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 檀君 관련 記史.

오늘의 쉼터 2009. 6. 22. 11:51

 

 

 ◐ 檀君 관련 記史.◑ 

 

 1.《帝王年代歷》崔致遠編著 檀君紀 檀君

 甲子十月三日誕降, 戊辰十月三日卽位, 庚子三月十五日昇遐. 在位九十三年, 壽二百七十年.
 갑자년 10월 3일 탄강하셨으며, 무진년 10월 3일 제위에 오르시고, 경자년 3월 15일 승하하셨다.
 제위에 있으신지 93년이요 향년이 270년이다. 

     檀君 關聯 記史  
  戊辰,[1] 國人推戴神人爲君, 定國號曰,[2] 頒敎令,[3] 設壇祭天.[4]
  무진년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정하고
  교령을 반포하였으며,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를 올렸다.
  [1] 唐堯二十五年.
  [2] 上古有桓因時代, 桓雄時代,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 設神敎化, 民歸者如市. 戊辰十月, 團衆推戴爲壬儉,
        國號曰. 是爲檀君始敎, 以男女·父子·君臣之道, 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命彭吳治國內山川, 開通險夷, 以奠民居. 娶河伯之女爲后, 生四子: 曰扶婁, 曰扶虞,
        曰扶蘇, 曰扶餘. 民有疾病, 命扶虞以醫藥治之; 山多猛獸, 命扶蘇以火獵攘之; 契兪作亂,
        命扶餘討平之; 命神誌掌書契, 命高矢治田事, 以余守己君長, 以緋天生爲南海長, 分掌諸郡.
  [3] 渤海.天統, 注贊《三一神誥》, 卽此也.
  [4] 江華.摩尼山.
  [1] 당요 즉위 25년에 해당한다.
  [2] 상고적에 환인시대와 환웅시대가 있었으니
         〈환인시대에는 그 우두머리를〉신시씨라 일컬었다.
         상원 갑자에 신인이 있어 하늘의 부절인 세가지 인장을 지니고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와 신인으로서 교화를 펴니, 백성들 가운데
         붙좇는 자가 많음에 마치 저자거리와도 같았다.
         무진년 10월에 무리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다.
         이로서 단국 임금(檀君)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펼치게 되었으니,
         남녀와 부자와 군신의 도리 및 의복과 음식 궁실 및 머리결을 땋고 머리를 덮는 제도 등을
         가르쳤으며, 팽오에게 명하여 나라 안의 산과 하천을 다스리게하여 막힌 곳을 뚫고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함으로서 백성들의 거처를 온전히 바루게하였다.
         하백의 여식을 취하여 후비로 삼으니 네 아드님을 낳음에 '부루'라 하고, '부우'라 하고,
         '부소'라 하고, '부여'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질병이 있음에 부우에게 명하여 의약으로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산에 맹수들이 많음에 부소에게 명하여 불로서 그들을 잡거나 내어쫓게하였으며,
         계유가 난을 일으키자 부여에게 명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신지씨에게 명하여 글 쓰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 명하여 밭일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여수기를 '예'의 군장으로 삼고, 비천생을 남해상장으로 삼아 뭇 군을 나누어 맡아보게 하였다.
     [3] 발해 천통 때《삼일신고》를 풀이하여 반포하였는데, 곧 이것을 말한다.
     [4] 강화도 마니산이다.
 
       庚寅, 移都平壤, 改國號曰朝鮮.[1]
       경인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고쳐 '조선'이라 하였다.

      [1]《東史寶鑑》曰: 「地在東表, 日光鮮明, 故曰朝鮮.」
      [1]《동사보감》에 「땅이 동쪽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햇빛이 선명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컫는다」라 하였다.


      甲戌, 遣子扶婁, 會于塗山.[1]
      갑술년에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중국의 뭇 나라들과〉모이게 하였다.
     [1] 時, 夏禹治水, 告功會塗山, 而執玉帛者萬區.
     [1] 이 때는 하우씨가 홍수를 다스린 뒤 그 공을 알리기 위해 도산에 뭇 제후들을 모았는데,
           여러나라에서 옥이며 비단 등의 패물을 지니고 모였다.

     甲辰, 移都于唐莊京.[1]肅愼氏, 任征伐.[2] 鳳凰止于庭.[3]
     갑진년에 도음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봉황이 뜰에 머물렀다.
     [1]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침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2] 其地在不咸山, 今白頭山也. 東出石노, 有皮骨甲·檀弓·고矢. 檀弓三尺五寸, 고矢有咫.
           指東人曰者, 夷是大弓, 以肅愼出大弓而名也. 昔仲尼, 有준集于陳侯之庭,
           而死고矢石노貫之, 其長尺有咫. 陳侯使人問仲尼, 曰준之來遠矣, 此肅愼氏之矢也.
     [3] 象如鶴, 五色而文, 其名曰鳳凰. 見則天下寧世, 稱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 正謂是也.

     [1] 지금의 문화현 장장평을 말한다.
           이 때 홍수가 범람하여 평양이 침몰 되었기에, 왕자를 시켜 아사달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한 것이다.
      [2] 그들의 땅이 불함산에 있으니 불함산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한다.
            그 동쪽의 땅에는 돌화살촉이 나며,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단궁 그리고 호목화살이 있다.
            단궁은 3척5촌이며, 호목화살은 그 길이가 8촌이다.
            동방의 사람을 가리킬 때 '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큰 활'을 말하는 것이니,
            숙신의 땅에서 큰 활이 생산되는 까닭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예전에 중니가 진나라에 있을 때 송골매가 진후의 뜰에 모였는데,
            그 가운데 얼마지않아 죽은 송골매가 있음에 살펴보니
            돌화살촉의 호목화살에 관통되어 있었는데 그 길이가 8촌 정도였다.
            진후가 사람을 시켜 중니에게 물어보게하니,
            송골매는 멀리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은 숙신씨의 화살이라고 말하였다.
      [3] 모습은 학과 같으며 다섯 빛깔에 무늬가 있으니 이름하여 봉황이라 한다.
            봉황이 모습을 드러내면 천하가 태평스러워진다 하였는데
            '봉황은 동방의 군자국에서 나온다'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庚子三月十五日, 君昇遐.[1]
      경자년 3월 15일에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1] 入
阿斯達山, 化神御天. 時, 大國九, 小國十二, 皆檀氏也. 太白·平壤, 俱在.滿之間,

            阿斯達山文化縣. 九月山, 一名白岳. 國人立廟饗之, 稱以三聖祠. 桓因·桓雄·桓儉,

            是謂三神, 而桓儉卽檀君也.

      [1]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화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에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가 열둘이었으니 모두 단국의 임금에 속한 나라들이다.
           '태백'과 '평양'은 모두 요양과 만주의 사이에 있으며, 아사달산은 바로 문화현의 구월산으로
           '백악'이라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그곳에다 묘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며 '삼성사'라 일컬었다.
            환인과 환웅 그리고 환검을 일컬어 '삼신'이라 하니,
            환검이라 함은 곧 단국의 임금(단군)을 말한다.

     歷年一千四十八年. 系爲四十七世.
     역년은 1048년이고. 자리를 이은 임금이 모두 마흔 일곱 분이다.

 

      2.《三國遺事》一然編著 古朝鮮 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  壇君王儉, 立都阿斯達,[1] 開國號朝鮮, 與同時.」
《古記》云: 「昔有桓因,[2] 庶子桓雄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3]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4]平壤城,[5]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武王卽位己卯,
 封箕子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예전에 환인의 지차 아들인 환웅이 있었으니,
            자주 하늘 아래 세계에 뜻을 두고 인간의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의 땅을 굽어보니
            인간에게 널리 이익을 줄만하기에, 하늘의 부절인 인장 세개를 주어서
            내려보내어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 분이 곧 환웅천왕이다.
            풍백과 우사 그리고 운사에게 곡식과 생명 그리고 질병과 형벌 및 선악을 맡게하고
            무릇 인간 세계의 360여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머물며 올바른 이치로서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이 때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있어 같은 굴속에 거처하며 항상 신인인 환웅에게
            기도하며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였다.
            이 때 신인께서 영험한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개를 주며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 동안 모든 일에 조심하였다.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능히 모든 일에 조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기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어린애 가지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이에 잠시 변화하여 그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니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 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의 땅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1]《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2] 謂帝釋也.

    [3] 卽太伯, 今妙香山.

    [4] 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5] 今西京.

 

    [1]《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2] 제석을 말한다.

    [3] 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4] 당요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며 그 50년은 정사년으로 경인년이 아니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5] 지금의 서경이다.

   3.《東國通鑑·外紀》徐居正.崔薄 等 共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 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그가 바로 단군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바로 당요의 무진년 때 일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 임금 8년인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臣等按]《古紀》云: 「檀君병立於戊辰, 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今按, 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병立者非也. 自唐虞至于., 世漸요리, 人君享國久長者, 不過五六十年,
       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 以享一國乎. 知其說之誣也. 前輩以謂, 其曰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 此說有理. 近世權近, 入覲天庭, 太祖.高皇帝, 命賦詩,
       以檀君爲題, 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帝覽而可之, 時論亦以之言爲是, 姑存之以備後考.

[신 등이 생각키로]《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무진년에 재위에 올랐으며,
우 그리고 하의 시대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년이다」라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의심이 된다.
지금 생각건대, 요임금이 재위에 오른 것은 상원갑자 갑진년 때이며 단군이 재위에 오른 것은
그 25년 뒤인 무진년이니 '요임금과 더불어 재위에 올랐다'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당우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점차 각박해져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재위에 오래도록 있다하더라도 오륙십년을 넘기지 못하였는데,
 어찌 유독 단군만이 1천48년의 수를 누리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겠는가.
앞선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1천48년이라 말하는 것은 단씨가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일 뿐이지 단군의 향년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이치에 맞다.
근래 권근이 황궁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였는데, 태조 고황제가 권근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함에
'단군'을 시의 제목으로 하게 하였더니 권근이 시에서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도다」라 하니
천자가 그것을 살펴보고는 그럴 것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의 논평 또한 권근의 말을 옳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서 후에 고찰하여 볼 수 있도록 한다.

4.《世宗實錄地理志》〈鄭麟趾 編撰〉

平安道 平壤條

 

(前略)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 婚而生男, 名檀君, 立國, 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北沃沮, .北扶餘, , 皆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謂東扶餘王. 檀君唐堯同日而立, 至塗山, 遣太子夫婁, 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後略)
 
단군에 관한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이름이 '웅'인 서자가 있었는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을 교화할 뜻을 가지고 있다가, 하늘로부터 세가지 부절을 받은 뒤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였으니, 이 분이 곧 환웅천왕이다.
 손녀에게 명하여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하고, 신단수의 신과 결혼하여 남자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으며, 이에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조선, 시라, 고례, 남옥저와 북옥저, 동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예와 맥 등이 모두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들이다.
 단군은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맞아들이고 아들을 낳아 부루라 불렀으니, 이 분은 곧 동부여의 왕이다.
단군은 당요와 더불어 같은 날에 나라를 일으켰으며, 우임금이 도산에 천하의 제후를 모을 때 태자
부루를 보내어 알현하게 하였다.
나라를 거느린지 1천38년,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그 곳은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5.《應制詩註》〈權擥 註〉

命題十首 중에서.

 

始古開闢東夷主
[原註] 自註, 昔, 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王,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增註] 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曰,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率徒三千, 降於太白山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或云, 山卽, 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 願化爲人. 遺靈艾一炷·蒜二十枚, 曰: 「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熊忌三七日, 得身. 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 呪願有孕. 乃假化而爲人, 孕生子曰檀君. 與唐堯同日而立國, 號朝鮮, 初都平壤, 後都白岳. 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扶餘王. 至會諸侯塗山, 檀君遣子夫婁, 朝焉. 檀君., 至.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至今存焉. 享年一千四十八年.
厥後一百六十四年己卯, 箕子來封.
 
[원주] 예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기에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 때는 당요 원년인 무진년이었다.
[증주] 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어 '웅'이라 불렀는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인간을 교화 하고자는 뜻이 있었기에, 하늘의 세가지 부절을 받은 뒤에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였으니, 이는 단웅천왕을 말하는 것이다. '환'을 혹은 '단'이라고도 하며, 산은 곧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의 묘향산을 말한다. 풍백과 우사 및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및 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였으니, 무릇 사람 사이의 3백6십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이 세상에서 이치로서 교화를 행하였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으니, 함께 굴에 기거하며 항시 단웅에게 기원하기를, 사람으로 변신하기를 원하였다. 단웅께서 신령스러운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줄기를 남겨 놓으며 이르기를 「이것을 먹으며 백일 동안 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능히 지키지 못하였으나, 곰은 삼칠일 동안 금기를 지켜 여자의 몸을 얻었다. 그러나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소원하며 임신하기를 빌었다. 단웅께서 이에 잠시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며, 아들을 낳자 '부루'라 이름하였으니, 이가 곧 동부여왕이 되었다. 우임금이 도산에 천하의 제후를 모이게 하자 단군께서 아들 부루를 보내어 알현하게 하였다. 단군께서는 우순씨(虞舜氏)와 하우씨(夏禹氏)를 지나,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화하였으니,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그 묘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향년 1천48년이다. 그로부터 164년 후인 기묘년에 기자가 와서 책봉을 받았다.
 
 
 
6.《東國輿地勝覽》〈盧思愼 金宗直 共編〉

平壤府

 

【建置沿革】本, 三
朝鮮·高句麗之故都. 唐堯戊辰歲, 有神人降太伯山檀木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武王, 封箕子于此, 是爲後朝鮮. 傳至四十一代, 孫, 衛滿, 奪其地, 都王險城險一作儉, 卽平壤, 是爲衛滿朝鮮. (下略)
 
【설치연혁】본래 세 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에 신인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고 평양에 도읍하며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곧 전조선이 된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물리치고 기자를 이곳에 책봉하였으니,
이것이 곧 후조선이다.
후조선에서 41대를 전하여 후손 준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험'은 '검'으로 되어 있기도 하며, 곧 평양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곧 위만조선이다.

7.《東國史略》〈朴祥 編撰〉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
[1] 有神人降于太白山[2]檀木下, 國人立爲君,[3] 國號朝鮮,[4]平壤白岳, 後入阿斯達山,[5] 爲神, 是爲檀君.[6]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움에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며,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그가 단군이다.
 

[1] 只有九種夷.

[2] 在今寧邊府, 卽妙香山.

[3] 唐堯二十五年戊辰.

[4] 在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 索隱曰, 以有山水, 故名.

[5] 今九月山.

[6] 名王儉.《古紀》云 「檀君병立, 至.武丁八年, 爲神, 壽千四十八.」 然, 權近.應製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盖傳世歷年數, 非檀君壽也.

[1] 단지 아홉 부류의 '이'족이 있었다.

[2] 지금의 영변부에 있으니 즉 묘향산이다.

[3] 당요 25년 무진년이다.

[4] 동쪽의 언저리 해가 돋는 땅에 있는 까닭에 '조선'이라 하였다. 색은이 말하기를,〈그 땅에〉산수(汕水)가 있는 까닭에〈'조선'이라〉이름한 것이라 하였다.

[5] 지금의 구월산이다.

[6] 이름이 왕검이다.《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같은 시기에 즉위하여 상나라 무정 8년에 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48세이다」 하였다. 그러나 권근의 응제시에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천년은 족히 넘었다」 하였으니, 아마도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지 단군의 향년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8.《東國史略》〈柳希齡 編註〉

前朝鮮

 

檀君
: 姓桓氏, 名王儉. 東方初無君長. 有神人桓因之子桓雄, 率徒三千, 降于太伯山,[1] 神檀樹下, 謂之神市, 在世理化. 生子號曰檀君, 唐堯戊辰[2]卽位, 始稱朝鮮, 都平壤,[3] 移都白嶽.[4]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扶婁. 丁巳,[5] 南巡狩, 會諸候于塗山, 遣扶婁朝焉. 築塹城壇于海島中以祭天, 又命三子築城.[6] 薨, 葬于松壤.[7] 後嗣避箕子來封, 移都於藏唐京,[8] 傳世凡一千五百年.
 
군, 성은 환씨이며 이름은 왕검이다. 동방의 땅에는 처음에 군장이 없었다. 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어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일컬어 '신시'라 하며, 환웅은 세상에 있으면서 올바른 이치로서 세상을 교화하였다. 아들을 낳아 단군이라 이름하였는데, 중국의 당요 무진년에 즉위하여 처음으로 '조선'이라 일컫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후에는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 정사년에 우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을 나가서 제후들을 도산에 모으자 부루를 보내어 찾아뵙게 하였다. 참성단을 바다 가운데의 섬에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또 세째 아들에게 명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승하하자 송양에 장사를 지냈다. 뒤를 이은 후손이 기자가 피봉받아 들어오자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으며 세대를 전한 것이 무릇 1천5백년이었다.

 

[1] 在平安道.寧邊府, 今妙香山.                  [2] 帝二十五載.

[3] 今平壤府.                             [4] 在文化縣.

[5] 夏禹元年.                             [6] 今俱在江華府.

[7] 在江東縣.                             [8] 在文化縣.

[1] 평안도 영변부에 있으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요 임금 25년이다.

[3] 지금의 평양부이다.                       [4] 문화현이 있다.

[5] 하우 원년이다.                          [6] 모두 강화부에 있다.

[7] 강동현에 있다.                          [8] 문화현에 있다.

 

 

 

9.《東史纂要》〈吳澐 編撰〉

檀君朝鮮

 설명

唐堯甲辰, 至.太祖戊申, 三千七百二十五年.
 
檀君戊辰, 至我太祖壬申, 三千七百二十五年.
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
國人立爲君, 國號朝鮮. 時, 唐堯二十五年, 戊辰歲也. 初都
, 後徙白岳, 是爲檀君. 至.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爲神.[1]

동방에는 아홉 부류의 '이'가 있었는데, 애초에는 군장이 없었다.
한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 때는 당요 25년으로서 무진년이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으로 옮겼으니,
이 분이 단군이다.
상나라 무정 8년인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1] 古紀,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 前輩謂, 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壽, 此說有理. 太白山妙香山. 阿斯達山, 文化縣.九月山, 白岳卽此山也.

 

[1] 예전의 기록에 1천48년의 세수를 누렸다 하였는데, 이 얘기는 자못 의심스럽다.

   선배의 말에 1천48년이라는 것은 단씨가 그 세대를 전한 역년의 숫자이지 단군의

   세수는 아니라 하였는데, 이 얘기가 이치에 합당하다. 태백산은 곧 묘향산이다.

   아사달산은 문화현의 구월산이니, 백악은 곧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10.《東國文獻備考》〈洪鳳漢 編撰〉

帝系考二 歷代紀年

 

檀君
王儉. 古記云: 「東方, 初無君長, 只有九種夷. 有神人降于太白山[1]神檀樹下.[2] 唐堯二十五年戊辰, 立爲王, 國號朝鮮, 都平壤, 後徙白岳.[3] .武丁乙未, 入阿斯達山,[4] 爲神. 在位一千四十八年.[5]
 
단군의 휘는 왕검이다. 고기에서 말하였다.

「동방에는 애초에 군장이 없었으며, 단지 아홉 부류의 '이'가 있을 뿐이었다.

한 신인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당요 25년 무진년에 자리에 올라 임금이 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여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후에 백악으로 옮겨갔다.

상나라 무정 을미년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재위 1천48년이다.

 

[1] 卽妙香山.

 

[2] 詳見<氏族>.

 

[3] 世號唐藏京, 在文化.

 

[4] 卽九月山, 在文化

 

[5] 或云, .武丁甲子, 徙于地, 子孫相傳, 凡千有七十年. 或云, 享國一千二百一年, 壽一千九百八歲. 洪武丙子, 吉昌君.權近, 奉使朝, .高皇帝命題檀君詩, 應製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世.」 以爲實記云.

 

[1] 즉, 묘향산이다.

 

[2] (이 내용이) <씨족>에 상세히 보인다.

 

[3] 세간에서는 당장경이라 하니, 문화현에 있다.

 

[4] 즉, 구월산으로서 문화현에 있다.

 

[5] 혹은, 상나라 무정의 갑자년에 예의 땅으로 옮겨가서 자손이 대대로 전하기를 무릇 1천70년 동안 하였다고 한다. 혹은, 나라를 거느린지 1천21년이며, 세수를 누린 것이 1천98년이라 한다. 홍무 병자년에 길창군 권근이 사신의 신분을 받들고 명나라의 조정에 들어가니, 명나라 고황제가 '단군'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기에, 권근이 그 제목에 응하여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1천년은 족히 넘었도다」 하였는데, 현실적인 기록이라 여길만 하다고 한다.

11.《海東繹史》〈韓致奫 編撰〉

檀君朝鮮[1]

[1] 按《史記》索隱曰: 「朝音潮, 鮮音汕. 朝鮮汕水, 故名.」《伏生書·大傳》云: 「箕子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封之.」 然則, 箕子之前, 知有朝鮮之稱, 而檀君時, 朝鮮稱否, 未可的也. 然而《麗史》以檀君前朝鮮, 箕子後朝鮮, 故今從焉.

 

[1]《사기》에서 색은이 말하기를 「朝의 음은 '조'이며 鮮의 음은 '선'이다.

   조선에 선수가 있기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생상서의 <대전>에 이르기를 「기자가 조선 땅으로 달아나자 무왕이 이를 듣고는 그 땅을 기자에게 봉하였다」 하였으니,

   기자 이전에 '조선'이라는 명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단군의 시기에 '조선'이라고 불렀는지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고려사에 단군 시기를 '전조선'이라 하고 기자 시기를 '후조선'이라 하였으니, 이제 그것을 따른다.

唐堯氏, 帝天下二十有五年戊辰, 檀君氏立焉. 始治都邑, 邑于平壤, 國號朝鮮, 是爲檀君朝鮮. 桓雄者, 天神桓因之子也. 降于太白之山, 檀木之下, 因假化合而生子, 以生檀木下, 是爲檀君. 檀君, 生而神明, 九夷君之. 흘有殷氏.武丁八年乙未, 檀君九月山, 爲神云. 壽千四十有八歲.[1]
 
당요씨가 천하를 제왕으로서 다스린지 25년 째인 무진년에 단군씨가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여 다스리니 도읍은 평양이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기에
'단군조선'이 되는 것이다.
 환웅은 하늘신인 환인의 아들이다.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와 잠시 변화하여 인간과 화합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단목 아래에서 낳은 까닭에 '단군'이라 하였다.
단군의 이름은 '검'이며, 나면서부터 신명한 기운이 있어 아홉 '이'족의 임금이 되어
그들을 다스렸다.
은씨의 무정 8년인 을미년에 이르러 단군이 구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한다.
향년 1천48년이다.

 

[1]按東史所言,
檀君事, 皆荒誕不經. 檀君首出, 必其人有神聖之德, 古者神聖之生, 固有異於衆人者, 豈有若是之無理乎! 其所稱桓因.帝釋等語, 出於《法華經》. .之代, 尊尙異敎, 其弊至此. 東方屢經兵선, 國史秘藏, 蕩然無存, 緇流所記, 得保巖穴之間, 以傳後世. 作事者悶其無事可記, 時或編入正史, 世愈久而言愈實, 以至流傳中國, 遂使一隅仁賢之邦, 歸於語怪之科, 可勝歎哉! 又按《會紀》, .武丁八年非乙未乃甲子, 自唐堯戊辰至武丁甲子, 爲一千十七年, 東史皆言, 檀君壽一千四十八年, 其說誕만無稽. 權陽村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蓋以一千十七年爲傳世歷年之數, 此說是也.
 
[1] 해동의 역사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단군의 일은 모두 황당무계하여 좇을 만한 것이 아니다.
단군은 동방의 땅에서 처음 태어난 임금이기에 필시 그 사람됨에 신성한 품덕이 있었을 것이며,
예전에 신성한 사람의 탄생은 반드시 일반 무리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지만 어찌 이렇게도
이치에 맞지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환인 또는 제석이라 일컫는 것은 모두《법화경》에서 나온 말이다.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 이역의 종교를 존숭한 나머지 그 폐단이 여기에 이르렀다.
동방의 땅은 누차 병란을 겪어 나라의 역사로서 비장된 것들이 거의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으나, 승려들이 기록한 것은 암굴 속에 보존되었기에 그로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역사의 일을 쓰는 이들이 채록할 만한 기록들이 없음을 번민하다가 때때로 승려들이 기록한 것을
정사에 편입시켰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다보니 그 말들이 사실로 되어버렸으며, 게다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서는 마침내 한 쪽 모퉁이의 어질고 현명한 이 나라를 괴이한 말들이나 하는 부류로
여기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하는 것으로 족할 것인가!
또《회기에 의하면 상나라 무정 8년은 을미년이 아닌 갑자년이므로 당요 무진년으로부터
무정 갑자년은 1천17년이 되니,
해동의 역사에서 모두들 단군의 수를 1천48년이라 말한 것은 그 예기가 황당무계하다.
권근의 시에 말하기를 「세대를 전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이 1천년은 족히 넘었도다」 하였으니,
아마도 1천17년은 세대를 전한 역년임에, 그 예기가 맞다.

12.《東史輯略》〈金澤榮編, 魚允迪校〉

檀君朝鮮紀

 

檀君
, 姓, 名王儉. 上世, 東方之民, 草衣木食, 夏巢冬穴, 군聚以居, 未有統攝. 有人, 生于太伯山[1]檀樹下, 靈秀明智, 衆以爲神. 戊辰歲,[2] 推立爲主, 以其生於檀, 號爲檀君. 檀君旣立, 都於平壤, 名其國曰朝鮮.[3] 敎民編髮·盖首·飮食·居處之制. 聞夏禹氏會諸侯于塗山, 遣子扶婁往會之. 季年移居白岳[4]以沒, 子孫相傳, 凡千有十七年.[5] 徙于地, [6]後一百九十六年而箕子東來云.
 
단군은 '단' 성씨에 이름은 '왕검'이다.

상고 시절 동방의 백성들은 풀로 옷을 해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여름에는 나무 위의 집에 살고

겨울에는 동굴에 살며, 무리를 지어 거처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도맡아 다스리는 일이 없었다.

한 사람이 있어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신령스럽고도 명철한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무리들이 신으로 여겼다.
무진년에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으며, 그가 단목 아래에서 태어났다하여 '단군'이라 불렀다.
단군은 즉위한 후에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나라를 이름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머리결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과 음식 및 거처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하우씨가 도산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한다는 것을 듣고 아들 부루를 보내어 가서 참여하게 하였다.
말년에 백악으로 옮겨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자손은 대대로 이어져 무릇 1천17년이나 되었다.
예의 땅으로 옮긴 후 1백96년이 지나서 기자가 동쪽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1] 今妙香山.

[2] 卽中國唐堯二十五年.

[3] 古語, 東方之地, 先受朝日光鮮, 故謂之朝鮮.

[4] 今九月山, 一名阿斯達山.

[5] .武丁八年, 甲子.

[6] 或曰北夫餘.

[1] 지금의 묘향산이다.

[2] 즉, 중국 당요 25년이다.

[3] 옛 말에 동방의 땅은 제일 먼저 해를 바라보며 그 빛이 선명하다 하였으니,

      그러한 까닭에 '조선'이라 일컬은 것이다.

[4] 지금의 구월산으로, 일명 아사달산이다.

[5] 상나라 무정 8년 갑자년이다.

[6] 혹은 북부여라 하였다.

13.《神檀實記》〈金敎獻 著〉

檀君世紀

 

桓因
·桓雄·桓儉,[1] 是爲三神. 上元甲子十月三日, 桓儉, 以神化人, 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2]檀木下, 乃設神敎而敎民. 時, 人民被化, 歸者如市, 有神市氏之稱, 乃치三千團部. 開天一百二十五年戊辰十月三日, 國人推戴神人爲壬儉, 是檀君.[3] 國號.[4]匪西岬.河伯女爲后, 生太子扶婁. 當洪水, 命彭虞, 治山川, 奠民居; 神誌, 掌書契; 高矢, 治田事. 一百四十七年庚寅, 自太白移都平壤, 改國號朝鮮. 一百九十一年甲戌, 遣太子扶婁, 往夏禹氏.塗山會.[5] 封支子于扶餘, 以余守己君長, 使其子九人, 分掌諸郡, 以비天生南海上長. 設祭天壇,[6]三郞城.[7] 後, 徙都唐莊京.[8] 二百十七年庚子三月十五日, 入阿斯達山,[9] 化神御天, 開天, 二百十七年, 在君位, 九十三年. 傳不知幾世, 歷一千二百十二年. 太白·阿斯達, 皆有祠.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삼신'이라 한다.
상원 갑자년 10월 3일에 환검이 신의 몸에서 사람으로 변화하여,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
인장을 가지고 태백산의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이에 신의 가르침을 베풀어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이 때 인민들이 교화를 입게 되자 귀순하는 자가 마치 저자거리와 같았기에 '신시씨'라는
일컬음이 있게 되었으며, 이에 3천의 단부가 채워지게 되었다.
개천 125년 무진 10월 3일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추대하여 임검으로 삼으니,
이가 곧 단군이다. 나라 이름을 '단'이라 하였다.
비서갑 하백의 여식을 취하여 후로 삼고, 태자 부루를 나았다.
홍수를 만나자 팽우에게 명하여 산천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거처를 자리잡게 하였으며,
신지에게 명하여 서찰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고시에게 명하여 농사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7년 경인에 태백산으로부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고쳤다.
191년 갑술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하우씨의 도산 모임에 가게 하였다.
둘째 아들을 부여에 봉했으며, 여수기로 예의 군장을 삼고, 그의 아들 아홉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군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으며, 비천생을 남해상장으로 삼았다.
제천단을 설치하고 삼랑성을 건축하였다. 후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217년 경자 3월 15일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하여 하늘에 오르니,
개천한 지 217년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몇 세대를 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은 1천2백12년이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사당이 있다.
 

[1] 一云, 檀因·檀雄·檀君.

[2] 今白頭山.

[3] 降于檀木下, 故曰檀君.

[4] 稱號倍達.

[5] 交際之始.

[6] 壇在江華.摩尼山.

[7] 城在江華.傳燈山. 遣三子築城, 故曰三郞.

[8] 文化. 今莊莊坪是.

[9] 今文化.九月山.

[1] 또는 단인과 단웅 및 단군이라고도 한다.

[2] 지금의 백두산이다.

[3] 단목 아래로 내려온 까닭에 '단군'이라 한다.

[4] 배달이라 일컫는다.

[5] 교제의 시초이다.

[6] 제천단은 강화 마니산에 있다.

[7] 삼랑성은 강화 전등산에 있다.

      셋째 아들을 보내 성을 쌓게 한 까닭에 '삼랑'이라 한다.

[8] 당장경은 문화현에 있다. 지금의 장장평이 그것이다.

[9]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14.《朝鮮歷史》〈李昌煥 著〉

第二章  古朝鮮

 第一節  檀 君 의 化 降

神市로 얼마만를傳하야 오다가 上元甲子十月三日에 桓因桓雄桓儉의 三神中에서 桓儉이 天符印三箇를가지시고 太白山神檀樹아래에서 人間으로 化降하시니 이가神人이신 大皇祖檀君이시다 後人이 이날를開天節이라하야 우리가 가장깁어 紀念하는 名日이되얏다
 
   第二節  國 家 組 織 의 始 初
   桓族은 家族的觀念으로 造物主卽共同先祖를崇拜하는 宗敎政治인 神市의制度만으로는 生存競爭이

   漸次로일어나는時局에 立脚함에 缺陷이많음을깨닷고 一層鞏固한 共同團結이必要함으로 統治者를

   渴求하다가 開天一百二十五年戊辰十月三日에國人이 神人을主上으로모시고 太白山아래에 國都를

   定하고國號를檀(배달)이라 神人를壬儉이라불넛다 곧배달나라임검이라는말이니 그뜻을쫓아서

   漢字로檀君이라 譯述한것이다

   그卽位하신戊辰歲는 우리나라가 처음생긴紀元元年이다

15.《後漢書》〈宋·范曄 撰〉

東夷列傳

王制》云:「東方曰
.」 夷者, 저也, 言仁而好生, 萬物저地而出.[1]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2] 有九種,[3]견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4]孔子欲居九也.
 
《왕제》에 이르기를 「동방을 '夷'라 한다」 하였다. '夷'라 함은 '근본이 되는 뿌리'이니 어질고도 자애심이 많아 살생을 꺼림에 마치 만물이 뿌리되는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 과도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법도로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 또는 '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夷'에는 아홉 종류이 있으니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1] 事見《風俗通》.

[2]《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不死人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병在東方也.

[3]《竹書紀年》曰「后芬發卽位三年, 九來御」也.

[4]《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 命견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1]《풍속통》에 이 일이 보인다.

[2]《산해경》에 이르기를 「군자국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 먹고 두 마리의 무늬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 하였다.《외국도에 이르기를 「낭야와는 삼만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산해경에 또 이르기를 「죽지않는 사람(不死人)은 교경국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리고 죽지않는다」 하였으니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분발의 즉위 삼년에 구이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라 하였다.

[4]《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 즉위 2년에 황이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했으며 뒤에 소강이 즉위하자 방이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라 하였다.

 

羲仲우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1] 夏后氏.太康失德, 人始畔.[2]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3] 爲暴虐, 諸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4]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폐, 東夷침盛, 遂分遷·, 漸居中土.[5]
 
옛날 요 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의 땅에 자리잡고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바로 양곡이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아마도 해가 솟아나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이인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 소강 이후로 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이 난폭하고 잔악해지자 뭇 이 들이 침범하여 들어왔으며 은의 탕왕이 혁명을 하여 그들을 정벌하고 안정시켰다. 중정 때에 이르러 람이가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부터 삼백여 년 동안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였다. 무을 때에 쇠퇴하여 피폐해지고 동이는 점차 번성하여지더니 마침내 회와 대의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게 되었다.

 

[1] 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우夷. 暘谷, 日之所出也」.

[2] 太康, 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所逐也.

[3] 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竹書紀年》曰:「后發卽位元年, 諸賓于王門, 諸入舞.」

[4] 仲丁, .大戊之子也.《竹書紀年》曰「仲丁卽位, 征于藍夷」也.

[5] 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1] 공안국이《상서》의 주석에서 말하길 「동방의 땅을 우이라 한다. 양곡은 해가 솟아 오르는 곳이다」라 하였다.

[2] 태강은 계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에 의해 쫓겨났다.

[3] 소강은 천자 중강의 손자이며 천자 상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발 즉위 원년에 뭇 이 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또한 뭇 이 들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4] 중정은 은 나라 대무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중정이 즉위하여 람이를 정벌하였다」라 하였다.

[5] 무을은 천자 경정의 아들인데 무도하여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높은 곳에 걸어두고 활로 쏘며 일러 「하늘을 쏜다」고 하였다.

 

武王, 肅愼來獻石노·고矢. ·,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1] 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以伐宗周, 西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2] 偃王潢池東, 地方五百里,[3]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록之乘,[4] 乃使造父御以告, 令伐, 一日而至.[5] 於是.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6] 려王無道, 淮夷入寇, 王命괵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7]幽王淫亂, 四交侵, 至齊桓修覇, 攘而각焉. 及楚靈, 亦來豫盟.[8]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 侵滅小邦.
 
왕이 주를 멸함에 이르러 숙신이 들어와 돌화살촉과 호목화살을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를 배반하고 이적을 꾀여들이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하였다.
강왕 때 숙신이 다시 들어왔다.
후에 서이가 신분에 넘치는 칭호로 스스로를 일컬으며 구이를 거느리고 종주를 정벌하고자 서쪽으로 나와 하수의 위에 이르렀다. 목왕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고 서언왕에게 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언왕은 황지의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으니 땅은 사방 오백리에 행위가 어질고 의로워 땅위에 있으면서 배알하러 오는 것이 서른 여섯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기록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얻어서 조보로 하여금 이를 몰아 초 나라에 가서 고하여 서국의 정벌을 명하게 함에 하루만에 초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초 문왕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국을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고도 권도의 술수가 없었으며 그 사람됨이 차마 전투를 감당해내지 못한 까닭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으로 팽성의 무원현 동산 아래로 달아나자 백성된 자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만여 명 이었으니
그러한 연유로 그 산을 서산이라 이름하였다.
 려왕이 무도하자 회이가 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왕이 괵중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정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유왕에 이르러 음란하고도 어지러워 사방의 만이가 번갈아 침략하여 왔으나 제의 환공이 패권을 거머쥐게 되자 물리쳐 쫓아버렸다.
초 영왕에 이르러 신(申)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자 역시 와서 참여하여 맹서를 하였다.
후에 월 나라가 낭야로 옮겨가 더불어 정벌의 전쟁을 벌이니 마침내 뭇 하 를 능멸하여 포악한 짓을
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1]《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2]《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詳,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君.」 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3]《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4]《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繆王, 得赤驥·盜驪·화류·록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5] 造父, 解見蔡邕傳.

[6] 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비縣北. 徐山在其東.《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所敗, 北走此山」也.

[7]《毛詩序》曰:「江漢, 尹吉甫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淮夷.」 其詩曰:「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벽四方, 徹我土疆.」

[8]《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

 

[1]《상서》에, 무왕이 죽자 세 재상과 회이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는 대고를 지었다.  또 말하길, 성왕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는 회이를 멸망시켰다.

[2]《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 곡창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로 돌아옴에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는데, 나면서부터 한 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록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기를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偃'이라 이름하였다」라 하였다.

[3]《수경주》에 이르기를 「황수는 일명 왕수라고도 하며 포수와 합해진 후 패수에 이르러 사수로 흘러들어간다. 산양의 동쪽으로 부터 해릉 북쪽의 땅에 흐른다 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라 하였다.

[4]《사기》에 이르기를 「조보는 말을 잘 부리는 것으로 주 무왕으로부터 총애를 입었는데 <무왕은> 적기·도려·화류·녹이 등 네필의 말이 끄는 사마의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수렵을 즐기며 돌아갈 일을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

[5] 조보에 관해서는 채옹전에 상세히 보인다.

[6] 무원은 현인데 그 옛 성이 지금의 사주 하비현의 북쪽에 있다. 서산은 그 동쪽에 있다.《박물지》에 이르기를 「서왕의 괴이함은 범상하지가 않다. 무원현 동쪽 십여 리에 있는 서산의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이 진과 채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하고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로 자신이 하늘의 상서러움을 얻었다고 여기고 스스로 '偃王'이라 일컬었다. 목왕이 이를 듣고는 사신을 파견하면서 사마의 수레를 내어주어 하루만에 초에 이르게하여 초로 하여금 그를 정벌하게끔 하였다. 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초에게 패하여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라고 하였다.

[7]《모시서》에 이르기를 「《시경》의 '江漢'이라는 시는 주의 공경대부인 윤길포가 선왕을 칭송한 것이다. 선왕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켜 혼란을 다스리고 소공에게 명하여 회이를 평정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모시에 이르기를 「강수와 한수가 넘실거리니 병사들의 발걸음 씩씩하네. 즐기는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 회이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에게 명하시어 온 세상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 하였다.

[8]《좌전》에 초 영왕·채후·진후·정백·허남·회이 등이 신(申)에서 회동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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