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3.대무신왕(大武神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2:08

 

3.대무신왕(大武神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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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大武神王)

■ 4(유리왕 23)∼44(민중왕 1)
■ 고구려의 제3대왕
■ 재위 18∼44



※ 본문설명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4년(유리왕 33)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고, 이어 이웃의 구다왕국(句茶王國)의 항복을 받았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해왔으나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32년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을 공격하는 등 성장된 국력을 과시하면서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이해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44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의 그의 본기(本紀)에는 〈적오설화 赤烏說話〉· 〈부정설화 負鼎說話〉· 〈초인설화 草人說話〉· 〈이어설화 鯉魚說話〉·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보충설명

여러분 가운데는 유명한 만화이자 게임인 ‘바람의 나라’에 대해 잘 알고있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 주인공은 바로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호동 왕자입니다. 오늘은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줄게요.

서기 9년, 부여의 사신이 고구려에 와서 부여를 섬길 것을 요구하며 협박을 했습니다. 유리명왕과 신하들은 부여국의 막강한 힘에 눌려 그 요구에응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 때 나이 어린 왕자 무휼이 나타나 부여 사신에게 ‘양국간의 평화를 깨고 무리한 요구를 하여 전쟁을 원한다면 부여국 또한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고구려가 당당하게 부여에 맞설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난 부여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남에게 굽힐 수 없다는 무휼 왕자의 당당함은 고구려인을 변화시켜 싸움에나서게 되었습니다.

무휼 왕자는 숫자가 적은 고구려군을 학반령 아래에 몰래 숨겨 두었다가,부여의 대군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큰 공을 세운 무휼 왕자는 얼마 후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대무신왕이 되었답니다. 크고 굳센 신이란 뜻의 대무신(大武神)은 서양의 전쟁 신 아레스에 견줄 만한 이름입니다. 대단히 뛰어난 전쟁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용감한 대무신왕은 부친에게 수모를 준 부여를 정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떠납니다. 아직 고구려의 힘이 부여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대무신왕은 부여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을 모아 길을 나섰습니다. 이 때 괴유와마로 등의 장수들도 새롭게 대무신왕을 돕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부여에 도착한 고구려군은 부여군의 기습 총공격을 받았습니다. 대무신왕은 괴유로 하여금 앞장 서서 적과 싸우게 했습니다. 괴유는 부여 왕을 잡아 머리를 베는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괴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부여의 군대는 고구려군을 둘러싸고 계속 공격을 해왔습니다. 위기에 빠진 대무신왕과 고구려 군대는 짙은 안개가 끼자, 허수아비를 세워 부여군의 눈을 속여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엄청나게 많은 무기와 식량까지 버리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칠 만큼 철저히 패배했습니다. 대무신왕은 여러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성급한 판단 때문에 패배한 것이라며 용서를 빌고 고구려의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대무신왕의 정말 뛰어난 점은 용맹함보다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고구려인들은 다시 똘똘뭉쳐 고구려를 부활시킬 힘을 얻게 되었답니다.

반면, 부여는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누가 죽은 왕을 이어 다음 왕이될 것인가를 놓고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결국 부여 왕의 아우가 도망쳐서새롭게 갈사국을 세우기도 하고, 왕의 사촌 동생이 1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해 오기도 하는 등 부여국은 크게 힘이 약해졌습니다.

뜻하지 않은 부여의 혼란은 고구려가 강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고구려는 이후 낙랑국을 멸망시키는 등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랑국 멸망에는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비극적사랑 이야기가 전해 온답니다.

호동은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낳은 아들로 왕의 사랑을 받는 왕자였습니다. 호동 왕자는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낙랑국을 염탐하다가, 낙랑 왕의눈에 들어 낙랑의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동은 사랑에 빠진 낙랑 공주에게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울어 방비하게 하는 북과 피리를 부수라고 요구했습니다. 공주는 호동을 놓치기 싫어 나라를 배신하면서 북과피리를 부수었습니다. 호동은 대무신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낙랑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낙랑국의 항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랑 공주는 낙랑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낙랑 공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호동 왕자에게도 위기가 닥칩니다. 대무신왕이 큰 공을 세운 호동을 사랑하여 태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첫째 왕후는 자신의 자식이 다음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호동을 모함했습니다. 처음에는 왕후의 말을 믿지 않던 대무신왕도 마침내는 호동을 의심하여 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호동은 부모의 악함을 드러낼 수 없다며 변명을 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자기를 사랑한 낙랑 공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 때문에 사는 것이괴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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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志
後漢書
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李鍾旭, 全海宗博士 華甲紀念 史學論叢, 1979)


※ 본문출처 : [엠파스 한국학지식]
※ 보충출처 : [소년한국일보 2004-04-15 17:48:03]
※ 이미지출처 : [소년한국일보 2004-04-15 17: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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