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檀君 관련 記史.◑
1.《帝王年代歷》崔致遠編著 檀君紀 檀君
갑자년 10월 3일 탄강하셨으며, 무진년 10월 3일 제위에 오르시고, 경자년 3월 15일 승하하셨다.
檀君 關聯 記史
戊辰,[1] 國人推戴神人爲君, 定國號曰檀,[2] 頒敎令,[3] 設壇祭天.[4]
[2] 上古有桓因時代, 桓雄時代,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3] 渤海.天統, 注贊《三一神誥》, 卽此也.
[4] 江華.摩尼山.
[2] 상고적에 환인시대와 환웅시대가 있었으니
[3] 발해 천통 때《삼일신고》를 풀이하여 반포하였는데, 곧 이것을 말한다.
[4] 강화도 마니산이다.
경인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고쳐 '조선'이라 하였다.
[1]《東史寶鑑》曰: 「地在東表, 日光鮮明, 故曰朝鮮.」
[1]《동사보감》에 「땅이 동쪽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햇빛이 선명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컫는다」라 하였다.
갑술년에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중국의 뭇 나라들과〉모이게 하였다.
[1] 時, 夏禹治水, 告功會塗山, 而執玉帛者萬區.
[1] 이 때는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린 뒤 그 공을 알리기 위해 도산에 뭇 제후들을 모았는데,
甲辰, 移都于唐莊京.[1] 命肅愼氏, 任征伐.[2] 鳳凰止于庭.[3]
갑진년에 도음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1]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침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2] 其地在不咸山, 今白頭山也. 東出石노, 有皮骨甲·檀弓·고矢. 檀弓三尺五寸, 고矢有咫.
[3] 象如鶴, 五色而文, 其名曰鳳凰. 見則天下寧世, 稱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 正謂是也.
[2] 그들의 땅이 불함산에 있으니 불함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한다.
[3] 모습은 학과 같으며 다섯 빛깔에 무늬가 있으니 이름하여 봉황이라 한다.
경자년 3월 15일에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1] 入阿斯達山, 化神御天. 時, 大國九, 小國十二, 皆檀氏也. 太白·平壤, 俱在遼.滿之間,
阿斯達山卽 文化縣. 九月山, 一名白岳. 國人立廟饗之, 稱以三聖祠. 桓因·桓雄·桓儉,
是謂三神, 而桓儉卽檀君也.
역년은 1048년이고. 자리를 이은 임금이 모두 마흔 일곱 분이다.
2.《三國遺事》一然編著 古朝鮮 王儉朝鮮
《위서》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1]《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2] 謂帝釋也.
[3] 卽太伯, 今妙香山.
[4] 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5] 今西京.
[1]《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2] 제석을 말한다.
[3] 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4] 당요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며 그 50년은 정사년으로 경인년이 아니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5] 지금의 서경이다.
3.《東國通鑑·外紀》徐居正.崔薄 等 共撰 檀君朝鮮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臣等按]《古紀》云: 「檀君與堯병立於戊辰, 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4.《世宗實錄地理志》〈鄭麟趾 編撰〉
平安道 平壤條
5.《應制詩註》〈權擥 註〉
命題十首 중에서.
[증주] 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어 '웅'이라 불렀는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인간을 교화 하고자는 뜻이 있었기에, 하늘의 세가지 부절을 받은 뒤에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였으니, 이는 단웅천왕을 말하는 것이다. '환'을 혹은 '단'이라고도 하며, 산은 곧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의 묘향산을 말한다. 풍백과 우사 및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및 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였으니, 무릇 사람 사이의 3백6십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이 세상에서 이치로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으니, 함께 굴에 기거하며 항시 단웅에게 기원하기를, 사람으로 변신하기를 원하였다. 단웅께서 신령스러운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남겨 놓으며 이르기를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능히 지키지 못하였으나, 곰은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켜 여자의 몸을 얻었다. 그러나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소원하며 임신하기를 빌었다. 단웅께서 이에 잠시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며, 아들을 낳자 '부루'라 이름하였으니, 이가 곧 동부여왕이 되었다. 우임금이 도산에 천하의 제후를 모이게 하자 단군께서 아들 부루를 보내어 알현하게 하였다. 단군께서는 우순씨(虞舜氏)와 하우씨(夏禹氏)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화하였으니,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그 묘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향년 1천48년이다. 그로부터 164년 후인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책봉을 받았다.
平壤府
7.《東國史略》〈朴祥 編撰〉
檀君朝鮮
[1] 只有九種夷.
[2] 在今寧邊府, 卽妙香山.
[3] 唐堯二十五年戊辰.
[4] 在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 索隱曰, 以有山水, 故名.
[5] 今九月山.
[6] 名王儉.《古紀》云 「檀君與堯병立, 至商.武丁八年, 爲神, 壽千四十八.」 然, 權近.應製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盖傳世歷年數, 非檀君壽也.
[1] 단지 아홉 부류의 '이'족이 있었다.
[2] 지금의 영변부에 있으니 즉 묘향산이다.
[3] 당요 25년 무진년이다.
[4] 동쪽의 언저리 해가 돋는 땅에 있는 까닭에 '조선'이라 하였다. 색은이 말하기를,〈그 땅에〉산수(汕水)가 있는 까닭에〈'조선'이라〉이름한 것이라 하였다.
[5] 지금의 구월산이다.
[6] 이름이 왕검이다.《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같은 시기에 즉위하여 상나라 무정 8년에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세이다」 하였다. 그러나 권근의 응제시에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지 단군의 향년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8.《東國史略》〈柳希齡 編註〉
前朝鮮
[1] 在平安道.寧邊府, 今妙香山. [2] 帝堯二十五載.
[3] 今平壤府. [4] 在文化縣.
[5] 夏禹元年. [6] 今俱在江華府.
[7] 在江東縣. [8] 在文化縣.
[1] 평안도 영변부에 있으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요 임금 25년이다.
[3] 지금의 평양부이다. [4] 문화현이 있다.
[5] 하우 원년이다. [6] 모두 강화부에 있다.
[7] 강동현에 있다. [8] 문화현에 있다.
9.《東史纂要》〈吳澐 編撰〉
檀君朝鮮
설명
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
壤, 後徙白岳, 是爲檀君.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爲神.[1]
동방에는 아홉 부류의 '이'가 있었는데, 애초에는 군장이 없었다.
[1] 古紀,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前輩謂, 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壽, 此說有理. 太白山卽妙香山. 阿斯達山, 文化縣.九月山, 白岳卽此山也.
[1] 예전의 기록에 1천48년의 세수를 누렸다 하였는데, 이 얘기는 자못 의심스럽다.
선배의 말에 1천48년이라는 것은 단씨가 그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이지 단군의
세수는 아니라 하였는데, 이 얘기가 이치에 합당하다. 태백산은 곧 묘향산이다.
아사달산은 문화현의 구월산이니, 백악은 곧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10.《東國文獻備考》〈洪鳳漢 編撰〉
帝系考二 歷代紀年
「동방에는 애초에 군장이 없었으며, 단지 아홉 부류의 '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당요 25년 무진년에 자리에 올라 임금이 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여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후에 백악으로 옮겨갔다.
상나라 무정 을미년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재위 1천48년이다.
[1] 卽妙香山.
[2] 詳見<氏族>.
[3] 世號唐藏京, 在文化.
[4] 卽九月山, 在文化
[5] 或云, 商.武丁甲子, 徙于濊地, 子孫相傳, 凡千有七十年. 或云, 享國一千二百一年, 壽一千九百八歲. 洪武丙子, 吉昌君.權近, 奉使朝明, 明.高皇帝命題檀君詩, 近應製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世.」 以爲實記云.
[1] 즉, 묘향산이다.
[2] (이 내용이) <씨족>에 상세히 보인다.
[3] 세간에서는 당장경이라 하니, 문화현에 있다.
[4] 즉, 구월산으로서 문화현에 있다.
[5] 혹은, 상나라 무정의 갑자년에 예의 땅으로 옮겨가서 자손이 대대로 전하기를 무릇 1천70년 동안 하였다고 한다. 혹은, 나라를 거느린지 1천21년이며, 세수를 누린 것이 1천98년이라 한다. 홍무 병자년에 길창군 권근이 사신의 신분을 받들고 명나라의 조정에 들어가니, 명나라 고황제가 '단군'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기에, 권근이 그 제목에 응하여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1천년은 족히 넘었도다」 하였는데, 현실적인 기록이라 여길만 하다고 한다.
11.《海東繹史》〈韓致奫 編撰〉
檀君朝鮮[1]
[1] 按《史記》索隱曰: 「朝音潮, 鮮音汕. 朝鮮有汕水, 故名.」《伏生書·大傳》云: 「箕子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封之.」 然則, 箕子之前, 知有朝鮮之稱, 而檀君時, 朝鮮稱否, 未可的也. 然而《麗史》以檀君爲前朝鮮, 箕子爲後朝鮮, 故今從焉.
[1]《사기》에서 색은이 말하기를 「朝의 음은 '조'이며 鮮의 음은 '선'이다.
조선에 선수가 있기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생상서》의 <대전>에 이르기를 「기자가 조선 땅으로 달아나자 무왕이 이를 듣고는 그 땅을 기자에게 봉하였다」 하였으니,
기자 이전에 '조선'이라는 명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단군의 시기에 '조선'이라고 불렀는지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고려사》에 단군 시기를 '전조선'이라 하고 기자 시기를 '후조선'이라 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따른다.
12.《東史輯略》〈金澤榮編, 魚允迪校〉
檀君朝鮮紀
상고 시절 동방의 백성들은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여름에는 나무 위의 집에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 살며, 무리를 지어 거처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도맡아 다스리는 일이 없었다.
[1] 今妙香山.
[2] 卽中國唐堯二十五年.
[3] 古語, 東方之地, 先受朝日光鮮, 故謂之朝鮮.
[4] 今九月山, 一名阿斯達山.
[5] 商.武丁八年, 甲子.
[6] 或曰北夫餘.
[1]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즉, 중국 당요 25년이다.
[3] 옛 말에 동방의 땅은 제일 먼저 해를 바라보며 그 빛이 선명하다 하였으니,
그러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컬은 것이다.
[4] 지금의 구월산으로, 일명 아사달산이다.
[5] 상나라 무정 8년 갑자년이다.
[6] 혹은 북부여라 하였다.
13.《神檀實記》〈金敎獻 著〉
檀君世紀
[1] 一云, 檀因·檀雄·檀君.
[2] 今白頭山.
[3] 降于檀木下, 故曰檀君.
[4] 稱號倍達.
[5] 交際之始.
[6] 壇在江華.摩尼山.
[7] 城在江華.傳燈山. 遣三子築城, 故曰三郞.
[8] 京在文化. 今莊莊坪是.
[9] 今文化.九月山.
[1] 또는 단인과 단웅 및 단군이라고도 한다.
[2] 지금의 백두산이다.
[3] 단목 아래로 내려온 까닭에 '단군'이라 한다.
[4] 배달이라 일컫는다.
[5] 교제의 시초이다.
[6] 제천단은 강화 마니산에 있다.
[7] 삼랑성은 강화 전등산에 있다.
셋째 아들을 보내 성을 쌓게 한 까닭에 '삼랑'이라 한다.
[8] 당장경은 문화현에 있다. 지금의 장장평이 그것이다.
[9]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14.《朝鮮歷史》〈李昌煥 著〉
第二章 古朝鮮
第一節 檀 君 의 化 降
桓族은 家族的觀念으로 造物主卽共同先祖를崇拜하는 宗敎政治인 神市의制度만으로는 生存競爭이
漸次로일어나는時局에 立脚함에 缺陷이많음을깨닷고 一層鞏固한 共同團結이必要함으로 統治者를
渴求하다가 開天一百二十五年戊辰十月三日에國人이 神人을主上으로모시고 太白山아래에 國都를
定하고國號를檀(배달)이라 神人를壬儉이라불넛다 곧배달나라임검이라는말이니 그뜻을쫓아서
漢字로檀君이라 譯述한것이다
그卽位하신戊辰歲는 우리나라가 처음생긴紀元元年이다
15.《後漢書》〈宋·范曄 撰〉
東夷列傳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법도로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 또는 '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夷'에는 아홉 종류이 있으니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1] 事見《風俗通》.
[2]《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병在東方也.
[3]《竹書紀年》曰「后芬發卽位三年, 九夷來御」也.
[4]《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 命견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1]《풍속통》에 이 일이 보인다.
[2]《산해경》에 이르기를 「군자국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 먹고 두 마리의 무늬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 하였다.《외국도》에 이르기를 「낭야와는 삼만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산해경》에 또 이르기를 「죽지않는 사람(不死人)은 교경국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리고 죽지않는다」 하였으니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분발의 즉위 삼년에 구이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라 하였다.
[4]《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 즉위 2년에 황이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으며 뒤에 소강이 즉위하자 방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라 하였다.
[1] 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우夷. 暘谷, 日之所出也」.
[2] 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예所逐也.
[3] 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竹書紀年》曰:「后發卽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4] 仲丁, 殷.大戊之子也.《竹書紀年》曰「仲丁卽位, 征于藍夷」也.
[5] 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1] 공안국이《상서》의 주석에서 말하길 「동방의 땅을 우이라 한다. 양곡은 해가 솟아 오르는 곳이다」라 하였다.
[2] 태강은 계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에 의해 쫓겨났다.
[3] 소강은 천자 중강의 손자이며 천자 상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발 즉위 원년에 뭇 이 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또한 뭇 이 들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4] 중정은 은 나라 대무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중정이 즉위하여 람이를 정벌하였다」라 하였다.
[5] 무을은 천자 경정의 아들인데 무도하여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높은 곳에 걸어두고 활로 쏘며 일러 「하늘을 쏜다」고 하였다.
[1]《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2]《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詳,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3]《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4]《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盜驪·화류·록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5] 造父, 解見蔡邕傳.
[6] 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비縣北. 徐山在其東.《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楚所敗, 北走此山」也.
[7]《毛詩序》曰:「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 其詩曰:「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벽四方, 徹我土疆.」
[8]《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1]《상서》에, 무왕이 죽자 세 재상과 회이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는 대고를 지었다. 또 말하길, 성왕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는 회이를 멸망시켰다.
[2]《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 곡창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로 돌아옴에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나면서부터 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록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기를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라 하였다.
[3]《수경주》에 이르기를 「황수는 일명 왕수라고도 하며 포수와 합해진 후 패수에 이르러 사수로 흘러들어간다. 산양의 동쪽으로 부터 해릉 북쪽의 땅에 흐른다 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라 하였다.
[4]《사기》에 이르기를 「조보는 말을 잘 부리는 것으로 주 무왕으로부터 총애를 입었는데 <무왕은> 적기·도려·화류·녹이 등 네필의 말이 끄는 사마의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수렵을 즐기며 돌아갈 일을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5] 조보에 관해서는 채옹전에 상세히 보인다.
[6] 무원은 현인데 그 옛 성이 지금의 사주 하비현의 북쪽에 있다. 서산은 그 동쪽에 있다.《박물지》에 이르기를 「서왕의 괴이함은 범상하지가 않다. 무원현 동쪽 십여 리에 있는 서산의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이 진과 채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하고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로 자신이 하늘의 상서러움을 얻었다고 여기고 스스로 '偃王'이라 일컬었다. 목왕이 이를 듣고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사마의 수레를 내어주어 하루만에 초에 이르게하여 초로 하여금 그를 정벌하게끔 하였다. 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초에게 패하여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7]《모시서》에 이르기를 「《시경》의 '江漢'이라는 시는 주의 공경대부인 윤길포가 선왕을 칭송한 것이다. 선왕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켜 혼란을 다스리고 소공에게 명하여 회이를 평정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모시에 이르기를 「강수와 한수가 넘실거리니 병사들의 발걸음 씩씩하네. 즐기는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 회이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에게 명하시어 온 세상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 하였다.
[8]《좌전》에 초 영왕·채후·진후·정백·허남·회이 등이 신(申)에서 회동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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