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小獸林王)
■ ?∼384(소수림왕 14)
■ 고구려 제17대왕
■ 재위 371∼384
※ 본문설명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대의 대외진출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정책은 기왕의 부족적 관념체계를 극복하며,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위한 시책은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374년·375년·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그치지 않았으며, 또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과 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체제정비를 위한 일련의 시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 전문설명
고구려 17대 소수림왕(재위 371~384)이 즉위했을 때, 나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아버지 고국원왕은 371년 10월 23일(음력)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이 거느린 3만 군사의 공격을 막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16년간 태자로 지내면서 제왕학 수업을 받아온 그였지만 갑자기 닥친 현실은 당혹스러웠다. 아버지를 죽인 백제에 대한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주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군대의 사기는 꺾였으며 민심은 흩어져 있었다. 승산없는 복수전을 펼칠 수도, 그렇다고 마냥 울분에 젖어 지낼 수도 없었다. 국망(國亡)의 위기를 맞아 그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돌이켜보면, 시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보다 30여년전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참패를 당했다. 아버지인 고국원왕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겨우 목숨만 건졌다. 고국원왕은 선왕인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끌려갈 뿐 아니라, 왕모(王母)와 왕비를 포함한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지켜봐야 했다.
고국원왕은 전연에 대해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천왕의 시신은 다음 해에 돌려 받았으나 왕의 어머니는 13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백제는 북진을 감행했다. 이런 난국에 고국원이 어이없게 죽고 말았으니, 천손(天孫)을 자부하던 고구려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가는 일대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소수림왕은 이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줄 아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군주였다. 그가 보여준 행적과 정책은 소수림왕이 복수심조차 조절할 만큼 감정을 절제한, 뛰어난 지도자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삼국사기’는 그가 “몸이 장대하고 웅략(뛰어나고 큰 계략)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수림왕이 펼친 개혁 정책에는 그의 인물 됨됨이가 잘 나타나있다.
소수림왕은 먼저 급선무인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국 북조의 새로운 강국인 전진(前秦)과의 외교 교섭을 서둘렀다. 즉위 다음해인 372년 전진에서 보내온 승려와 불상 등을 받아들이고,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중국쪽의 침략을 막고, 강대국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중국의 문물 제도를 수용한 개혁이었다. 소수림왕의 개혁에는 귀화한 중국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고국원왕 대에 이미 중국에서 투항해온 동수(冬壽) 등이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던 터였다. 소수림왕의 개혁정책은 고구려의 백년대계를 다진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소수림왕 때의 고구려는 이미 압록강가 부여족의 나라를 벗어나, 낙랑군 등에 살던 중국계나 고조선계 주민은 물론 북중국의 혼란에 따라 투항한 이민족들까지 거느린 다종족 국가로 발전해있었다. 이런 현실은 고구려가 더이상 전통적인 5부의 부족적 통치나 관습법의 지배로 버텨나가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소수림왕은 국가적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활용, 다양한 종족들을 통합할 수있는 통치 제도와 신앙 체계의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다민족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보다 합리적인 한학(漢學) 소양을 갖춘 관리들이 필요했다. 372년 지배층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태학(太學)을 세운 것은 이때문이다. 새로운 행정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는 작업과 함께 그는 이듬해 중국의 율령(律令)을 받아들여 반포했다. 성문법에 의한 통치는 국가 통치가 체계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뤄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372년 불교를 받아들여 백성들에게 신앙을 권장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불교를 숭상하던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고구려내 어느 종족도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신앙을 통해 국가 통합을 이뤄내기위해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던 것이다.
천손(天孫)의 자손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에서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 통치 제도와 이념을 일시에 업그레이드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따랐을 것이며 고구려가 내세우던 전통의 훼손도 불을 보듯 뻔했다.
소수림왕은 보수층의 설득에 나섰다. 전통의 수호와 확립을 위해 역사서를 편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책 이름은 확인할 수없지만, 그의 재위 중에 고구려의 역사서가 편찬됐을 것이란 견해가 우세하다. 그의 다른 이름인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한 주몽이 시작한 건국사를 완성한 신화적 인물인 대무신왕의 원이름 해주류왕에서 따왔다. 소수림왕은 하늘의 아들 주몽의 건국을 이야기한 주몽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 추락한 왕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외래문화를 수용한 개혁에 대한 반발까지 무마하려고 시도한 것이다.소수림왕의 이런 개혁 정치는 즉위 초 2년 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나라의 위기를 반대파의 저항을 무마하는 계기로 활용하는, 절묘한 타이밍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다. 소수림왕의 개혁 정치는 고구려를 국망(國亡)의 위기에서 구해냈을 뿐아니라, 다음 시대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솟아오르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을 통해 이룩한 고구려 제국은 소수림왕의 개혁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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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海東高僧傳
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가지 檢討(李萬烈, 柳洪烈博士 華甲紀念論叢, 1971)
高句麗律令에 관한 一試論(盧重國, 東方學志 21,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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