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칠십에 능참봉”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나이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 하루에 거둥이 열아홉 번씩이라.” 는 속담을 줄인 것이다. 능참봉이란 왕릉을 관리하는 9품 말직의 관직이다. 70세의 노령까지 선비로만 머무르다가 마침내 능참봉이라는 관직을 얻어 명예롭고 영광스럽기만 할 줄 알았더니, 하루에도 열아홉 번이라 할 만큼 잦은 왕의 행차 때문에 고된 일만 많다는 뜻으로, 실속 없이 바쁜 상황을 빗댈 때 위와 같은 속담을 쓰곤 한다.
- 왕릉을 관리하는 공직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능권무직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세조가 관제개혁을 한 이후 능참봉직이 생겼다. 능참봉직은 비록 종9품에 해당하였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관료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의 청직(淸職)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능참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반의 신분이어야 했다. 보통 생원, 진사 혹은 유학 중에서 임명이 되었으며,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 『경국대전』에 따르면 7품 이하의 관리는 재직 근무일수가 450일이 되어야 다른 관직으로 옮겨갈 수 있다. 능참봉은 한 능에 두 사람이 배치되어 한 달에 보름씩 근무하였기 때문에 2년이 넘는 시간을 능 관리인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3~5개월을 근무하였다.
능참봉이 관리로서 받는 녹봉은 매달 29일 쌀 10두, 콩 5두로, 광흥창에서 수령할 수 있었다. 넉넉한 녹봉은 아니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종종 빚을 지기도 했다.
- 능참봉의 업무는 매우 다양하였다. 능에서 제례가 있으면 한 달 전쯤 축향(祝香)을 받으러 한양에 들렀다. 정자각이나 비각을 개수하고 사토를 수축하는 등의 큰 공사가 생기면 능역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 또한 모두 능참봉의 일이었다. 능참봉의 또 다른 직분은 능군을 관리하는 것이다. 능군은 능 주변에 위치한 마을에서 차출하였는데,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수호군은 능과 능 주변의 제초작업, 벌목을 금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능이 잘 관리되기 위해서는 수호군의 작업에 달려있었기에 능참봉은 수호군의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