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琉璃王)
■ ?∼18(유리왕 37)
■ 고구려 제2대 왕
■ 재위 서기전 19∼서기 18
※ 본문설명
▶ 주몽의 아들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이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부여에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고구려로 와서 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에는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고,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漢)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범하였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리궁(豆谷離宮)에서 사망하였으며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1년에 사망하여,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므로 자결시켰다. 그뒤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하였는데,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그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 유리왕과 동명성왕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에 있으며, 동명왕과 유리왕 사이의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 있어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주몽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그리고 제6대 태조왕 이후는 다시 고씨(高氏)로 되어 있다. 또,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주몽과 유리왕의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게 한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교체문제를 해결하여 줄 수 있는 주요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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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明王篇(李奎報)
高句麗國號考(李丙燾,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 3, 1956; 韓國古代史硏究, 1976)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金哲埈,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高句麗琉璃王小考(金龍善, 歷史學報 87, 198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就いて(池內宏, 東亞學 3, 1940; 滿鮮史硏究上, 1951)
▶유리왕묘 |
북경 서남쪽의 유리하(琉璃河) :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강' 북경 북쪽의 유리묘(琉璃廟) :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사당' 아래 글은 지난 9월 28일 국사편찬위원회 상고사 토론회에서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인 권철현 의원이 설명한 내용이다. ☞ 믿고 안믿고는 본인의 판단에 맡긴다. 강요할수는 없지 않은가 ? ☞ 권철현 의원 홈페이지 : http://www.chkwon.com/ →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여 무엇하리오... 진위 여부를 떠나 확인하고 왜 그러한지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지역은 고구려와 너무도 관련이 많은 지역이다. 삼국사기만 읽어보아도 그렇다는 말이다. 매식자들만 모르지.... 질의하신분 참고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국회의원 권철현) 유리왕묘 (#) 권철현의원 9.28 국편위 발언내용 고구려 유리왕의 무덤이 있다는 곳을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곳은 다름아닌 현재의 북경 유리하(琉璃河)였다. (북경 서남쪽, 아래 지도 참고) → (주) 북경 인근 중국 현재지도에도 존재하며 북쪽 유리묘(사당)에서는 마갑이 출토되었다 한다. →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이 국내에 들어와 그곳이 고구려 2대 유리왕의 묘라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거기서 노인 한 명을 만나서 유리왕 무덤 앞에 세 제단이 있었음을 들었는데, 그 제단의 이름을 들어보니 생생한 한국어로 각각 아바마마제단 어마마마제단 그리고 유리제단이었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리묘는 문혁(문화대혁명) 때 비석이 뽑히고 파헤쳐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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