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산

오늘의 쉼터 2008. 5. 25. 22:21

* 하늘의 창조적 힘 갈무리

 

  산천재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나 그의 세계관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나 동시대인 혹은 제자들이 쓴 글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땅을 택하여 살았는지를 보는 방법도 있는데, 풍수에서는 살았던 터를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본다면 이는 당연한 말이다.

인간과 대지는 혈연관계로 서로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와 무덤도 한 가지 좋은 예다. 남명의 터잡기(卜地)에

대한 공식 기록은 성운이 지은 묘갈문(墓碣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갈문에 의하면 “남명은 61세 때 지리산에 산천재를 짓고 깊이 잠기어 스스로

닦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72세에 운명하여, 산천재 뒷산에 안장되었다”

(현재 행정구역명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고 적고 있다.

남명 선생이 터를 잡고 건 편액(扁額) ‘산천재’는 주역 대축괘(大畜卦)에서 유래한다.

대축이란 크게 저축한다는 뜻이다.

대축괘는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山), 건괘가 천(天)을 나타내

‘산천(山天)’이란 용어가 생겨난다.

‘山天’으로 꾸며지는 이미지는 ‘하늘이 가운데 있는 모습’이다.

또한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止)’, 천은 ‘창조적인 힘’이란 속성을 갖는다.

이 둘의 속성을 다시 합성해보면 ‘산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는

뜻이 된다. 산천재란 바로 그와 같은 집을 말한다.

산천재 뒷산에 안장되어 있는 남명의 무덤은 어떨까? 지리산 천왕봉의 한 줄기가

거침없이 곧장 내려와 산천재를 지척에 두고 멈춘 곳에 무덤이 자리한다.

곁가지 없이 산줄기 저 혼자 내려온다.

산능선이 높고 곁가지 하나 없는 만큼 무덤 좌우가 아찔할 만큼 깊어 보인다.

독야청청의 기세라고 할까, 소심한 현대인들은 결코 쓸 수 없는 자리다.

‘안으로는 하늘의 창조적 힘을 갈무리하고, 바깥으로는 산과도 같이 중후하게

있는 모습’을 우리는 남명의 무덤 터에서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남명의 위대한 터잡기가 최근 들어 일부 몰지각한 풍수들에 의해 훼손

되고 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풍수들이 검증·고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사실

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성현들의 묘나 유적지에 대한 풍수 해설이 쏟아져나오는데 상당 부분 고증되지

않은 내용으로, 더러는 성현들의 위대함을 훼손하는 ‘막말’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풍수학을 하는 이로서 당혹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남명 선생의 모덤(왼쪽)과 입상.

 

얼마 전 풍수 답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산천재의 의미와 남명의 터잡기에 대해

설명하는데 학생 하나가 “남명 선생의 무덤 은 명당이 아니라던데 요?”라고 했다.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 하는 필자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높아졌던지 움찔해진

학생이 “인터넷에 올려진 글을 보았는데 남명과 이황, 율곡의 묘는 묘도 아니라고

해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래서!”

“….”

“그분들은 성리학의 대가이지 풍수 전문가가 아니라고….”

더는 학생을 탓할 수도 없어서 목소리를 낮추어 마무리를 지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무책임한 말들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잘못도 있지만, 풍수의자연관을

모르고 자기가 아는 천박한 지식으로 무책임하게 지껄이는 시중 술사들의 잘못이 더 크다.

한 시대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 한 분의 터잡기를 일개

시중의 술사가 평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 자리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산천재와 그의 무덤이 몇 백년이 가도 의연 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겠으며, 남명의 위대함이 시간이 갈수록 더 빛을 발하 겠는가.

시중의 이른바 지관입네 하는 이들이 비난받는 이유가 대부분 바로 그와 같은 짓  때문이다. 풍수란 땅을 해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곳에 터를 잡았던 옛 성현들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읽으면서 그들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다. 겸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