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묘관리

분묘(墳墓)의 의의

오늘의 쉼터 2009. 6. 22. 16:02

< 분묘(墳墓)의 의의 >

 

 분묘(墳墓)

땅을 파고  시신(屍身)을 토광(土壙)에 안치(安置) 한 후   평장(平葬:흙을 덮고 묻음)을 한
다음   봉분(封墳:흙을 쌓아줌)함을 말한다.

분(墳)에는 토분(土墳)과  석분(石墳) 이 있으며,  묘(墓)는 시신을 안장(安葬)하여 모셔둔 곳을 말한다.


매장을 하는 이유

① 지하에 저승이 있다는 신앙에 따라,
② 사자(死者)를 겁내 관계를 끊기 위하여,
③ 움집[竪穴住居] 생활의 유풍에서,
④ 단순히 위생적인 면에서 등의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②의 이유가 가장 유력하다.

시체를 단단히 묶어서 굽혀묻기[屈葬]를 하거나,  펴묻기[伸展葬]를 할 때도
시체 위를 무거운 돌로 눌러 놓는 것은  사자의 복귀를 겁내는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도 한국에서는 시체를 염할 때 든든한 삼베로 12마디를 묶는 것이 상례이다.


시신 매장(埋葬) 방법

시대와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르나, 대체로
지석묘
(支石墓=고인돌 : 들을 기둥으로 에 넓적한 을 얹어서 선사 시대
무덤),
석관묘
(石棺墓=돌널무덤 : 판석이나 괴석 등으로 시체의 주위를 쌓고 관을 막아 묻음),
적석총
(積石塚=돌무지무덤 : 일정한 구역의 지면에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묘역을 만든 무덤),
토광묘
(土壙墓 : 선사(先史)시대 때 지하에 구덩이[土壙]를 파고 직접 유해(遺骸)를 안치하는 장법(葬法),
옹관묘
(甕棺墓=독널무덤 :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독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양식)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매장(埋葬), 치분(治墳)하는 방법도 발달하여  현재와 같이
땅을 파고 시신을 광장(壙葬)한  다음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묘소의 주위를 잡목이나 잡초 따위가 침범할 수 없도록 하여 잔디를 심고  석물(石物:비석ㆍ상석ㆍ망주 등)을 세워  세도가(勢道家)의 명문(名門)임을  은연중에 과시(誇示)하여 왔다.


우리 민족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이 있어 분묘(墳墓)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중국에서는 주(周) 나라 때부터 비롯된 것 같다.


매장법

토장(土葬 : 땅을 파고 묻음),
화장
(火葬 :
시체 태워 장사 ),
풍장(風葬 : 시체를 한데 내버려 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소멸되게 하는 원시적인 장사법),
수장
(水葬 :
시체 물속 장사하는 것),
조장
(鳥葬 :
시체 내다 , 들이 장사(葬事). [이나 배화 교도(拜火敎徒)에게 풍습.]   등이 있었다.


분묘(墳墓)의 형태

분묘의 형태는 봉분 또는 평분으로 하되, 봉분의 높이는 지면으로부터1미터, 평분의 높이는 50센티미터를 초과하여서는 아니된다.


평토(平土葬) : 봉분(封墳) 평평하게 매장, 또는 매장.  
(
준말)평장(平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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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지방 또는 계층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는데,  
산소를 정하여 묘(墓)를 씀에 있어  일반적으로 산을 뒤로 하고 남쪽을 향하여 산의 줄기는 좌(左)로 청룡(靑龍) 우(右)로는 백호(白虎)의 등(嶝)을 이루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약간 높은 곳에 봉분을 지어 성분(成墳)하고  이삼층의 단(壇)을 지어  무덤앞에 상석(床石)을 놓고  약간 옆으로  묘비(墓碑)를 세우며  양 옆으로 문관석(文官石)을 세우고 그 맨 앞줄에 망주(望柱)를 양쪽에 각각 세운다.  
이는 사대부가(士大夫家)의 통례이며, 일반서민들은 겨우 봉분(封墳)으로 그치고 말았으며 더러는 상석과 망주 정도에 불과했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법(火葬法)이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유교로 말미암아  절의 승려(僧侶)를 제외하고는  일반서민이 거의가 토장을 하여 치분(治墳)함이 발달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습관에 의하여 이장법이 크게 유행하여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폐가망신(廢家亡身)하는 폐단(弊端) 도 적지 않았다.



풍수설(風水說)

선대 조상의 묘소를  선산(先山) 또는 선영(先塋)이라하며,   기존 선영(旣存先塋)인 세장산(世葬山 : 대대로 묻힌 세장지)에  후손(後孫)의 시체(屍體 : 상여나 관 등)가  들어 갈 수 없다 하였으며,
시체를 매장하면  선산(先山)의 주(主) 되는 선조 이하의 모든 자손들에게  재앙(災殃)이 따른다 하여 반드시 일단은 다른 곳에 매장하였다가  탈육(脫肉 : 살이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음)이 된 후  시신의 습골(拾骨 : 뼈를 걷어 깨끗이 닦아냄)을 하여  선산으로 옮겨 묘를 쓰는데,  이를 이장(移葬) 또는 천장(遷葬)이라 하였다.


또한  기존 분묘에 수염(水炎)이라 하여  물이 묘에 스며들어 시신을 물에 잠기게 한다든가(물이 고여 들면 시신이 탈육이 안되며 길운이 흉하게 된다고 함),  반대로 화염(火炎)이라 하여 묘에 불이 들어(땅속이 메말라) 지세로 인하여  뼈가 삭아버리는 것 들을 막기 위하여  명당(明堂)을 찾아 이장하는 것을 면례(緬禮)라 하여  자손(子孫)으로서는 효행(孝行) 이전에 당연한 처사라 여겨왔다.


이외에   목염(木炎)  즉  나무의 뿌리가  묘속에 들어가  시신을 침범하여  뼈를 휘감는다든가, 충염(蟲炎)이라 하여  벌레 등 짐승이 묘속을 뚫고 들어가 시신을 괴롭히는 것 또는 천재(天災)라하여 폭우(暴雨), 폭풍(暴風)등으로 봉분 또는 묘의 주변이 크게 갈라진다든가 산사태 등으로 묘가 흙으로 덮여버리는 것 등으로 묘 자체가 안전하지 못할때는 당해(當該) 자손은  경제상 성세 유무에 따라 무리해가면서 즉시  구산(求山 : 길지의 안전한 묘소를 찾음)을 하여 분묘를 이장하여 왔다.

자손으로서  부조(父祖)의 묘를 명당(明堂) 또는 선산(先山) 등에  이장하지 못하면  자손의 도리를 못다한 불효로서  크게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가문의 명예를 걸고 명당을 찾아 거액을 들여 이장하고 치분하는 것을 자손의 도리와 의무로 생각하여 왔다.


때문에  문중(門中)에서는 선산(先山)으로 인하여  서로  쟁론(爭論), 송사(訟事)도 자주 일어났으며,  타문(他門 : 동족이면서 산소와는 관계없는 방계),  타성(他姓 : 성씨가 다른 사람 또는 다른 문중)과 송사하는 것은 예사로 여겨왔다.


산소의 묘자리가 좋다 하면  자기 조상의 시신을 거두어 남의 산소일지라도 남몰래 봉분도 없이 평장(平葬)으로 밤중에 모시는 것을 밀장(密葬)또는 투장(偸葬)이라 하며, 이러한 밀장 등으로 송사가 자주 일어나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역시 자기 선조를 좋은 명당자리에 모시고 싶은 자손으로서의 행위는 효행의 발로(發露)라 하겠으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즈음은 그토록 무리한 행동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이에 수반하여 선조를 대함이 후손으로서 너무 소홀해지는 경향도 없지 않다.   
좋은 명당을 찾아 자주 옮겨 모시다가 더러는 실묘(失墓 : 묘를 잃어 버림)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묘를 하면 행세(行勢)하던 집안도 남의 웃음거리를 면치 못하며 품위가 떨어져 고개를 들고 다니지를 못하였다.  물론 현재도 자손으로서  산소를 소홀히 하여 묘를 잃어 버렸데서야  어찌 떳떳한 자손이라 하겠는가?
그토록 자기의 재산은  물론 생명을 바치면서 까지  남의 좋은 산소에 묘를 쓰려했던 우리들의 선조의 행동이 과연 어리석은 행위였는지 한번쯤 재고해 볼 일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묘를 만들어 매장하는 장사법이었으나, 조선 말기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일본의 화장법이 전래되어 병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1981.3.16. 법률 799호)이 제정되었는데 묘의 크기는 분묘 1기당 20 m2 를 초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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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중도 적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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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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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부르사, 메메트 1세의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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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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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토광묘
 

 

  한국의 무덤

한국에서는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청동기시대 이후의 무덤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구덩무덤[土葬墓(토장묘)] 외에 널무덤[土壙墓(토광묘)] 등 토총 계통과 고인돌· 돌널무덤[石棺墓(석관묘)] 등 석총 계통까지 발견되었다.  

구덩무덤은 가장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무덤의 형태이다.
널무덤은 중국의 무덤양식이지만 청동기 중엽 이후 한반도에 들어와 지배층의 무덤에 많이 사용되었다.
고인돌 역시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전역과 연·근해의 섬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보편적 무덤형식으로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그 수효가 많다.  돌널무덤의 분포지역과 부장품도 고인돌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 시기의 무덤과 부장품들은  다른 지역과의 문화교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삼국시대의 무덤은 널무덤· 돌널무덤·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 등이 주로 쓰였는데,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돌무지무덤,  백제에서는 널무덤· 돌방무덤[石室墳(석실분)]이 주를 이루었다.  고대의 무덤 중 남아 있는 것들은 주로 지배계층의 것으로서, 그들의 권력을 상징하듯 규모가 크고 금관 등 금· 은· 옥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어 당시 생활모습과 건축기술의 일면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불교의 융성으로 화장이 성행하여 화장묘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화장묘의 형식인 부도(浮屠)나 탑에 안치한 뼈단지[骨壺(골호)]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화장과 함께 무덤의 축조도 병행되었는데, 초기에 축조된 왕릉은 대형분들과 같은 규모인 원형봉토분들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작아졌다.  형태상으로는 무덤 주변에 호석을 두르고 비를 세우는 등 중국의 천자능을 축소한 것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앞트기식돌방[橫口式石室(횡구식석실)]· 돌덧널무덤·회곽묘(灰槨墓) 등이 채용되었고, 간혹 화장묘도 보인다.  분구는 원형·직사각형의 토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무덤의 특징은 풍수사상이 철저히 지켜졌고, 부장품이 적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부장품은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장신구가 거의 없어지고 대신 청동거울[銅鏡(동경)]과 자기(瓷器)가 들어갔는데, 이는 불교의 생활화와 북방계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무덤은 돌덧널무덤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돌방도 거대한 돌덧널이나 돌널무덤의 형태로 변하였다.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 널무덤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다.
묘를 쓰는 데 있어 풍수사상이 더욱 보편화되었고 부장품으로는 백자 등의 자기가 애용되었다.  외형은 초기의 원형· 직사각형에서 중기 이후에는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하고  묘비가 일반화되었다.  개항 이후의 무덤은 조선시대의 유교적 매장법을 계승하여 원형널무덤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정책에 따라 마을의 공동묘지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화장이 권장되기도 하였다.  
8·15 이후에도 여전히 널무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묘를 쓰는 데 있어서도 공원묘지 등의 이용이 적극 권장되고 있다.
한국의 무덤은 원시가족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여기에 외래의 제도· 사상· 풍습 등이 융합되면서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으며,  한국인의 문화와 조상숭배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세계의 장법

1. 매장 埋葬 :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장례법
2. 수장 水葬 : 시체를 강이나 바다에 장사지내는 장례법.
3. 화장 火葬 :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불에 태워서 처리하는 장법(葬法).
4. 풍장 風葬 : 사체를 옷을 입힌 채 또는 관에 넣어 공기 중에 놓아 두는 장례법.
5. 동굴장洞窟葬 (cave burial): 시체를 동굴에 넣어 두는 장법(葬法).
6. 수장 樹葬 : 시체를 나무 꼭대기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올려 놓는 장례법.
7. 순장(殉葬) (역사적 형태) :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주된 시체와 함께 묻는 장례 습속.

1. 매장 埋葬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장례법. 토장(土葬)이라고도 한다.  매장 풍습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유럽에는 구석기시대에 매장이 있었다고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한국에서도 선사시대 이전부터 매장한 사실이 각처에 있는 고인돌로 미루어 확실하다.

매장을 하는 이유는
① 지하에 저승이 있다는 신앙에 따라,
② 사자(死者)를 겁내 관계를 끊기 위하여,
③ 움집[竪穴住居] 생활의 유풍에서,
④ 단순히 위생적인 면에서 등의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②의 이유가 가장 유력하다.

시체를 단단히 묶어서 굽혀묻기[屈葬]를 하거나, 펴묻기[伸展葬]를 할 때도 시체 위를 무거운 돌로 눌러 놓는 것은 사자의 복귀를 겁내는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도 한국에서는 시체를 염할 때 든든한 삼베로 12마디를 묶는 것이 상례이다.

초기의 매장은 시신을 그대로 묻었으나 후에는 돌널[石棺] 독널[甕棺]에 수장하였고, 연모의 발달과 함께 나무널[木棺]을 사용하였다.
매장의 방법 절차도 나라마다 다른데 한국과 같이 유교의 유풍이 남아 있는 나라에서는 절차가 번거롭다.

먼저 상주(喪主)가 지관(地官)을 데리고 산지에 가서 묘자리를 정한 다음 표목을 세우고 산신에게 재배하고 축문을 읽는다.  천광(穿壙:무덤을 팜)할 때는 광상(壙上)에 차일을 쳐서 비나 해를 가린 뒤에 나무로 '井'자 모양으로 짠 금정(金井)틀을 설치하고 깊이 파는데, 이 때 석회 모래 황토를 섞어서 광내 사방을 잘 다지고 구덩이 안의 상하좌우에는 장지(壯紙)로 가린다.

하관(下棺)할 때는 곡을 그치고 상주는 잘 살펴야 한다.  관이 정위치에 앉은 것을 확인한 다음 상하좌우를 쓸고 구의(柩衣)와 명정(銘旌)을 덮는데, 이 때 망인이 생전에 쓴 물품 서적 등을 넣는다.  이어 5판(板) 또는 7판으로 된 가로대를 내광(內壙) 위에 덮고 현훈(玄尤)을 드린 뒤 상주 이하가 재배하고 곡한다.  횡판 위는 석회 덩어리로 누르고 판 위에 회를 고루 펴서 단단히 다진 다음 토지신에게 제사지낸다.

지석(誌石)은 석함이나 목궤에 넣어 외광(外壙) 앞에 묻는다.  성분(成墳)이 끝나면 묘 앞에 묘표를 세우고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의 석물을 배설하며 망주석 2개를 묘 앞 좌우에 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매장 풍습은 한국 중국 이슬람권 나라에서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묘를 만들어 매장하는 장사법이었으나, 조선 말기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일본의 화장법이 전래되어 병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1981.3.16. 법률 799호)이 제정되었는데 묘의 크기는 분묘 1기당 20 m2 를 초과할 수 없다.


2.수장 水葬

시체를 강이나 바다에 장사지내는 장례법.
이러한 장례법은 미개사회에서 시체 처리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널리 행한 풍습이며, 천민이나 노예에게만 행한 곳도 있다.  마셜제도 같은 곳에서는 일반의 장례법으로 행하였다.

수장의 풍습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도 있었다.  티베트에서는 시체를 물속에 던지면 사악한 망령이 인간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못 낳은 여자나 나쁜 병으로 죽은 사람을 가죽 포대에 넣어 강물에 던지는 습속이 있었고,  수장을 명예로운 장례법으로 여겨 폴리네시아에서는 통나무배와 함께 먼 바닷 속에 가라앉히는 풍속도 있었다.

인도에서는 수장을 4대 장례법의 하나로 꼽으며, 지금도 화장(火葬)한 골회(骨灰)를 성스러운 갠지스강(江)에 뿌린다.  골회를 강물에 뿌리는 습속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 한국의 대표적 수장이라 할 수 있으며, 옛날부터 각 해안 마을이나 섬에서는 수장을 행한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문헌이 없다.

근대 문명사회에서는 항해 중에 사망자가 발생하면 선장의 직권으로 수장하는 예가 많이 있고,  한국에서도 선원법(船員法) 제15조에 이에 관한 규정을 명시하였다.


3. 화장 火葬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불에 태워서 처리하는 장법(葬法).
뼈를 추려 항아리나 상자에 넣어서 땅에 묻기도 하고, 가루로 만들어 강이나 산에 뿌리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있던 장법이며, 일반적으로 서유럽의 켈트족은 토장(土葬)을 하고, 튜튼사람은 화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BC 1000년경에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도 토장과 화장이 병행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그리스도교의 유체 정화와 부활의 사상에 따라 화장 풍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교회 묘지의 수용 증대와 묘지의 거주지역 접근 등이 동기가 되어 19세기 말경부터 화장하는 예가 생기기 시작하여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화장이 증가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불교의 진원지인 인도에서 예로부터 불교의 장법인 화장이 유행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대 중국에서는 화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는 서역(西域)에서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 화장이 생긴 것 같으며, 송대(宋代)에는 그 수가 많아진 것으로 보이나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점차 쇠퇴하였고 지금은 중국에서 화장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한국에도 삼국시대에 불교가 중국에서 전래된 뒤부터 다비(茶毘)라 하여 승려가 죽으면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으나 일반인들은 거의 토장의 풍습을 따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 '묘지 화장 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이 제정된 후부터는 일제의 강요, 묘지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화장을 따르는 예가 있었으나,  오랜 전통적 풍습과 관념을 일시에 변혁시킬 수는 없었고 대부분이 계속 토장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구 팽창에 따른 거주 지역의 확장, 농지와 임야 면적의 확보 등으로 묘지의 절대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며 따라서 화장을 하는 예가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늘고 있다


4. 풍장 風葬

사체(死體)를 매장하지 않고 옷을 입힌 채 또는 관에 넣어 공기 중에 놓아 두는 장례법.
폭장(曝葬) . 공장(空葬)이라고도 한다.  나뭇가지나 풀을 덮어 숲 속에 방치하거나, 관에 넣어 관을 풀이나 널빤지로 장집[葬屋]을 만들어 덮는 경우가 있다.

사체를 놓는 방식에 따라서 수장(樹葬). 대장(臺葬). 애장(崖葬). 동혈장(洞穴葬) 등으로 나뉜다.  풍장의 풍습은 북아시아의 고(古)아시아족, 고지(高地) 아시아의 여러 종족,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 멜라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섬 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다.

풍장의 경우 풍화하는 대로 두는 경우도 있으나 유체가 해체되기를 기다렸다가 뼈를 거두어 두는 예도 있다.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섬에서도 풍장을 하였다. 대개 물가의 숲 속 그늘, 동굴 속, 장대한 거북 등 모양의 무덤 속에 넣어 두는데,  사체가 썩으면 유골만 골라 잘 씻어서 항아리에 담아 안치소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낸다.
한국에서는 전북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풍장이 행해졌다.


5. 동굴장洞窟葬 (cave burial)

시체를 동굴에 넣어 두는 장법(葬法).
장법에는 건조장(乾燥葬)습장(濕葬)의 두 종류가 있다.
화장(火葬). 풍장(風葬). 동굴장은 전자에 속하고, 토장(土葬). 수장(水葬)은 후자에 속한다.

루손섬[島] 북부에 거주하고 있는 이푸가오족(族)은 사람사냥에 의하여 죽은 자의 시체는 적의 마을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산 속의 동굴에 매장한다.
일본 아마미오섬[奄美大島]에서는 부락과 동떨어진 산간이나 해안의 동굴에 시체를 매장한다.
이 외에 묘혈(墓穴)의 벽을 우묵하게 만들고 그 속에다 시체를 집어넣는 벽감장(壁龕葬)은 말레이반도의 세망족(族) 아메리카인디언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이것도 동굴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수장 樹葬

시체를 나무 꼭대기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올려 놓는 장례법.
수상장(樹上葬)이라고도 한다.  시체를 직접 나무에 묶어 놓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나무 위에 덕을 매고 그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것은 땅 위에 높게 덕대를 만들고 시체를 올려 놓는 덕대장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수장이나 덕대장의 풍속은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중국 한국 등에 특히 성행하였으며, 미국 아프리카, 인도의 안다만제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사망한 미혼의 자식이나 악역(惡疫)이 유행하여 갑자기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수장을 지냈다.

한국에서는 홍역(紅疫) 마마(천연두)로 죽은 시신을 덕 위에 올려 놓았는데,  이는 고열(高熱)로 갑자기 죽은 사람은 간혹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어 이렇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어린아이들의 시체는 묻지 않고 덕을 만들어 그 위에 올려 놓고 용마름을 덮어 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러한 장례법은 조선 전기 이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7. 순장(殉葬) (역사적 형태)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주된 시체와 함께 묻는 장례 습속.
순사(殉死)라고도 한다.  통치자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남편이 죽었을 때 신하나 아내가 뒤를 따르는 습속은 세계적으로 분포하는데, 중심을 이룬 것은 신분 계층이 있는 사회, 뚜렷하게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인 사회, 특히 초기 고대문명과 그 영향권에 있는 사회에서 성행하였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때 많은 청동기 등의 껴묻거리[副葬品]와 함께 많은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묘제(墓制)가 있었다.   그 예로서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부근의 무관촌(武官村) 북쪽에 있는 큰 묘에서 79구, 허우강[後崗]의 순장갱(殉葬坑)에서 54구의 유체가 발견되었다.  이들 왕후 묘에 순장된 사람들은 왕을 시중들거나, 호위하는 뜻으로 말 개 수레 무기 장신구 청동기 도자기 등과 함께 매장되었다.

또한 은나라에서는 사자(死者)의 부활관념과 관련하여 어린 아이들을 순장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사자의 영혼에 성장력이 강한 아이들의 영혼을 합일시켜 다시 재생시킨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순장 습속은 서주(西周)시대까지 성행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급격히 줄었다.

특히 순장 습속이 성행한 지역은 고대 오리엔트이다. 유프라테스 하류의 우르 유적에서는 왕릉 바깥쪽의 수혈(堅穴)에서 59구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6명은 완전 무장한 군인이고, 9명은 값진 장신구를 걸친 여자였다. 또한 이집트에는 제르왕의 묘 둘레에 275명의 후궁과 43명의 노비 등을 순장한 묘가 있고, 여기에서 1.6km 떨어진 곳에는 269명이 순장되어 있다.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은 주위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순장의 풍습도 이와 더불어 파급되었다. 그 예로, 《일리아스》를 보면 파트로클로스가 죽었을 때 4마리의 말과 2마리의 개를 화장(火葬)한 외에 아킬레우스는 12명의 트로이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말 또는 개와 함께 저승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시중들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왕이 죽었을 때에는 한 사람의 후궁, 잔을 받드는 사람, 요리사 마부 시신(侍臣) 음악 연주자 등과 함께 금잔 등 한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을 껴묻고 위를 흙으로 쌓아 거대한 둔덕을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이 밖에도 고대 갈리아인 아일랜드인, 볼가강(江) 연변의 불가리아인 및 슬라브인이 사는 지역에서 순장의 습속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서(西)아프리카 및 동남아프리카에서 순장이 성행하였다.  이곳에서도 대부분은 신하나 처첩들이 순장되었으나, 남편이 아내 뒤를 따라서 죽어 순장되기도 하였다.  서아프리카의 아샨티족(族)은 왕의 자매인 경우, 왕의 허락만 있으면 비록 신분은 비천하더라도 미남이기만 하면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비천한 신분의 미남 남편은 아내가 죽거나, 외동아들이 죽으면 같이 따라 죽어 순장되어야만 하였다. 또한 북아메리카의 나치토체스족도 왕족의 여인과 혼인한 남자는 아내가 죽으면 순장되었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었다. 이 습속은 원래 의례적으로 왕을 죽이는 습속과 왕이 죽은 뒤 왕비도 따라 죽음으로써 두 사람이 저승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줄거리의 신화와 복합체를 이루어, 동남아프리카의 로디지아에서 발원하여 서아시아 남인도 등 인도양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파급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셀레베스 등지에서는 추장이 죽으면 노예를 죽여서 순장하는 습속이 성행하였다. 보르네오의 카얀족은 죽은 사람의 가족 가운데 여자가 먼저 창으로 노예에게 상처를 입히면, 이어 남자 가족이 이를 찔러 죽였는데, 이들 노예는 저승에서 주인을 시중들도록 죽임을 당하여 순장되었다. 또한 보르네오와 셀레베스에서는 장례 때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오는 사람사냥을 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이것도 순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오세아니아의 피지섬에서는 지역 사회의 유력자가 죽으면, 처첩 친구 및 노예가 교살(絞殺)되어 순장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중앙아메리카 콜롬비아 페루 등의 고대 문명 지대에서 군인 노예 처첩 등의 순사 순장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기원 전후에 황족이 죽으면 평소 시중을 든 사람들을 그 능(陵) 주위에 생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646년에 스스로 순사하거나 다른 사람을 교살해서 순장하는 일을 법으로 금하였다.

이와 같이 순사 순장은 세계의 고대 문명지대와 그 영향권에 있는 지역에서 이루어진 습속이었다. 그러나 노예의 노동력, 처첩의 인격이 중시되면서 순사 순장의 습속은 점차 없어졌고 이에 갈음하는 여러 대용물이 발달하였다.  그 예로 북베트남의 종족 중에는 묘지 옆에 가옥(假屋)을 짓고, 이곳에 남자 또는 여자 인형을 만들어 놓아 이를 때리면서 죽은 사람의 시중을 잘 들라고 명령한다.   이 밖에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 폴리네시아 등 지역에는 상(喪)을 입는 사람 스스로가 몸에 상처를 입히고 머리를 삭발하는 풍습 등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들 풍습 가운데는  순사 순장을 대신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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