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결혼 풍속
※ 본문설명
중국인들은 고구려인의 결혼에 관해서도 보고들은 바를 적어두었다, 그런데 초기의 기록과 후기의 기록이 다소 다르다. 아마도 고구려의 풍습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보고들은 지역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먼저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고유의 결혼 풍습이 있었다. 혼인이 결정되면,신부의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 조그만 집(서옥-사위의 집)을 짓는다. 사위될 사람이 저녁에 신부의 집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서 신부와 함께 자겠다고 간청한다. 간청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허락하고 서옥에서 자게 한다.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이렇게 혼인을 한 후 아이를 낳아 아이가 크게 자란 후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의 집안이 훨씬 우위에 놓인 결혼제도이다.
그런데 5세기 이후의 기록들에 보면 혼인을 할 때 재물이나 폐백을 드리지 않았고,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딸을 종으로 팔았다고 해서 몹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아울러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했으며,이럴 때 남자의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면 그만이고 재물을 보내서 맞는 예가 없다고 한다. 이같은 풍속에 대해 중국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음란한 것을 숭상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 혼인풍속이 여성중심에서 남성중심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서옥제와 같이 남성이 여성의 집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고서야 여자를 데려오는 풍속에서 탈피하여 쉽게 결혼하고, 여성의 집에서도 남성의 집에 무엇을 바라지 않는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여성측에서 폐백과 지참금을 준비하여야 하는 단계로 전환되는 중간 과정의 풍속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후기의 결혼풍속에서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 사는 집은 의당 남자의 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불교의 전파ㅡ 중국 문화의 흡수 등의 영향과 고구려가 팽창하면서 우대받기 시작한 무사계급 남성의 권위 향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결혼풍속 중에 특이한 것은 우씨왕후의 예에서 보듯 형이 죽으면 형수를 시동생이 돌봐주는 형사취수제도이다. 남성의 집안에서 일단 자기 집안에 들어온 여성노동력을 상실하지 않고 남성의 집안에 묶어두려는 경제적인 이해와 남편이 죽은 후 여성이 경제적 곤란에 처하게 될 상황을 구해주는 사회보장제도적 측면의 이해가 합치되면서 존속했던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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