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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전(裵裨將傳)

오늘의 쉼터 2009. 5. 6. 17:28

배비장전(裵裨將傳)

 


천지간의 인생이란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의 씨는 같겠지만

그러나 사람마다 우열(優劣)이 판이하여 남자에 현인·군자와 우부(愚夫)·천맹(賤氓)이 있고,

여자에 정부(貞婦)·열녀(烈女)와 음녀(淫女)·간희(奸姬)가 아주 없어지는 일이 없이 대를 이어오니,

예나 이제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은 형형색색의 사람의 성질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성질이란 것은 살고 있는 고장의 산천이 지니는 풍치와 경치를 많이 닮게 되는 것이니,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의 사람은 성질이 순후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악한 기질이별로 없고,

산천이 험준한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람의 성질이 어리석고 둔하며 간사하고 교활하게 나는 법이다.

호남 좌도 제주군 한라산은 옛적 탐라국 주산이요, 남녘땅의 제일 명산이다.

그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가 서려서 기생 애랑(愛娘)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애랑이 비록 천기로 태어났을망정 그 맵시와 지혜가 누구보다 빼어났고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을 한 것인지 호색하는 사나이가 걸려들면 상투 끝까지 빠져들어 허덕이게 하는 것이었다.

한양에 김경이라는 양반이 있었다. 문필과 재능이 비범하여 십오세에 생원(生員)·진사(進士)에,

이십 전에 장원(壯元)에 급제하여 제주(濟州)목사(牧使)를 제수받았다.

김경이 도임길에 오르고자 이(吏)·호(戶)·예(禮)·공(工)·병(兵)·형(刑)등 육방을 선택할 때

서강 사는 배선달을 장막 안으로 불러 예방의 소임을 맡기니,

그를 높이 불러 비장(裨將)이라 하였다.

배비장은 팔도 강산 좋은 경치 안 본 데가 없으나 제주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아직 구경을 못 하고 있던 터라 자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좋아하는 모양을 보고 아내가 주의하였다.

"제주라는 곳이 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긴 하나 색향(色鄕)이라 합니다.

그 곳에 계시다가 만약 주색에 몸이 빠져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부모님께 불효되고 첩의 신세를 망칠 것입니다."

그러자 배비장은 펄쩍 뛰었다.

"그건 염려 마오. 명심하고 절대로 계집은 가까이하지 않겠소."

배비장은 전령패를 차고 김경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이 때는 바로 꽃이 한창인 봄철이라.

오얏꽃, 복사꽃, 살구꽃이 만발하고 풀과 버들은 푸르고 맑은 물은 잔잔하며

사방의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배비장이 이런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사방을 두루 둘러보며 해남 땅에 다다르니

새로 도임되어 오는 목사를 맞이하려고 하인들이 등대해 있었다.

사또가 하인들의 인사를 받은 후에 사공을 불러 분부하였다.

 "예서 배를 타면 제주까지 며칠이나 걸리는고?"

사공이 공손히 여쭈었다.

"일기가 청명하고 서풍이 살살 불어 꽁무니바람에 양 돛을 갈라 붙여

아디(돛대에서 돛을 다는 곳)에서 핑핑 소리나고, 뱃머리에서 물결 갈라지는 소리가

팔구월 열바가지 삶은 것같이 절벅절벅 소리나면 하루에 천리길도 갈 수 있고 반쯤 가다

왜풍(倭風) 만나 표류하면 영국(英國)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만일 일이 틀리면 바닷물도 먹고 숭어와 입도 맞추게 됩니다."

사또가 분부하였다.

"제주에 당일로 닿는다면 상을 많이 줄 테니 착실히 거행하라."

사공이 분부를 받고 순풍을 기다리는데 마침 날씨가 청명하여 서풍이 솔솔 불어왔다.

그러자 사공이 소리를 높여 아뢴다.

"사또 배에 오르시오."

사또 일행이 배에 오르자,

도사공이 키를 들고 역군은 아디 틀며 돛을 달아 바람에 맞추어 배를 내어 망망대해로 나갔다.

그리고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마다 봄술에 취하여 상하가 같이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가 이윽고 추자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난데없이 태풍이 일어나고 사면이 침침해지더니 물결은 찰랑거리고,

태산 같은 물굽이가 덮치면서 우러렁 콸콸 뒹굴어 펄펄 뱃전을 때리고,

 바람에 배 위의 띳집도 조각조각 흩어지고, 키는 꺾이고,

용충줄(돛대에 달린 줄) 마룻대가 동강나고,

고물이 번쩍 들리면 이물이 수그러지고,

이물이 번쩍 들리면 고물이 수그러져서 덤벙 뒤뚱 조리질치니,

사또는 어리둥절하고 비장과 하인은 분주하게 서둘렀다.

사또가 그런 중에도 노하여 사공을 꾸짖었다.

"이놈, 양반은 물길에 익숙지 못해서 떨지만, 물길에 익은 놈이 그렇게 떠느냐?"

사공이 송구스럽게 말하였다.

"어려서부터 허다한 바다를 다 다녔지만 이런 고생은 처음이오.

사해 용왕이 외삼촌이라도 살아나기는 아주 어렵겠소.

살아나려면 이 물을 다 마셔야 하겠으니 뉘 배로 이 물을 다 먹겠소?"

모든 사람이 다 울고 비장들도 울었다.

그러나 사또의 명으로 고사를 지내고 나자 이윽고 달이 오르며 물결이 자니

배는 순조롭게 제주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환풍정에서 배를 내려 사면을 둘러보니 제주에서 제일 경치 좋은 망월루이다.

망월루를 살펴보니 어떤 청춘 남녀 한 쌍이 서로 잡고

이별이 안타까워 한숨쉬고 눈물짓는 것이었다.

이는 구관 사또가 신임하던 정비장과 수청 기생 애랑의 애타는 이별 장면이었다.

정비장이 애랑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서울 태생 소년으로 제주 물색 좋단 말에 마음이 쏠려

이 곳에 와 아리따운 연분을 너와 맺고 세월을 보낼 적에 맵시 있는 너의 태도,

목청 맑은 네 노래에 고향 생각 잊었건만 애달프구나 이별이야!

푸른 강 맑은 물에 원앙새가 짝을 잃은 격이로구나.

사람 없는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둘이 만나 희롱하다

이별하는 것이로구나.

이별이야, 이별이야, 애달프구나 이별이야!

애랑아, 부디 잘 있거라!"

다음은 애랑의 거동이다.

 없는 슬픔을 짜내어 고운 얼굴에 웃는 듯 찡그리는 듯 길게 한숨지며 하는 말이,

"여보 들어 보시오.

나으리가  이 곳에 계시는 동안은 먹고 입고 살기에 걱정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누구에게 의탁하라고 하루 아침에 떠나가십니까?"

"그대는 염려 마라. 내 올라가더라도 한동안 먹고 쓰기에 넉넉할 만큼 볏섬을 풀어 주고 갈 테니."

그리고는 정비장은 창고지기에게 분부하여 볏섬을 풀어 애랑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 밖에도 애랑에게 준 갖가지 재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에 애랑은 눈물을 이리저리 씻으면서 흐느끼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주신 기물은 천금이라도 귀하지 않습니다.

백년을 맺은 기약이 한판의 부질없는 꿈이 되니 그것만이 애달플 뿐입니다.

나리가 소녀를 버리고 가시면 백발 부모 위로하고 아름답고 귀여운 처자 만나

그리고 그리던 정회를 풀 때 소녀 같은 보잘것없는 첩이야 다시 생각이나 하시겠습니까?

 애고 애고 슬퍼라."

정비장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네 말을 들으니 정이 간절하구나. 내 몸이 지닌 노리개를 네 마음대로 다 달라고 해라."

그렇지 않아도 정비장을 물오른 송기 벗기듯 하려는 참인데, 가지고 싶은 대로 주마고 하니

애랑이년은 불한당 같은 마음에 피나무 껍질 벗기듯 아주 홀랑 벗겨 버리려고 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갓두루마기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나으리님 가신 후에 그 갓두루마기

한 자락은 펴서 깔고 또 한 자락은 흠썩 덮고 두 소매는 착착 접어 베개삼아 베고 자면

나으리 품에 누운 듯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양피 갓두루마기를 훨훨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이 옷을 깔고 덮고 베고 잘 때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하기를,

"나으리님 들으시오.

나으리 가신 후 겨울이 와서 추운 바람이 불 때 귀시려 어떻게 살겠습니까?

나으리 쓰신 돼지껍질 휘양(추울 때 머리에 쓰는 남바위 같은 것)을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두 귀에 덥석 눌러 쓰고 땀을 흘릴 테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비장은 휘양을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손으로 겉을 만지며 입으로 털을 불며 쓰게 되면 엄동설한 추위라도 네 귀 시리지 않을 것이다.

이 휘양 쓸 때마다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한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차신 칼을 소녀에게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그러나 칼을 만지며 이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애랑이 말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내가 임을 위하여 수절할 때 외간 남자가 달려들면 어쩌란 말이오?

소녀는 나으리가 주고 가신 칼을 빼어 키 큰 놈은 배를 찌르고,

 키 작은 놈은 멱을 찔러 물리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그 칼을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껄껄 웃으며 기분이 좋아 칼을 풀어 주었다.

"수절 공방 범하는 놈 네 수단껏 잘 찌르면 만인은 못 당해도 한 사람은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애랑이 칼을 받아놓고 앉아 울면서 또 하는 말이,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입으신 숙주(누인실로 짠 비단)창의(관원의 평복)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오."

그러자 정비장이 말하였다.

"여복을 달란다면 괴이할 게  없겠지만 남복이야 네게 쓸데가 없지 않느냐?"

"에그, 남의 슬픈 사정 그리도 모르신단 말이오?

나으리의 상하 의복 입고 밖에 나가 이리저리 거닐다  

한없이 슬픈 정회 임 생각 절로 날 때 들어와 빈 방에 홀로 앉아 이 옷 매만지면

이별 낭군은 가고 없어도 일천 시름 일만 근심 풀어질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이 크게 현혹되어 옷을 모두 활활 벗어 주니 애랑은 그 옷을 받아 놓고 또 말하였다.

"여보시오,

나으리 들어 보시오.

나으리와의 이별 후에 때로 나으리 생각나면 그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슬픔을 풀 길이 없을 겁니다.

무얼 가지고 슬픔을 풀면 좋겠습니까?

나으리 입고 계신 고의 적삼을 소녀에게 벗어 주시면 제 손으로 착착 접어 두었다가

임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누웠을 때,

나으리의 고의적삼을 나으리와 둘이 자는 듯이 담쏙 안고 옷가슴을 열어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향기로운 임의 땀내 폴싹폴싹 코를 건드리면 그 냄새로 슬픔을 풀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그까짓 고의 적삼쯤이 문제랴.

통가죽이라도 벗어 줄 판이었다.

정비장은 고의 적삼마저 벗어 애랑에게 주고 정비장이 아니라 알비장이 되었다.

그러니 밑천을 가릴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방자를 불렀다.

"가는 새끼 두 발만 들여오너라."

그것으로 개짐을 만들어 가지고 제마(濟馬) 입에 쇠재갈 먹이듯이 샅에 차고서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어허 극한이로구나. 바다의 섬 속이라서 매우 차구나."

그러나 애랑이 또 청하였다.

"나으리 들어 보시오.

옷은 그만 벗어 주고,

나으리 상투를 좀 베어 주신다면 소녀의 머리와 함께 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아니 다정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정비장은 말하였다.

 "정리는 비록 그렇다만 너는 나더러 바로 정텃절(정토사-백련사) 몽구리(중) 아들이 되란 말이냐?"

"나으리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나리가 아무리 다정하다 하나 소녀의 뜻만 못하니 애달프고 그 어찌 원통치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거니와 창가에 마주 앉아 나를 보고 당싯당싯 웃으시던 앞니 하나 빼 주시오."

애랑이 이러고 통곡을 하니 이런 애랑의 모양을 보고 정비장은 어이가 없어 묻는 것이었다.

"이젠 부모의 유체까지 헐라고 하니 그건 어디다 쓰려고 그러느냐?"

애랑이 대답하였다.

"앞니하나 빼어 주시면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 두고 눈에 암암한 임의 얼굴 보고 싶고,

귀에 쟁쟁한 임의 목소리 듣고 싶은 생각이 날 때면 종종 꺼내어 보고 슬픔을 풀고,

소녀 죽은 후에라도 관 구석에 지니고 가면 한 몸 합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크게 현혹되어 공방의 창고지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장도리와 집게를 대령해라."

"예, 대령했습니다."

"너는 이를 얼마나 빼어 보았느냐?"

"예, 많이는 못 빼어 보았으나 서너 말은 빼어 보았습니다."

 "이 놈, 제주 이는 죄다 망친 놈이로구나. 다른 이는 상하지 않게 앞니 한 개만 쑥 빼어라."

"소인이 이 빼기에는 이골이 났으니 어련하겠습니까?"

그러더니 작은 집게로 빼면 쑥 빠질 것을 커다란 집게로 잡고서는 좌로 치고 우로 치는 창과 칼격으로,

차·포 접은 장기 면상 차린 격으로 한없이 어르다가 느닷없이 코를 탁 치는 것이었다.

정비장은 코를 잔뜩 움켜쥐고 소리를 쳤다.

"어허 봉변이로군. 이 놈, 너더러 이를 빼랬지 코 빼라고 하더냐?"

공방 창고지기가 대답하였다.

"울려 쑥 빠지게 하느라고 코를 좀 쳤소."

정비장이 탄식하였다.

"이 빼라고 한 게 내 잘못이다."

 이러고 있을 즈음이다. 방자가 바삐 뛰어 들어왔다.

 "사또 등선하시니 어서 등선하십시오."

정비장은 할 수 없이 일어섰다.

"노젓는 소리 한 마디에 배 떠난다 재촉을 하니 이제 그만 떠날 수밖에 없구나."

 애랑은 정비장의 손을 잡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였다.

 "나를 두고 어디로 가시오.

하루 천리 가는 저 배에 임은 나를 싣고 가시오.

살아서 다시 못 볼 임 죽어서 환생하여 다시 볼까?

낭군은 죽어 학이 되고 첩은 죽어 구름 되어 첩첩한 흰 구름 속 가는 곳마다 정답게 놀아 볼까."

이에 정비장은 말하였다.

"너는 죽어 높은 집에 거울 되고 나는 죽어 동방에 해가 되어 서로 얼굴을 비쳐 보자."

이렇게 이들이 작별할 때였다.

신관 사또의 앞장을 섰던 예방의 배비장이 이 거동을 잠깐 보고는 방자를 불러 물었다.

"저 건너편 노상에서 청춘 남녀가 서로 잡고 못 떠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

 방자가 대답하였다.

"기생 애랑이와 구관 사또를 모시고 있던 정비장이 작별하고 있습니다."

배비장은 그 말을 듣고 비방하였다.

"허랑한 장부로구나.

부모 친척과 떨어져 천리 밖에 와서 아녀자에게 현혹하여 저러니 체면이 꼴이 아니다."

방자놈은 코웃음을 쳤다.

"남의 말씀 쉽게 하지 마십시오.

나으리도 애랑의 은근한 태도와 아름다운 얼굴을 보시면

오목 요(凹)자에 움을 묻어 게다가 살림을 차릴 것입니다."

배비장은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방자를 꾸짖었다.

"이 놈, 양반의 정취(情趣)를 어찌 알고 경솔히 말을 하느냐?"

그러나 방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황송하오나 소인과 내기를 합시다."

 "무슨 내기를 하자느냐?"

"나으리께서 올라가시기 전에 저 기생에게 눈을 팔지 않으시면 소인의 많은 식구가 댁에 가서

드난밥(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여 잠은 자기 집에서 자고 밥만 그 집에서 얻어 먹은 것)을 먹고,

만일 저 기생에게 반하시면 타시고 다니는 말을 소인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배비장은 대답하였다.

"그래라. 말값이 천금이 된다 할지라도 내기하고서 너를 속이겠느냐?"

두 사람이 한참 이렇게 수작하고 있을 때,

 신관 사또와 구관 사또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새 사또가 도임하였다.

그리고 사또의도임 절차가 끝나고 모두가 정해진 처소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지고 동쪽에 달이 뜨면서 맑은 바람이 부니 태평한 기상이 완연하였다.

모든 비장이 기생들을 골라잡고 들어가니

방마다 노래소리와 비파소리가 화합하여

월야에 퍼지는 소리는 듣기 좋고 처량한 느낌을 자아내 주는 것이었다.

이 때 배비장은 심사가 울적하여 남들처럼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정한 내기가 있다.

장부의 한 마디 말은 천금의 무게가 있다 하였으니 어찌 마음을 바꾸어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릴없이 혼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여러 비장 동료들이 배비장에게 권하여 전갈하였다.

"방자야. 네 예방 나으리께 가서 '미인의 고장인 이 곳에 오셔서 수심(愁心)에 싸이시니 웬일입니까?

고향 생각 너무 마시고 미색(美色)을 골라 수청들게 하시고 정담을 나눔이 장부의 소일인 줄 압니다.'

하고 여쭈어라."

방자놈은 분부를 듣고 예방 나으리께 전갈을 드렸다.

배비장은 방자에게 되돌려 전갈을 보냈다.

"먼저 물어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처럼의 청을 거절함은 자못 당돌한 일이나

저는 성질이 원래 옹졸하여 기악(妓樂)은 즐기지 않으니

이를 용서하시고 여러 동관께서나 재미있게 노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방자를 불렀다.

"지금 내 기생 차지가 누구냐?"

"행수인 줄 압니다."

배비장이 분부하였다.

"네 만일 이후로 기생년을 내앞에 비쳤다가는 엄한 매를 맞으리라."

이 소리를 사또가 들으셨다. 그리고 일등 명기를 모두 불렀다.

"너희 가운데 배비장을 흐뭇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중한 상을 줄 것이니 그렇게 할 기생이 있느냐?"

그 가운데서 애랑이 나섰다.

"소녀가 사또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또가 말하였다.

 "네 만약 배비장의 절의를 꺾을 수 있는 재주가 있다면 기생 중에 으뜸이 되리라."

애랑이 말을 받는다.

 "시방 좋은 봄철이니 내일 한라산에서 꽃놀이를 하십시오.

그러면 배비장을 흉계를 꾸며 홀리겠습니다."

사또는 각방 비장과 의논하고 새벽녘에 발령하여 한라산으로 꽃놀이를 갔다.

산 속으로 들어가니 온갖 꽃들이 다투듯 피어 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어

마치 아름다운 풍악을 갖춘 것 같았다.

사또와 여러 비장이 기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춘흥에 겨워 놀 때,

배비장은 저 혼자 깨끗하고 고고한 체하며 소나무 아래 외면하고 앉아

남의 노는 것을 비양(얄미운 태도로 빈정거림)하며 글을 읊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숲 속을 바라보니,

한 미인이 어릴락 비칠락 백만 가지 교태를 다 부리면서 봄빛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하 의복을 훨훨 벗어 던지고 물에 풍덩 뛰어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물장구를 치며 온갖 장난을 다 하며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배·가슴·젖도 씻고 예도 씻고 게도 씻고 샅도 씻고

한창 이렇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배비장은 그 거동을 보자 어깨가 들먹거려지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드디어 음남(淫男)이 되어 눈을 흘끗 뜨고 도둑 나무하다가 쫓기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그 여자의 근본이 알고 싶어졌다.

'어! 저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나 사람 여럿 녹였겠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으니 군침만 꿀꺽 삼키며 자탄할 뿐이었다.

드디어 하루 해가 저무니 사또는 관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비장들과 기생들, 그리고 하인들도 일제히 길을 떠날 때였다.

배비장은 딴 마음을 먹고 꾀병으로 배를 앓는 체하였다.

"벌써 혹했구나."

비장들은 그의 눈치를 채고 수군거리며 겉으로만 인사를 하였다.

"예방께서는 침이나 한 대 맞으시오."

 "아니오. 천만에요. 병이 아니니 조금 진정하면 나을 것이오."

배비장이 대답하였다.

비장들은 웃음을 참고 방자를 불러 일렀다.

 "너의 나리 병환은 대단치 않다 하니 진정되거든 잘 모시고 오도록 해라."

그리고는 배비장에게 말하였다.

"이대로 사또께 잘 말씀을 드릴 테니 마음놓고 진정한 후에 오시오."

"동관들께서 이처럼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또께 잘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배야!"

그러자 동관 한 사람이 쑥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은 짓궂기가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배비장을 놀려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건 너무 염려 마시오.

사또께서는 동관께서 이런 때없는 병이 있음을 짐작하시는 것 같습니다.

들으니 배앓이는 계집 손으로 문지르면 효력이 있다고 합니다.

기생 한 년을 두고 갈 테니 잘 문질러 달라고 하시오."

"아니오.

내 배는 다른 이의 배와 달라서 기생은 보기만 해도 배가 더 아프니

그런 말씀을 다시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그 배는 이상도 하구려.

계집 말만 들어도 더 아프다 하니 우리가 한 낙양 사람으로 천리 밖에 와서 정의가 친형제 같은데

그처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서야 혼자 두고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진정된 후에 우리같이 가도록 하는 게 좋겠소이다."

"동관께서는 내 성미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병이 나면 혼자서 진정을 해야 낫지 형제간일지라도 같이 있게 되면 낫기는커녕 더 아프니

 사람을 살리려거든 어서 제발 먼저 가 주오. 애고 배야 나 죽겠소!"

"정 그러시다면 혼자 두고라도 갈 수밖에 없소이다.

우리가 간 후에 무정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마시오."

동관들이 사또를 모시고 관으로 돌아갈 때 배비장은

그 여인을 보아야겠다는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얘 방자야! 애고 배야!"

"예?"

"나는 여기에 온 후 눈앞이 몽롱해서 지척을 분간 못 하겠다.

 애고 배야, 애고 배야."

"소인도 나으리께서 애를 쓰시는 것을 보니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 사또 가시는 걸 자세히 보아라."

"저기 내려가십니다."

 "애고 배야! 또 보아라."

"산 모퉁이를 지났습니다."

"애고 배야! 또 보아라."

"저기 아득히 가십니다."

"난 배가 아프기를 그만두었다."

목욕을 하는 여자를 보려고

배비장은 골짜기 화초 사이의 좁은 길로 몸을 숨겨 가만가만 사뿐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가느다란 소리로 방자를 불렀다.

방자가 그에 대답한다.

그러나 말공대는 점점 없어지고 말았다.

 "예, 어째서 부르오?"

방자의 대답이었다.

"너 저 거동을 좀 보아라."

배비장의 말이었다.

"저기 무엇이 있소?"

"얘야, 요란하게 굴지 말아라. 조용히 구경하자구나."

백만 가지 교태(嬌態)를 다 부리며 놀고 있는 그 거동은 금도 같고 옥도 같았다.

배비장은 드디어 이렇게 말하였다.

 "금이냐, 옥이냐?"

방자의 대답이었다.

"저 물이 여수(麗水)가 아니거늘 금이 어찌 놀고 있겠소?"
 
"그러면 옥이냐?"

"이곳이 형산(옥이 많이 난다는 중국의 산)이 아니거늘 어찌 옥(玉)이 있겠습니까?"

 "금도 옥도 아니라면 꽃이냐, 매화란 말이냐?"

"눈 속이 아니거늘 어찌 매화가 피겠소?"
 
"그럼 해당화가 틀림없구나."

 "명사십리(明沙十里)가 아니거늘 어찌 해당화가 되겠소?"

"그러면 국화란 말이냐?"

 "국화도 아닙니다."

 "꽃이 아니면 귀비(貴妃)란 말이냐?"

"온천물이 아니거늘 어찌 귀비가 목욕을 하겠습니까?"
 
"귀비가 아니면 불여우냐? 애고 애고 나를 죽인다. 나를 죽여!"
 
"나으리, 뭘 보고 그렇게 미쳤습니까? 소인의 눈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 놈아! 저기 저기 저 건너 백포장 속에 목욕하는 저것을 못 본단 말이냐?"

"예! 소인은 나으리께서 무엇을 보고 그러시나 했지요.

저 건너 목욕을 하는 여인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그렇지요?"

"옳다. 너도 이젠 보았단 말이구나. 상놈의 눈이라 양반의 눈보다는 많이 무디구나."

 "예. 눈은 반상(班常)이 다르니까

소인의 눈이 나리의 눈보다는 무디어 저런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도 반상이 달라 나으리 마음은 소인보다 컴컴하고 음탐하여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체면도 모르고 규중 처녀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욕심내어

눈을 쏘아 구경을 한단 말씀이시구려.

요새 서울 양반들 양반 자세를 하고 계집이라면 체면도 없이 욕심을 낼 데 안 낼 데

분간을 하지 못하고 함부로 덤비다가 봉변도 많이 당합니다."

 "뭐라구? 이 놈이?"
 
"유부녀가 약수에 목욕하는 것을 엿보는 타인 남자의 버릇없는 눈치를 채고,

친척들이 일시에 냅다 치면 꼼짝없이 혼만 날 것이니 저 여자 볼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무안을 당한 배비장이 하는 말이었다.

 "다시는 안 본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 정신이 헛갈려 아무리 안 보려고 해도 지남철에 날 바늘 달라붙듯

눈이 자꾸 그리로만 가니 어쩐단 말이냐?

방자가 배비장을 보고 있다가 소리쳤다.

"저 눈!"

 "안 본다."

배비장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눈은 여인에게로만 가는 것이었다.
 배비장은 이윽고 꾀를 내어 방자를 불렀다.

"저 경치가 참으로 좋구나.

서쪽을 살펴보아라.

저 불 같은 일모(日暮)의 경치가 아름답지 않으냐.

그리고 동쪽을 보아라.

약수 삼천리에 봄빛이 아득한데 한 쌍의 파랑새가 날아든다.

남쪽을 또 보아라. 망망대해의 천리 파도에 대붕(大鵬)이 날다가 지쳐서 앉아 있다."

방자는 짐짓 속는 체하고 배비장이 가리키는 대로 살펴본다.

배비장은 그 동안 여인을 보기에 바쁜 것이었다.

배비장이 그 여인을 한참 바라볼 때 방자가 하는 말이었다.

"저 눈은 일을 낼 눈이로군."

배비장은 깜짝 놀라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나 안 본다. 염려 마라."

이 때 방자는 갑자기 기침을 한 번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깜짝 놀라는 체하고 몸을 웅크리며 후다닥 물 밖으로 뛰어나와서

속곳을 안고 백포장 푸른 숲 속으로 얼른 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보름밤 밝은 달 같았다.

배비장은 그것을 보고 멍하니 정신을 잃고 앉았다가 스스로 탄식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 놈, 네 기침 한 번이 낭패로다. 고얀 놈 같으니라구!"

그러고 앉았다가 또 이윽고 배비장은 다시금 입을 여는 것이었다.

"얘, 방자야!"

"예!"

"네 저 백포장 밖에 가서 문안을 한 번 드리고 그 여인께 전갈을 해라."

방자는 말없이 배비장을 바라보았다.

"문안을 드리되,

 '이 산에 온 나그네가 꽃보고 놀다가 여행의 피로로 몸이 노곤하고 기갈이 몹시 심하니

혹시나 음식이  있거든 기한을 면하게 해주시면 천만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여쭈어라."

방자놈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전갈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지초면에 어떻게 남의 여자에게 음식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매맞아 죽기에 꼭 맞겠습니다."

이에 배비장이 말하였다.

 "방자야! 만일 매를 맞게 된다면 매는 내가 맞을 것이니

너는 달아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방자가 대답하였다.

"나으리의 정경을 보니 죽을 때 죽더라도 그렇게 할 도리밖에 더 없겠습니다."

그러고는 슬슬 그 곳으로 걸어가서 헛절을 한 번 꾸벅 하고 나서

잠시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쉬! 애랑아. 배비장이 벌써 너에게 반했으니

무슨 음식이 있거든 좀 차려 주려무나."

애랑은 방긋이 웃고서 온 정성을 다하여 산중귀물로 음식상을 정갈하게 차렸다.

그리고 맑은 술까지 자라병에 가득 채워 내어주었다.

"너의 나으리가 무례하지만 기갈이 몹시 심하다기에 이 음식을 보내니

그도 먹고 너도 먹고 빨리빨리 가거라."

방자가 애랑의 말을 전하고 음식을 올리니

배비장은 얼씨구나 하고 음식을 받아 앞에 놓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내 진작 이럴 줄 알았거니와,

저 감에 이빨 자국이 나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방자놈이 대답하였다.

"그 여인이 감 꼭지를 이로 물어 뗐습니다."

배비장은 껄껄 웃었다.

"이 음식 너 다 먹어라. 나는 감이나 한 개 먹고 말겠다."

방자놈은 짓궂게 감을 집어 들었다.

"이빨 자국이 난 것이라

그 여인의 침이 묻어 더럽습니다. 소인이 먹겠습니다."

"이 놈 ! 어이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이리 내놓아라."

배비장은 감을 빼앗아 껍질째 달게 먹은 다음,

그 여인에게 방자를 시켜 전갈을 보냈다.

 "'이같이 좋은 음식을 보내 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하고, 또 '무례한 말씀이나 하늘엔 양이 있고 땅엔 음이 있는데

이 음과 양이 서로 만나 합함은 인생의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 바

방탕한 화류객이 홀연히 산에 올라왔다가 꽃을 찾는 벌나비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하니 이 마음을 헤아려 주소서.' 하고 여쭈어라."

방자는 배비장의 분부대로 그 여인에게로 가서 전갈을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배비장에게 말하였다.

 "그 여인이 답례는 듣지도 않고,

큰 탈 날 것이니 빨리빨리 돌아가라고 합디다."

배비장은 쓸쓸하게 긴 탄식을 하면서 일어섰다.

"할 수 없다. 이젠 내려가자."

침소로 돌아온 배비장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해 상사로 신음하는 것이었다.

"한라산 맑은 정기를 제가 모두 타고 나서 그리도 곱게 생겼는가?

잊을 수가 없으니 한이로다. 애고 애고 이 일을 어찌할꼬?"

 그러나 배비장은 이윽고 굳은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에라! 죽더라고 말이나 한 번 건네 보고 죽으리라."

 그리고 일어섰다.

 "얘야, 방자야!"

 "예, 부르셨습니까?"

 "어서 이리로 좀 오너라. 나는 죽을 병이 들었구나!"

 "무슨 병이 드셨기에 그처럼 신음하십니까?

 패독산이나 두어 첩 드셔 보십시오."

 "아니다. 패독산이나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러면 망령병이 드셨나 보구려.

 망령병에는 무슨 약보다 당약이 제일이랍니다."

 "무슨 약이란 말이냐?"

"홍두깨를 삶은 것을 당약이라고 합니다.

젊은 양반 망령엔 당약이 제일입니다."

 "아니다. 내 병엔 따로 약이 있다. 하지만 그럴 얻기가 어렵구나."

 "그 무슨 약이기에 그렇게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늘에 있는 별도 따려면 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방자야! 그 말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살고 죽고는 방자 네 손에 달렸다. 네 날 좀 살려다오."

 "아따 나으리도, 죽긴 누가 죽습니까? 말씀이나 하시구려."

 "오냐, 오냐. 방자야 어제 한라산 수포동 푸른 숲 속에서 목욕하던 여인을 보지 않았느냐?

그 여인으로 하여 병을 얻었다.

이거 죽을 지경이로구나.

네가 그 여자를 좀 볼 수 있게 해 주려무나."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 여자는 규중에 있으니 만나볼 길이 없습니다."

 배비장은 더 할 말을 잊어 버렸다.

그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얘야 방자야!

그 여자가 음식 차려 보낸 것을 보면 그도 내게 전혀 마음이 없진 않았던가 보더라.

한 번 말이나 해 보라."

 "어디다 말을 한단 말씀입니까?"

 "그 여인에게다."

 "나으리! 그건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 여인의 성깔이 악하고, 절개가 굳으니 그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배비장은 방자를 잡고서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얘야! 될지 안 될지 편지를 서 줄 테니 전해 보아라.

일만 잘 되면 구전으로 삼백 냥을 주마! 방자야 어떠냐?"

방자놈은 구전을 많이 준다는 소리에 군침을 흘렸다.

그러나 관문(官門) 속에서 구렁이가 된 놈이므로 돈냥이나 얻어 볼 생각으로 은근히 잡아떼는 것이었다.

"소인은 그 편지 가지고 가지 못하겠습니다."

"방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천리 밖 이 곳에 와서 통정(通情)하고 지내는 하인이 너밖에 더 있느냐?

네가 내 마음을 몰라 주고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이냐!

그러니 방자야, 잘 생각을 하고 내 이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다오! 얘, 방자야!"

"나으리! 소인이 나리와의 정의를 생각하면 물불을 사양치 않고 뛰어들겠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냐? 어서 말해 보아라."

 "소인은 세 살 때 아비가 죽어 늙은 어미 손에서 자라

열 살 때부터 방자 노릇을 해 왔는데 한 달에 관가에서 주는 것이라곤 돈 두 냥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심부름을 하노라면 신발값이나 되겠습니까?

먹고사는 것은 어떠냐 하면, 각방 나으리님네가 잡수시다 버리는 밥이나 얻어서

어미와 그날그날 연명해 가는 형편입니다."

 방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소인의 사정이 이러니

일이 뜻같지 않아 소인이 병신 되어 나리도 모실 수 없고 늙은 어미는 먹일 수 없게 되면

소인의 신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렇게 위태로운 곳엔 갈 수 없습니다.

나리께서 살펴 주십시오."

 "그런 일이라면 아무 염려 말아라.

만일 매를 맞을 경우라면 네 상처가 낫도록 해 줄 것이며,

네 어미는 내가 먹여 살리겠다.

그러니 아무 염려말고 어서 이거나 갖다 주어라."

배비장은 얼굴에 미소를 띄고 궤문을 덜컥 열더니 돈 일백 냥은 내주는 것이었다.

"이게 약소하지만 우선 네 어미에게 갖다 주어 양식이나 팔아 먹도록 해라."

방자는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체 응락을 하였다.

"나으리께서 정 그러시다면 편지를 써 주십시오."

"일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네 수단에 달렸으니 부디 눈치있게 잘 해라."

방자는 애랑에게 그 편지를 전하였다.

 편지 내용은 한 마디로 줄인다면 다음과 같다.

'낭자를 한 번 본 후 상사(相思)의 괴로움으로 깊은 병이 들었는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낭자의 손에 매었으니 모쪼록 이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애랑이 편지를 다 읽고 나자 방자는 애랑에게 말하였다.

 "답장을 하되 허투로 하지 말고 애가 타게 해라."

방자가 애랑의 답장을 받아 주니,

배비장은 애랑의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 대학지도나 읽는 듯이 읽어 내려가다가,

'미친 소리 말고 마음을 바로잡고 물러가라.'

한 대목에 이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고 이일을 어찌할꼬? 섬 속에 원통한 귀신 되었구나."

곁에서 방자가 채근하였다.

 "여보 나으리, 실심 마시고 그 아래를 더 읽어 보십시오. 연(然)자가 있소그려."

 배비장은 다시 보아 가다가,

 "옳지, 연자의 뜻을 알았다."
하고 무릎을 치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연이나(그렇긴 하나) 장부의 중한 몸으로 나로 인하여 병을 얻었다 하시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나는 규중 여자의 몸으로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만나기 어려우니

 달이 진 깊은 밤에 벽헌당을 찾아와서 몰래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한 베개를 베고 자려니와 만약 실수한다면 그 몸이 위태합니다.

만약 오시려거든 집안이 번거롭고 닭과 개가 많으니 북창 쪽으로 살살 가볍게 걸어 오십시오.'

배비장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그렇게도 못 견디게 정신이 몽롱하고 온 몸이 쑤시던 병도 감쪽같이 나았다.

기다리던 밤이 되자 배비장은 정장을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방자가 이를 보고 참견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나으리 소견 없소.

 밤중에 유부녀 통간하시면서 비단옷을 입고 가다가는 될 일도 안 될 것입니다.

그 의관을 모두 벗으시오."

 "벗다니? 초라하지 않겠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드시면 가지 마십시오."

"얘야! 요란스럽게 굴지 마라. 내 벗으마."

배비장은  방자의 말을 따라 의관을 훨훨  벗어 버리고 덜덜 떠는 것이었다.

"얘야, 알몸으로 어찌하란 말이냐?"

"그게 좋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면 한라산 매 사냥꾼으로 알겠습니다.

 제주 복색으로 차림을 차리시오."

"제주 복색은 어떤 것이냐?"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리십시오."

 "얘야! 그건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초라하게 생각이 들거들랑 가지 마십시오."

"아니다 방자야. 네가 하라면 개가죽이 아니라 돼지가죽이라도 뒤집어 쓰마."

배비장은 개가죽 두루마기에 노벙거지로 차렸다.

"얘야, 범이 보면 개로 알겠다.

총 한 자루만 꺼내어 들고 가자! 그러는게 안전하지 않겠느냐?"

"그렇게도 겁이 나고 무섭거든 차라리 가지 마오."

"얘야! 네 정성이 그런 줄 몰랐구나.

네가 못 갈 것 같으면 내가 업고라도 가마! 어서 가자 방자야!"

높은 담 구멍 찾아가서 방자가 먼저 기어들어갔다.

"쉬! 나리,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두 발을 한데 모아 묘리있게 들이미시오."

배비장이 두발을 모아 들이밀자,

방자놈이 안에서 배비장의 두 발목을 모아 쥐고 힘껏 당기니

부른 배가 걸려서 들어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하였다.

배비장은 두 눈을 흡뜨고 바드득 이를 갈았다.

"얘야, 조금만 놓아다오."

방자가 갑자기 다리를 탁 놓자

배비장은 곤두박질하고는 다시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매사가 순리로 되지 않으니 낭패로구나.

산모의 해산법을 말하더라고 아이를 머리부터 낳아야 순산이라 한다.

그러니 상투를 먼저 들이밀마.

너는 이 상투를 잘 잡고 안으로 끌여들여라."

방자놈은 배비장의 상투를 노벙거지째 와락 잡아당겼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펑 하고 들어가자,

"불을 켠 방으로 들어가서 욕심대로 얼른 놀다가 날이 새기 전에 나오십시오."

하고 방자는 몸을 숨기고는 배비장의 거동을 엿보는 것이었다.

가만가만 자취없이 들어가서 문 앞에 서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뚫고

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본 배비장은 정신이 아찔하였다.

등불 밑에 앉은 여인의 태도, 천상의 선녀를 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문구멍으로 풍겨왔다.

 배비장은 담뱃내를 맡고 저도 모르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놀랐는지 문을 활짝 열어제치면서 소리쳤다.

"도둑이야!"

배비장은 겁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말하였다.

"문안드리오."

 "범을 그리려다 강아지를 그린 그림이로군.

 아마도 뉘 집 미친개가 길을 잘못 들어왔나 보다."

여인은 배비장의 꼴을 보다가 이렇게 말하고는 나뭇조각으로 배비장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배비장이 말하였다.

"나 개 아니오."

"그러면 뭐냐?"

 "배가요."

계집은 배비장의 꼴을 보고 웃고 내려와 손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서,

"이 밤에 웬일이오?"

들어가 정담을 나눈 뒤에 불을 막 끄고 나니,

방자놈이 고함을 친다.

 "불 켜놓고 문 열어라."

 여인이 깜짝 놀라는 체하고 몸을 떨며 당황해할 때

방자놈의 지어낸 언성이 다시 떨어졌다.

 "요기롭고 고얀 년, 내 몸 하나 옴짝 하면 문 앞의 신 네 짝이 떠날 날이 없으니

어느 놈과 미쳐서 또 두런거리고 있느냐?

 이 연놈을 한 주먹에 뼈를 부수어 박살내리라."

배비장은 혼비백산하여 허둥거렸으나 외문 집이 되어 도망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몸으로 이불을 쓰고 여자에게 물었다.



"그게 본 남편이오? 성품이 어떻소?"

"성품이 매우 표독합니다.

미련하기로는 도척이요,

기운은 항우요,

술을 좋아하고 화가 나면 백주에도 칼을 뽑아 피보기를 예사로 합니다."



계집의 말을 들은 배비장은 애걸복걸하면서 여인에게 매달렸다.

"낭자, 나를 제발 살려 주게."

계집은 언제 장만해 두었던지 커다란 자루를 꺼내 가지고 와서는 아구리를 벌리면서 말하였다.

 "이리 들어가시오."

배비장은 이상하게 여기고 겁에 질려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거기엔 왜 들어가라는 거야?"

"들어가면 살 도리가 있으니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배비장을 자루에 담은 후에 자루끈을 모아 상투에 감아 매고

 

등잔 뒤 방구석에 세워 놓고 불을 켰다

이 때 방자놈이 문을 왈칵.열고 성큼 들어서며 사면을 둘러보았다.

"저 방구석에 세워놓은 것은 무엇이냐?"

"그건 알아서 뭣 하시겠어요?"

계집의 대답이 간드러지다.

"이 년아, 내가 묻는 데 대답을 할 것이지 무슨 반문이냐?

이 년 주리방망이 맛을 보고 싶으냐! 맛을 보고 싶다면  보여 주마."



계집의 음성이 더욱 간사해진다.

"거문고에 새 줄을 달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방자놈은 수그러지는 체하고 수그러진 음성으로,
 "음! 거문고라면 좀 타 보자."

하고는 대꼬챙이로 배부른 등을 탁탁 쳤다.

그러니 배비장은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꿈틀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배비장은 아픔을 꾹 참고 대꼬챙이로 때릴 때마다 자루 속에서,
 "둥덩 둥덩"
하고 소리를 냈다.
 "음! 그 놈의 거문고 소리가 매우 웅장하구나. 대현을 쳤으니 이제 소현을 쳐 봐야겠군."
 이번은 코를 탁 쳤다.

"둥덩 둥덩" 

"음! 그 놈의 거문고가 이상하다.

아래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고 위를 쳐도 위에서 소리가 나니 말이다.

 이 어떻게 된 놈의 거문고냐?
계집의 대답이었다.
"이건 특수한 거문고라서 그렇답니다."
"러냐? 술 한 잔 날 권하고 줄을 골라라.

오늘 밤 놀아 보자. 내 소피보고 들어오마."
방자는 문 밖으로 나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엿들었다.
자루 속에서 배비장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그 자가 거문고를 내 볼 것 같으니 다른 데로 나를 옮겨 주오."
 "이곳으로 어서 들어가시오."
 계집은 윗목에 놓인 피나무 궤를 열고 말하였다.

궤 속으로 들어간 배비장은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서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자기가 믿고 데리고 있는 방자의 계교라는 것을 어찌 알 것인가.

계집이 궤문을 닫고 쇠를 덜커덕 채우니 이제는 함정에 든 범이요,

독 안에 든 쥐였다. 배비장은 숨이 가빠져 왔다.
이 때 나갔던 사내가 다시 들어오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눈이 저절로 감겨 잠깐 꿈을 구니 백발 노인이 나를 불러,

네 집에 거문고와 피나무궤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액신이 붙어서 장난을 하므로 패가망신할 징조라 했다.

저 궤를 불태워 버려라. 어서 짚 한 단을 가지고 가서 불을 놓아라!"

배비장은 탄식 하였다.

"이젠 화장인가.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이 때 계집이 악을 썼다.
"조상 적부터 전해 내려온 기물로 업귀신이 들어 있는 업궤인데 그것을 불사르라니 안 될 말이오."
"이 년아, 나는 너하고 못 살겠다. 나는 업궤를 가지고 나가겠다."
사내가 궤를 덜컥 어깨에 걸머지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계집이 붙들고 늘어졌다.
"임자가 업궤를 가져가고 나는 망하란 말이오? 이 궤는 못 놓겠소."
 "그렇다면 한 토막씩 나누어 갖자."
사내는 커다란 톱을 가지고 와서 궤짝 위에 올려놓고 말하였다.
"자 어서 톱을 마주 잡고 당기자."
배비장은 더 참지 못하고 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여보소. 미련도 하오.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 하지 않소?

그 계집에게 궤를 다 주구려. 토막을 내면 못 쓰게 되고 말지 않소?"

그러자 사내는 톱을 내던지며 말하였다.
"아뿔사!  이놈의 업귀신이 도생하여 인사가 되었으니 불침으로 찌르자."

불에 단 송곳이 배비장의 왼편 눈으로 내려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궤 속의 배비장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서

악이라도 한 번 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눈의 소중함을 모른단 말이오?"

"에그! 궤신이 저 상할 줄 미리 알고 애걸하니 정상이 가엾구나.

 그 몸 상하지 않도록 궤를 져다가 물에다 던져 버려라."

사내는 질방을 걸어 궤짝을 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가는데 어디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게 뭐냐?"
"업궤요."
"그 궤를 내게 팔아라."
"그러시오."
사내는 궤짝을 져다가 사또가 있는 동헌 마당에 놓고 물에 던지는 듯이 말하며

궤  틈으로 물을 붓고 흔들었다.
"궤 속 귀신 너는 들어라! 이 파도에 띄울 테니 천리길을 떠나거라."
배비장은 생각하였다.
'어허 궤가 벌써 물에 떴나 보구나. 이젠 죽었구나.'

그런데 얼마 후에 들으니 어기어차! 어기어차!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몰론 사령들이 지어서 하는 배 젖는 소리였다.

배비장은 소리를 질렀다.
"거기 가는 배는 어디로 가는 배란 말이오?"
"제주 배요."
 "어렵지만 이 궤를 실어다가 죽을 사람 살려 주오."
 "궤 속에서 나는 그 소리가 이상하다. 우리 배에 부정 탈라! 상앗대로 떠밀자."
"난 사람이니 부디 살려 주오."
"어디 사는 사람이냐?"
"제주사오."
"제주라는 곳이 미색의 땅이라, 분명 유부녀 통간 갔다가 그 지경이 되었구나."
"예, 옳소이다."

 "우리 배엔 부정이 탈까 못 올리겠고 궤문이나 열어 줄테니 헤엄을 쳐서 가거라.

그런데 이 물은 짠물이니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테니 눈을 감고 가라."

사공이 쇠를 덜커덕 열어놓자,

배비장은 알몸으로 쑥 나와서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와락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렸다.

한참을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가다가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치니

배비장은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자세히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가 앉고 전후 좌우에 관속들과 기생,

노비들이 늘어서서 웃음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사또가 웃으면서 물었다.
"자네, 그 꼴이 웬일인고?"

 배비장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또 다른 번역
 

발단 부분과 결말 부분

애랑이 철병도 받아놓고 또 앉아 우는 말이,
"
여보 나리 들으시오.

나리 입으신 숙주 창의 분주 바지 상하 의복 소녀를 벗어 주고 가오.

정 비장 이른 말이,

"여복은 행여 달라기가 고이치 않거니와 남복이야 네게 쓸데없다."

"애고 남의 설운 사정 그다지 모르신단 말이오.

나리 상하 의복 활활 털어 입어보고,

착착 접어 홰에 걸고, 앉아 보고 서서 보고,

누워서 보고, 일어나 보고 문 열고 밖에 나가 이리 저리 거닐다 보고,

무궁첩첩 설운 정회 임 생각 절로 날 제 나며 들며 빈 방 안에 홀로 앉아 잠 못 이뤄 수심 겨워 앉았을 제,

이별 낭군은 가 계셔도 옷은 홰에 걸렸으면 옷 벗어 홰에 걸고 누웠는 듯 소피 간 듯

일천 설움 일만 근심을 옷을 보면 풀어지니 근들 아니 다정하오."

정 비장 대혹하여 활활 벗어 모두 주니, 애랑이 옷 받아 놓고 또 앉아 운다.

"여보오 나리 들어시오.

나리 이별 후 때때로 생각나니 답답 설움 어이 할까.

설움 풀 것 바이 없소. 무얼 가지고 설움 풀까.

 나리 입으신 고의 적삼 소녀를 벗어 주면,

내 손으로 착착 접어 임 생각 잠 못 이뤄 누웠다가

나리 고의 적삼 임과 둘이 자는 듯이 담쑥 안고 누웠다가 옷가슴을 열고 보면,

향기로운 임의 땀내 풀삭풀삭 촉비하면 냄새 맡고 설움 푸니 근들 아니 다정하오."

정 비장 혹한 마음에 고의 적삼이 무엇이리.

통가죽이라도 벗어 줄 밖에 하릴없다.

고의 적삼마저 벗어 애랑 주니,

정 비장이 알비장이 되었구나.

밑천을 감출 길이 바이 없어 방자를 부른다.

"방자야."

"예."

"세승 두 발만 들이어라."

하더니,

견짐을 만들어 제마 입에 쇠재갈 먹인 듯이 잔뜩 되우 차고 두리번거리며 하는 말이,

"어허 그 날 극한 이로고. 해도중이라 매우 차다."

이리 할 제 애랑이 또 여쭈오되.

"나리 들어 보시오.

옷은 그만 벗어 주고 나리 상투를 좀 베어 주시면 소녀의 머리와 한데 땋아 드렸으면

일신 운발 되겠으니 근들 아니 다정하오."

정 비장 이른 말이.

"네 아무리 정리는 그러하나 나는 바로 정텃절 몽구리 아들이 되라느냐."

애랑이 통곡하며,

"나리 여보 내 말씀 듣소.

 나리가 아무리 다정타 하여도 소녀 뜻만 못하오니 애닮고 그 아니 원통한가.

그는 그러하거니와 분벽사창에 마주 앉아 서로 보고 당싯당싯 웃으시던 앞니 하나 빼어주어."

정 비장 어이없어 하는 말이,

"이제는 부모의 유체까지 헐라 하니 그느 어디다 쓰려느냐."

애랑이 여쭈오되,

"호치 하나 빼어주면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 두고

눈에 암암 귀에 쟁쟁 임의 얼굴 보고 싶은 생각나면 종종 내어 설움 풀고,

소녀 죽은 후에라도 관 구석에 지녀 가면 합장일체 아니 될까. 근들 아니 다정하오."

정 비장 대혹하여,

"공방고자야. 장도리 집게 대령하여라."

"예, 대령하였소."

"네, 이를 얼마나 빼어 보았느냐."

"예, 많이는 못 빼어 보았으되 서너 말 그릇이나 빼어 보았소."

"이놈, 제주 이는 몰봉친 놈이로구나. 다른 이는 상치 않게 앞니 하나만 쏙 빼어라."

"소인이 이 빼기에는 숙수단이 났사오니 어련하오리까."

하더니 작은 집게로 잡고 빼었으면 쑥 빠질것을 큰 집게로 이덤불째 휩쓸어 잡고

좌충우돌 창검격으로 차포 접은 장기 면상 차린 격으로 무수히 어르다가 뜻밖에 코를 탁 치니,

 정ㄹ 비장이 코를 잔뜩 부둥키고,

"어허 봉패로고. 이놈, 너더러 이 빼랬지 코 빼라더냐."

(중략)

배 비장 자루 속에서 거만한 소리로 하는 말이,

"여보오, 궐자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수가 분명 내어 볼 듯하니, 다른데로 나 이사 좀 시켜 주오."

저 여인 거동 보소. 웃목에 놓인 피나무 궤를 열고,

"예나 바삐 드시오.":

배 비장 궤를 보고 문자는 놓지 아니하고 쓰던 것이었다.

"체대궤소하니 하이은신고?"

저 계집 하는 말이,

"그 궤가 밖으로 보기는 작사오나 속이 넓어 은신할 만하니 잔말말고 바삐 드시오."

배 비장 하릴없어 궤문 열고 두 눈 감고 들어가니,

굽도 접도 못하여서 모믕ㄹ 곱송 그리고 생각하니,

"한심하고 설운지고. 이놈의 흉계를 누가 알리.

날 같은 호색 남자 궤중에 고혼 되기로 누구를 원망하리."

저 여인 궤문 닫고 쇠 채우니, 함정에 든 범이요 우물에 든 고기로다.

답답 궤중 어찌 살리. 이렇듯 자탄할 제 저놈이 다시 들어오며 하는 말이,

"아무것도 흥황 없다.

내 아까 눈이 절로 스르르 감기면서 꿈을 꾸니 백수노인이 나를 불러 이르되.

네 집의 거문고와 피나무 궤가 있으냐 하시기로.

 내 말이 있노라 한즉,

그 노인 가로되 금신이 혈입궤중하여 무수작란하니

그 궤가 유즉여가망이요

무즉여가흥이라.

역력히 현몽하니

저 궤를 불에 소화하리라. 짚 한 동 갖다 불 놓아라."

이 때 궤 속에서 배 비장 그 말 듣고 탄식하되,

"이제는 바로 화장한다. 이일을 어찌할꼬."

저 계집도 악을 쓰며 하는 말이.

"조상에서 전래하던 기물이라.

소중한 저 궤속에 업 귀신 들어있어 우리집 여러 식구 먹고 입고 쓰고 남게 하는 엄궤올세.

불사르지는 못하오리."

이놈이 화를 내어 하는 말이.

"네 행실 저러하니 너 데리고 못 살겠다.

가장 집물 귀치 않고 절색 소첩 너도 싫다.

업궤 하나 가졌으면 내 어디 가서 못 살소냐."

하더니, 그 궤를 걸머지고 나서면서 이른 말이,

"이년, 본부 구정 날 버리고 간부 신정 네 취하니 가대차지 잘 살아라."

저 여인 궤를 붙들며 하는 말이,

"업궤는 임자가 가져가면 나는 폐가 하라든가.

이 궤는 못 놓겠네. 가대 차지 임자가 하고 업궤는 나를 주소."(중략)

이놈이 궤를 져다 사또 계씬 동헌 마당에다 벗어 놓으며,

가장 물에다 갖다 넣는 듯이 경계하여 이르는 말이.

"궤중 귀신 네 들어라.

네 죄목 만사무석이라.

창파 중에 띄우리니 속거 천리 멀리 가거라."

하고 참물에다 띄우는 듯 물 갖다 옆에 놓고 궤 틈으로 부으면서 흔들흔들 정신 잃게 요동하니,

배 비장 생각하되.

"궤가 벌써 물에 떳다.

물이 들면 가라앉으리니,

인제는 신체도 못 찾을레."

하면서 궤중에서 탄식한다.

"못 보겠다. 못 보겠다.

천 리 고향 백발 부모 홍안 처자 못 보겠다.

이 물 속에 죽다 한들 멱라수 아니어든 굴원의 소절 되며,

오강수 아니어든 자서의 충절 될까.

이름 없고 남 모르게 탐색 망신 죽게 되니 내 아니 잡놈인가.

이런 때 배가 지나가면 목숨이나 살아볼까."

이처럼 탄식 할 제, 사또 하인 부러 분부하되,

"너희들이 일시에 배 지나가는 듯이 소리하라."

하인들이 삼문을 삐득삐득 곤장을 뚝딱거리면서 어기여차 소리하니,

배 비장 궤 속에서 반겨 듣고 궁리하여 생각하되,

"삐득삐득하는 소리는 닻 감는 소리요,

출렁출렁하는 소리는 노 젓는 소리로다.

강동으로 가는 배 장한인가 날 살리오.

오백 인 싣고 입해 도중 빨리 가는 배 서불인가.

날 살리소. 기경 태백 소식 듣고 풍월 실어 가는 저 배 초강 어부냐.

날 살리오.

청산 만리 함께 가자.

일고주야 날 살리소.

원포고범 지나는 배 이 궤 실어 날 살리소."

궤중 고함 긴 소리로,

"거기 가는 저 배 말 좀 묻세."

곁에 있던 저 사령놈 사공인 체하고 썩 나서며,

"무슨말이오."

"거기 가는 배가 어디 배랍나."

"제주 배랍네."

"무엇 실었읍네."

"미역, 전복, 해삼 실었습네."

"가지말고 내 말 듣게."

"어, 무슨 말인가?"

"어렵지만 이 궤 좀 실어다가 죽은 사람 살려 주오."

한참 이리 수작 할 제 한 자가 나서며 하는 말이,

"무변 대해 저 수중에 궤중 언성 괴이하다.

우리 배에 부정탈라. 상앗대로 떠밀치라."

배비장 하는 말이,

"나 잡것 아니오. 사람이니 살려주오."

"사람이거든 거주 성명을 일러라."

"제주에 배 걸덕쇠요."

한 자가 나서며 이른 말이,

"제주라 하는 곳이 물색 지지라. 분명 유부녀 통간 갔다가 저 지경이 되었지."

"예, 옳소. 뉘신지 모르거니와 참 압니다."

하고, 그 중에도 좋아라구 하는 말이.

"하늘이 도우신가.

 헌원씨 배를 만들어 이제 불통 하온 뜼은 날 살리란 배 아닌가.

물에 죽을 나의 목숨 살려 적덕이니 적덕으로 날 살리오."

그 자가 하는 말이.

":우리 배에는 부정 탈까 못 올리겠고, 궤문이나 열어 줄 것이니 능히 헤어갈까"

"글랑은 염려 마오. 내가 용산 삼개(마포) 왕래할 제 개헤엄나치나 배웠소."

"이 물은 짠물이라 눈에 들면 멀 것이나 감고 헤자."

"눈은 생전 멀지라도 목숨이나 살려 주오."

그 자가 하는 말이,

"그런 지경이면 눈이 멀지라도 날 원망은 마시오."

하고 함정같이 잠긴 금거북쇠를 툭 쳐 열어놓으니,

배 비장 알몸으로 썩 나서며 그래도 소경 될까 염려하여

두 눈을 잔뜩 감으며 이를 악물고 왈칵 냅다 짚으면서 두 손을 헤우적헤우적 하여 갈 제,

한 놈이 나서며,

"이리 해라."

한참 이 모양으로 헤어갈 제 동헌 댓돌에다 대궁이를 딱 부딪치니,

배 비장이 눈에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뜨며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 앉았고 대청에 삼공형이며 전후좌우에 기생들과 육방 관속 노령배가

일시에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참는 것이 웃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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