도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거나 야망을 이루는데
그 힘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목적으로 신비한 힘을 구하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은 결단력이 부족해서 그리 많은 것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동기의 순수성이다.
코카인은 책임있는 의사가 사용하면 아주 좋은 진통제가 된다.
그러나 마약 중독자가 사용하면 정신과 육체를 함께 망가뜨리는 무서운 독이 된다.
분별력이 있고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버린 성자라면, 신비한 영적인 능력을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칼로 베어버린 자신의 적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시 붙여 주었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께 요청하면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가 와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기가 순수치 못한 사람들이 영적인 신비한 능력을 얻으면,
그들은 그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는 대 신 자신의 욕망을 충족 시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에 빠진다.
세계 여러 나라의 민담이나 전승 속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갈구하는 것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갈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마법사나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기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는다.
그는 그토록 원하던 신비한 힘을 얻게 되었지만, 자신의 영혼을 소유한 마귀나 마법사의
종이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인 구도자는 자신이 얻게 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해 해를 입지 않는다.
신비한 힘을 목적으로 삼고 수행한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은 깨달음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부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탄잘리의 태도는 지극히 과학적이다.
그는 약학자가 여러 종류의 약물 심지어는 독극물에 대해서까지도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처럼, 그렇게 담담한 태도로 명상과 명상의 결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신비한 힘에 집착하면 궁극적인 목적인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YOGA#1.TXT 파일에 이어지는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와 해설입니다.
모쪼록 수행에 도움이 되시길 ...
<요가수트라>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YOGA#1.TXT와 YOGA#2.TXT는 그 중 제 1장에 해당하는 Samadhi-Pada 부분입니다.
1-18. 意識 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불에 탄 씨앗처럼
잠재인상潛在印象만이 남아 있는 상태인 또 다른 삼매가 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주시하는 훈련을 거듭할 때
이러한 삼매상태에 도달한다. (이러한 삼매를 생각이 없는 삼매, 즉 無想三昧라고 한다.)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이 깊어져 有想三昧의 경지에 도달한 다음에는, 더 위대한
삼매 즉 의식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도달하는 無想三昧를 성취할 수가 있다.
無想三昧는 거의 완전한 요가상태이다.
無想三昧에 도달한 수행자는 객관적인 대상과 그에 대한 앎으로 이루어진 프라크리티
차원을 초월하여 미분화된 우주의식 인 아트만[主人空] 속으로 진입한다.
완전한 요가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이 멈추고,
마음 속에 쌓여있던 모든 삼스카라가 선악을 불문하고 깨끗히 청소되어야만 한다.
나는 아무개라는 생각이 완전히 제거되고,
내가 곧 아트만[主人空]임을 알 때 완전한 요가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가철학은 삼스카라가 우리를 거듭해서 태어나도록 만든다고 가르친다.
의식 속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약 중독자는 중독이라는 힘에 이끌려
계속 마약을 찾는 것 처럼, 意識下意識 속에 쌓여 있는 삼스카라의 힘이 인간을 거듭해서
태어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고통과 즐거움-우파니샤드의 표현을 빌면
'한 나무에 달려 있는 쓴열매와 단 열매'-으로 뒤범벅이 된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지겹고 피곤하다고. 하지만 삼스카라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를 거듭해서 감각세계로 끌어들이는 삼스카라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意識下意識 속에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잔존물인 삼스카라가 남아 있는 이상
일시적인 회개나 이 세상에 대한 혐오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요가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삼스카라를 뿌리채 뽑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완전한 요가의 성취를 '해탈'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전한 요가상태에 도달해 해탈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칠 때 아트만[主人空]과
영원한 결합을 이룬다.
완전한 요가상태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 즉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야 될 필요는 없다.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한 성자들일지라도 자연적인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영위해 나간다.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마치 불에 탄 씨와 같아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는다.
즉 그들도 말을하고 생각하고 행동도 하지만, 우리처럼 삼스카라를 쌓지는 않는다.
그들은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새로운 굴레를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산스트리트어로는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를 카르마karma라고 한다.
'업'業 또는 '업보'業報로 번역되는 카르마는 행위에 따른 결과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는 것도 카르마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이라는 것은 과거 또는 전생에 생각하고 행한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가를 통해 영원한 자유를 성취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면서도 더 이상 카르마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의 지상에서의 나머지 삶은 영원한 자유를 성취하기 전에 쌓아 놓았던 카르마가 해소되는
과정일 뿐이다.
그는 마치 연극의 최종회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산다.
그는 자기가 맡은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또 관중들이 환호하며 갈채를 보내든 야유를 하든
앞으로는 영원히 그 무대에 다시 설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통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막이 내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인연에 매이지 않으면서 오는 인연 저버리지 않는 삶이다. 譯註)
샹카라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자유를 성취한 자들의 행위는 기억 속의 행위와 같다.
그들은 마치 꿈 속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산다."
1-19.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 삼매, 즉 삼매
속에 무지가 남아 있으면 육체를 떠난 영들[또는 '신들']의 상태에 도달하거나
자연의 힘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잘못에 빠진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다.)
집착이 남아 있으면 영원한 자유를 성취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원하는 자유를 얻기에 합당한 수고를 한다면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기이한 능력과 현상적인 기쁨을 원한다면 그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사는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육신의 옷을 벗고 난 다음에도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육체의 감각기관에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신들과 같은 능력을 얻는다.
마음에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하면 자연의 힘에 동화되어 자연력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요가의 목적은 아니다.
힌두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을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힌두교인들의 사고방식 속에서는 천국이나 지옥도 역시 프라크리티 안에 존재한다.
그들의 믿음은 이렇다.
이 지구 이외에도 서로 다른 차원의 영혼이 사는 수많은 거주처가 있다.
그 중에 끔직하게 고통스러운 곳도 있고 천상적인 기쁨이 넘치는 곳도 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쌓은 카르마에 따라,
죽은 다음에 수많은 거주처 중 한 곳에 가서 살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카르마의 묶어두는 힘은 점점 약해지고,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카르마의 힘이 완전히 소멸되면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요가를 통해
아트만[主人空]과 결합하여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천국을 갈망하는 것은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저급한 야망이다.
힌두교의 문헌들은 천국에 대한 갈망과 영원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한결같이 구분하고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스승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훈계하면서
'천국만을 바라는 사람'은 현상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라
고 말하고 있다. "브라흐마"라는 제목의 에머슨의 다음 시도 이와 관련된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힘있는 신들은 나의 거처에 오르기를 갈망하며 헛되이 성스러운 능력을 갈구하네.
그러나 그대, 선을 사랑하는 온유한 자여,그대는 천국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나를 찾으라."
이 시에서 '힘 있는 신들'은 실제로는 전혀 힘이 있는 신들이 아니다.
그들은 능력을 갈망하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 즉 프라크리티의 영역에 묶여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착에서 떠나는 명상을 성공하지 못한 자들이다.
<카타-우파니샤드>에서 죽음의 신 야먀는 나키케타에게 자신의 운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는 이 땅의 보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死者들의 왕이 되고자 하는 나는 이 땅의 재물을 불에 살라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덧없이 흘러가는 현상세계의 재물을 바치는 이 제사도 덧없는 것이다.
나의 왕국[즉 死者들의 세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제사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야마는 때가되면 자기도 死者들의 왕국을 떠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길만이 아트만[主人空]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1-20. 진정한 구도자는 믿음을 가지고 힘을 다해 노력하며,
주의 깊은 명상과 통찰력을 통해 삼매상태에 이른다.
불가지론자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곡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종교적인 교리나 신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반대한다.
다른 소리는 듣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식의 믿음은 공격 받아 마땅하다.
그러한 믿음은 게으름, 완고함, 무지, 그리고 두려움의 산물이다.
그런 믿음은 스스로의 검증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들리기 쉬울 뿐만 아니라,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부서지기도 쉽다.
그러나 파탄잘리가 말하는 믿음은 이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다.
유연한 융통성을 가진 믿음, 즉 요지부동의 교리가 아니라 의심과 이성의 추리에
문을 열어 놓고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사진틀처럼 그 안에 들어갈 그림을 영원히 한정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살아 있는 나무처럼 계속 가지를 뻗으며 성장하는 것이 참 믿음이다.
수행의 첫 단계에서 요구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풍성한 영적인 생명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씨앗이 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중에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을 발견할지 모른다.
또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높은 경지의 지혜를 깨닫고 평온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한동안 그런 것들에 매료된다.
그런 것들은 우리들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수행의 초보 단계에서는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 '이것이다'라고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그것의 진실성을 시험하고 검증해 보아야만 한다.
그대가 만약 소화불량 증세로 시달리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는 소화불량 증세를 없앨 수 있는 식이요법에 관한 책을
읽거나, 자기 말만 따르면 소화불량 정도는 쉽게 고칠 수 있
다고 자신하는 의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책에 적힌대로 음식을 조절하든지 아니면 그 의사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심할 것이다.
그러나 책이나 의사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책이나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그렇게 하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입각한 잠정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 처방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대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위대한 스승들이 가르치고 있는 다양한 영적인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인 다음 실제 수행을 통해 검증해 나가야 한다.
경전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믿음에 더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힘을 들이지 않고는 어떠한 가르침도 따를 수 없고,
따를 수 없다면 진정한 가치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죄라는 것이 있다면, 게으름이 바로 죄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앞에서 구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밝힌 것처럼, 게으름을 피우게 만드는 타마스 구나는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낮은 단계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자.
정신의 힘은 육체의 힘과 마찬가지로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이다.
예술가들에게는 감수성이 둔해지고 영감이 끊긴듯한 답답한시기가 종종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어느날 갑자기 끓어오르는 열정이 자기 속에서 다시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렇다.
조금씩이라도 쉬지 않고 매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점차 힘이 붙고 수행의 성과가 있을 것이다.
체험을 통해 믿음이 강해지고 훈련을 통해 힘이 붙으면, 마음의 방향이 분명하게 정해진다.
쉽게 얘기해서 마음이 정리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힘을 다해 수행하면, 점차 마음이 정리되고
아트만[主人空]을 깨닫고자 하는 한가지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구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스스로 '아, 내가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구나'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깊은 깨달음 속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건강관리 > 요가따라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영 요가 (0) | 2014.04.13 |
---|---|
요가 자세 사진들 (0) | 2012.03.03 |
Rolling Bow Pose With 민서 (0) | 2009.02.05 |
Sitting Forward Band Pose (0) | 2009.02.05 |
Camel Pose (0) | 2009.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