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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한민족 9천년의역사
*환국 환인계표(BC 7198년 ~ BC 3898년)
왕명 : 환인(桓仁) - 7대 3301년(환기 1 ~ 3301, BC7198 ~
대 |
왕 명 |
즉위년도(환기-B.C) |
약 사 |
1 |
안파견(安巴堅) |
1-BC7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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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혁 서(赫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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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만리에 환국의 법을 전한 광서제가 있었다. |
3 |
고시리(古是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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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수명) |
4 |
주우양(朱于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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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귀리가 있어 동방 삼역에 삼의법을 전함. |
5 |
석제임(釋提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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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구을리(邱乙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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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를 올리는 "소도제천"시작.삼묘산 아래에 "서자부(庶子部)"를 세웠음."아랑 아랑 아르리 아르이고"천해를 떠나면서 부른 노래 |
7 |
지위리(智爲利) |
3301-BC3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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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 한웅(桓雄) ,천왕(天王 ) - 18대 1565년 (한기 3301 ~ 4866, BC3898 ∼ BC2333)
대 |
왕 명 |
즉위년도 (한기-B.C) |
재위 기간 |
약 사 |
1 |
거발한(居發桓) |
3301-BC3898 |
94 |
한인의 명을 받고 한웅께서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의 나무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
2 |
거불리(居佛理) |
3394-BC3804 |
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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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우야고(右耶古) |
3480-BC3718 |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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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모사라(慕士羅) |
3579-BC3619 |
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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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태우의(太虞儀) |
3686-BC3512 |
93 |
12아들중 막내 아들이 복희
(중국시조3황중1인)이다.
여와씨는 딸 |
6 |
다의발(多儀發) |
3779-BC3419 |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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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거 련(居連) |
3877-BC3321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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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안부련(安夫連) |
3958-BC3240 |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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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양 운(養雲) |
4031-BC3167 |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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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갈 고(葛古) |
4127-BC3071 |
100 |
독로한 |
11 |
거야발(居耶發) |
4227-BC2971 |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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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주무신(州武愼) |
4319-BC2879 |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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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사와라(斯瓦羅) |
4424-BC2774 |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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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자오지(慈烏支) |
4491-BC2707 |
109 |
일명 치우천왕.황제 헌원과의
10년 73회의 전쟁을 모두승리로 이끌고 헌원을 복속시킴.
중원 최고의 전쟁신으로 오늘날까지 추앙 받고 있다. |
15 |
치액특(蚩額特) |
4600-BC2598 |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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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축다리(祝多利) |
4689-BC2509 |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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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혁다세(赫多世) |
4745-BC2453 |
72 |
일명 홍제 |
18 |
거불단(居弗檀) |
4817-BC2381 |
48 |
일명 단웅(檀雄).단군왕검은
단웅의 아들이다. |
단군조선으로 (4865-BC2333) |
왕명 :단군(檀君),천자(天子),천왕(天王),천제(天帝)-47대 2096년(한기4865 ∼ 6960, BC2333 ∼ BC238)
대 |
왕 명 |
즉위년도 (한기-B.C) |
재위기간 |
약 사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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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5-BC2333) |
93 |
단웅과 웅씨녀사이에서 태어남. 신인 왕검이 무진년(b.c.2333) 오가와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러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니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다.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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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8-BC2240) |
58 |
BC2239 소련 대련 3년상.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듬.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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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6-BC2182) |
45 |
일명 읍루. 삼랑 을보록이 정음38자(가림토 문자) 제작.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이 배달유기를 편수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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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1-BC2137) |
38 |
산삼발견.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 을 몽골리한(한은 임금의 뜻)으로 봉하다.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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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9-BC2099) |
16 |
양가(羊加)구을이 즉위.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듬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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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5-BC2083) |
36 |
우가(牛加)인 달문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이음 .육십갑자 사용(BC2096)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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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1-BC2047) |
54 |
양가(羊加)인 한율이 즉위.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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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5-BC1993) |
8 |
우가인 서한 즉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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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3-BC1985) |
35 |
양가(羊加).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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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8-BC1950) |
59 |
우가인 노을이 즉위. 신원목(신문고와 같은 역할) 설치(BC1946)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중국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팡괴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괘의 시초라 하고 삼서성의 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 같은 것이었다.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천문대)을 두었다.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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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7-BC1891) |
57 |
우가(牛加).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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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4-BC1834) |
52 |
우가 아한이 즉위.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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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6-BC1782) |
61 |
우가 흘달이 즉위.대음달. 하 정벌. 무술 5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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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7-BC1721) |
60 |
우가인 고불이 즉위.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1억 8천만인 이였다.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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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7-BC1661) |
51 |
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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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5588-C1610) |
58 |
우가인 위나가 즉위.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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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6-BC1552) |
68 |
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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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4-BC1484) |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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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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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3-BC1435) |
55 |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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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8-BC1380) |
43 |
우가인 고흘이 즉위.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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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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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1-BC1337) |
52 |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 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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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3-BC1285) |
48 |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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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1-BC1237) |
76 |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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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7-BC1161) |
11 |
태자 연나가 즉위하여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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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8-BC1150) |
88 |
영나의 아우.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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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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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6-BC1062) |
65 |
태자 추로가 즉위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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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1-BC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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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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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7-BC971) |
28 |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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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5-BC943) |
34 |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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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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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9-BC909) |
35 |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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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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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4-BC874) |
25 |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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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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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9-BC849) |
30 |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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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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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9-BC819) |
24 |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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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3-BC795) |
23 |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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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6-BC772) |
68 |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
36 |
|
(6494-BC704) |
58 |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일본 서기는 이사람을 神武王(신무왕)이라며 건국시조로 날조하여 떠받들고 있다.]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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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2-BC646) |
56 |
|
38 |
|
(6608-BC590) |
45 |
|
39 |
|
(6653-BC545) |
36 |
|
40 |
|
(6689-BC509) |
18 |
|
41 |
|
(6707-BC491) |
20 |
|
42 |
|
(6727-BC471) |
10 |
|
43 |
|
(6737-BC461) |
36 |
을묘 3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장당경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
44 |
|
(6773-BC425) |
29 |
병진 원년(BC 425) 3월 우화충을 죽임.백민성의 욕살구믈 즉위.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
45 |
|
(6802-BC396) |
55 |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
46 |
|
(6857-BC341) |
46 |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고열가가 43대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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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3-BC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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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2,096년이라 임술 57년고열가 단제께서 조선 폐관하시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 |
| | |
4.북부여(고구려) 왕계표 (BC 239∼BC 58)
대 |
왕 명 |
|
약 사 |
1 |
|
(6959-BC239) |
본래 고리국 사람으로. 즉위 8년(B.C232년)에 五加(오가)들에 의해 단군으로 추대됨.
사) 신천지 역사가 열리는 결정적 분기점. |
2 |
모수리(慕漱離) |
(7004-BC194) |
|
3 |
고해사(高奚斯) |
(7029-BC169) |
|
4 |
고우루(高于婁) |
(7078-BC120) |
해우루(解于婁) |
5 |
고두막(高豆莫) |
(7090-BC86) |
동명(東明), 졸본사람. 7090(BC108)년에 즉위하더니, 이때에 부여를 계승하였다.
사) 한나라 무제를 의병으로 격퇴. 중심인물이 고두막한. 몽고에서는 고두막한을 따로 모심. 역사가 살아있다는 증거. |
6 |
고무서(高無胥) |
(7139-BC59) |
|
7 |
고주몽(高朱蒙) |
(7138-BC58) |
해모수의 아들 고구려후 고진의 3세손으로 고무서의 사위로 이어서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이다. |
* 일반적으로 1대에서 4대까지를 북부여 5대 이후를 졸본부여라 나누어 부른다.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
존칭명 : 단군 - 3대 108(환기7112 ~ 7219, BC86∼AD22)
대 |
왕 명 |
즉위년도 (환기-B.C) |
재위기간 |
약 사 |
1 |
해부루(解夫婁) |
(7112-BC86) |
39 |
7,111년 고우루가 죽자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두막에게 쫓기어 가섭원에 나라를 열었다. |
2 |
금와(金蛙) |
(7151-BC47) |
41 |
|
3 |
대소(帶素) |
(7192-BC8) (망7219-AD22) |
30 |
7,219(AD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 |
5.고구려 왕(열제)계표(BC37∼서기668)
고구려시대(高句麗, B.C 37 ~A.D 668, 705년간, 총28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동명성왕 (東明聖王)
[B.C 58~19] |
B.C 37 ~ B.C 19 |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 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
2 |
유리왕
(榴璃王)
[?~18] |
B.C 19 ~ A.D 18 |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王) |
3 |
대무신왕
(大武神王)[ 4~44] |
18~44 |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
4 |
민중왕
(閔中王)
[ ?~48] |
44~48 |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
5 |
모본왕
(慕本王)
[ ?~53] |
48~53 |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
6 |
국조왕
(國祖王) [47~165] |
53~146 |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
7 |
차대왕
(次大王) [71~165] |
146~165 |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
8 |
신대왕
(新大王) [89~179] |
165~179 |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
9 |
고국천왕
(故國川王)
[ ?~197] |
179~197 |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
10 |
산상왕
(山上王)
[?~?] |
197~229 |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
11 |
동천왕
(東川王)
[ ?~248] |
227~247 |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동양왕(東襄) |
12 |
중천왕
(中川王)
[ ?~270] |
247~270 |
동천왕의 아들 |
13 |
서천왕
(西川王)
[ ?~292] |
270~292 |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
14 |
봉상왕
(烽上王)
[ ?~300] |
292~300 |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 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
15 |
미천왕
(美川王)
[ ?~331] |
300~330 |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
16 |
고국원왕
(故國原王)
[ ?~371] |
331~371 |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
17 |
소수림왕
(小獸林王)
[ ?~384] |
371~384 |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 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함 |
18 |
고국양왕
(故國壤王)
[ ?~391] |
384~391 |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
19 |
광개토대왕
(廣開土王)[ 374~413] |
391~413 |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영락대왕(永樂) |
20 |
장수왕
(長壽王) [394~490] |
413~490 |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
21 |
문자명왕
(文咨明王)
[?~519] |
491~519 |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
22 |
안장왕
(安藏王)
[?~531] |
519~531 |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
23 |
안원왕
(安原王)
[ ?~545] |
531~545 |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
24 |
양원왕
(陽原王)
[ ?~559] |
545~559 |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
25 |
평원왕
(平原王)
[?~590] |
559~590 |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
26 |
영양왕
(瓔陽王)
[ ?~618] |
590~618 |
휘는 원(元). 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섬멸 하였음.평양왕(平陽) |
27 |
영류왕
(榮留왕)
[?~641] |
618~641 |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
28 |
보장왕
(寶藏王)
[?~681] |
642~668 |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6.백제 왕 계표( B.C 18~ AD 660년)
백제시대(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온조왕(溫祚, ?~28) |
B.C 18~A.D 29 |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
2 |
다루왕(多婁, ?~77) |
28~77 |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
3 |
기루왕(己婁, ?~128) |
77~128 |
다루왕의 맏아들. |
4 |
개루왕(蓋婁, ?~166) |
128~166 |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
5 |
초고왕(肖古, ?~214) |
166~214 |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
6 |
구수왕(仇首, ?~234) |
214~234 |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 수왕. |
7 |
사반왕(沙泮) |
234 |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
8 |
고이왕(古爾, ?~286) |
234~286 |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
9 |
책계왕(責稽, ?~298) |
286~298 |
고이왕 아들. |
10 |
분서왕(汾西, ?) |
298~304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
11 |
비류왕(比流, ?~344) |
304~344 |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
12 |
설왕( ,?~346) |
344~346 |
분서왕의 맏아들 |
13 |
근초고왕(近肖古, ?~375) |
346~375 |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
14 |
근구수왕(近仇首, ?~384) |
375~384 |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
15 |
침류왕(枕流, ?~385) |
384~385 |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
16 |
진사왕(辰斯, ?~392) |
385~392 |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
17 |
아신왕(阿莘, ?~405) |
392~405 |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
18 |
전지왕(琠支, ?~420) |
405~420 |
아신왕의 아들. |
19 |
구이신왕(久爾辛, ?~427) |
420~427 |
전지왕의 맏아들 |
20 |
비유왕(毘有, ?) |
427~454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
21 |
개로왕(蓋鹵, ?~475) |
455~475 |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
22 |
문주왕(文周, ?~477) |
475~477 |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
23 |
삼근왕(三斤, ?) |
477~479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
24 |
동성왕(東城, ?~501) |
479~501 |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
25 |
무령왕(武寧, ?~523) |
501~523 |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
26 |
성왕(聖, ?~554) |
523~554 |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
27 |
위덕왕(威德, ?~598) |
554~598 |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
28 |
혜왕(惠, ?~599) |
598~599 |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
29 |
법왕(法, ?) |
599~600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 을 착수함. |
30 |
무왕(武, ?~641) |
600~641 |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 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
31 |
의자왕(義慈, ?~660) |
641~660 |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7.신라 왕계표(B.C57~ AD 935년)
신라시대(新羅, B.C.57~935, 992년간, 총 56대) 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代 |
왕명 |
재위기간 |
성 |
약사 |
1 |
|
BC57~AD4 |
朴 |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
2 |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
4~24 |
朴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
3 |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
24~57 |
朴 |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
4 |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
57~80 |
昔 |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
5 |
파사이사금 (婆娑, ?~112) |
80~112 |
朴 |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
6 |
지마이사금(祗摩, ?) |
112~134 |
朴 |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
7 |
일성이사금(逸聖, ?) |
134~154 |
朴 |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
8 |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
154~184 |
朴 |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 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
9 |
벌휴이사금(伐休, ?~196) |
184~196 |
昔 |
탈해왕의 손자 |
10 |
나해이사금(奈解, ?~230) |
196~230 |
昔 |
벌휴왕의 손자. |
11 |
조분이사금(助賁, ?~247) |
230~247 |
昔 |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
12 |
첨해이사금(沾解, ?~261) |
247~261 |
昔 |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
13 |
미추이사금(味鄒, ?~284) |
262~284 |
金 |
김씨 왕가의 시조 |
14 |
유례이사금(儒禮, ?~298) |
284~298 |
昔 |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
15 |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
298~310 |
昔 |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
16 |
흘해이사금(訖解, ?~356) |
310~356 |
昔 |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
17 |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 |
356~402 |
金 |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
18 |
실성마립간(實聖, ?~417) |
402~417 |
金 |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
19 |
눌지마립간(訥祗, ?~458) |
417~458 |
金 |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
20 |
자비마립간(慈悲, ?~479) |
458~479 |
金 |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
21 |
소지마립간(炤知, ?) |
479~500 |
金 |
|
22 |
지증왕(智證, 437~514) |
500~514 |
金 |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
23 |
법흥왕(法興, ?) |
514~540 |
金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
24 |
진흥왕(眞興, 534~576) |
540~576 |
金 |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
25 |
진지왕(眞智, ?) |
576~579 |
金 |
휘는 사륜(舍輪) |
26 |
진평왕(眞平, ?~632) |
579~632 |
金 |
휘는 백정(白淨) |
27 |
선덕여왕(善德, ?) |
632~647 |
金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
28 |
진덕여왕(眞德, ?~654) |
647~654 |
金 |
휘는 승만(勝蔓) |
29 |
무열왕(武烈, 604~661) |
654~661 |
金 |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
30 |
문무왕(文武, ?~681) |
661~681 |
金 |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
31 |
신문왕(神文, ?~692) |
681~691 |
金 |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
32 |
효소왕(孝昭, 643~702) |
692~702 |
金 |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
33 |
성덕왕(聖德, ?~737) |
702~737 |
金 |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
34 |
효성왕(孝成, ?~742) |
737~742 |
金 |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
35 |
경덕왕(景德, ?~765) |
742~765 |
金 |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
36 |
혜공왕(惠恭, 765~780) |
765~780 |
金 |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
37 |
선덕왕(宣德, ?~785) |
780~785 |
金 |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
38 |
원성왕(元聖, ?~798) |
785~798 |
金 |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
39 |
소성왕(昭聖, ?~800) |
798~800 |
金 |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
40 |
애장왕(哀莊, 788~809) |
800~809 |
金 |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
41 |
헌덕왕(憲德, ?~826) |
809~826 |
金 |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
42 |
흥덕왕(興德, ?~836) |
826~836 |
金 |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 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
43 |
희강왕(僖康, ?~838) |
836~838 |
金 |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
44 |
민애왕(閔哀, ?~839) |
838~839 |
金 |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
45 |
신무왕(神武, ?~839) |
839 |
金 |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
46 |
문성왕(文聖, ?) |
839~857 |
金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
47 |
헌안왕(憲安, ?~861) |
857~861 |
金 |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
48 |
경문왕(景文, ?~875) |
861~875 |
金 |
휘는 응렴(膺廉) |
49 |
헌강왕(憲康, ?~886) |
875~886 |
金 |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
50 |
정강왕(定康, ?~887) |
886~887 |
金 |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
51 |
진성여왕(眞聖, ?~897) |
887~897 |
金 |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
52 |
효공왕(孝恭, ?~912) |
897~912 |
金 |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
53 |
신덕왕(神德, ?~917) |
913~917 |
朴 |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
54 |
경명왕(景明, ?~924) |
917~924 |
朴 |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
55 |
경애왕(景哀, ?~927) |
924~927 |
朴 |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
56 |
경순왕(敬順, ?~978) |
927~935 |
金 |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8.발해 왕계표(渤海, 서기 698 ~ 서기 926)
발해(渤海, 699~926 , 227년간, 총15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
699-719 |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
2 |
무왕(武, ?~737) |
719~737 |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당나라를 공격함. |
3 |
문왕(文, ?~?) |
737~793 |
휘는 대흠무(大欽茂).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씀. |
4 |
대원의(大元義, ?~794) |
793~794 |
|
5 |
성왕(成, ?~795) |
794~795 |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김. |
6 |
강왕(康, ?~809) |
795~809 |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
7 |
정왕(定, ?~813) |
809~812 |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함. |
8 |
희왕(僖, ?~817) |
812~817 |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
9 |
간왕(簡, ?~818) |
817~818 |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
10 |
선왕(宣, ?~830) |
818~830 |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
11 |
대이진(大彛震, ?~858) |
830~858 |
선왕의 손자.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침. |
12 |
대건황(大虔晃, ?~871) |
858~871 |
|
13 |
대현석(大玄錫, ?~892) |
871~894 |
|
14 |
대위해(大瑋?, ?~906) |
894~906 |
|
15 |
대인찬(?~926) |
906~926 |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
고려시대(高麗, 918~1392, 473년간, 총 34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877~943) |
918~943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
2 |
혜종 (惠宗, ?~945) |
943~945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
3 |
정종(定宗, 923~949) |
945~949 |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
4 |
광종(光宗, 925~975) |
949~975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
5 |
경종(景宗, 955~981) |
975~981 |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
6 |
성종(成宗, 960~997) |
981~997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7 |
목종(穆宗, 980~1009) |
997~1009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현종(顯宗, 992~1031) |
1009~1031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
9 |
덕종(德宗, 1016~34) |
1031~1034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
10 |
정종(靖宗, 1018~46) |
1034~1046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11 |
문종(文宗, 1019~83) |
1046~1083 |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
12 |
순종(順宗, 1046~1083) |
1083 |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선종(宣宗, 1049~1094) |
1083~1094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헌종(獻宗, 1084~1097) |
1094~1095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15 |
숙종(肅宗, 1054~1105) |
1095~1105 |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예종(睿宗, 1079~1122) |
1105~1122 |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
17 |
인종(仁宗, 1109~1146) |
1122~1146 |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18 |
의종(毅宗, 1124~1173) |
1146~1170 |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명종(明宗, 1131~1202) |
1170~1197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
20 |
신종(神宗, 1144~1204) |
1197~1204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21 |
희종(熙宗, 1181~1237) |
1204~1211 |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
22 |
강종(康宗, 1152~1213) |
1211~1213 |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고종(高宗, 1192~1259) |
1213~1259 |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24 |
원종(元宗, 1219~1274) |
1259~1274 |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25 |
충렬왕(忠烈, 1236~1308) |
1274~1308 |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충선왕(忠宣, 1275~1325) |
1308~1313 |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
27 |
충숙왕(忠肅, 1294~1339) |
1313~30, 32-39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
28 |
충혜왕(忠惠, 1315~1344) |
1330~32, 39-44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
29 |
충목왕(忠穆, 1337~1348) |
1344~1348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
30 |
충정왕(忠定, 1337~1352) |
1348~1351 |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
31 |
공민왕(恭愍, 1330~74) |
1351~1374 |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 (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
32 |
우왕(禑, 1364~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창왕(昌, ?)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
34 |
공양왕(恭讓,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10.조선 왕계표(서기 1398 ~ 1910)
조선시대(朝鮮, 1392~1910, 518년간, 총 27대)
代 |
왕명 |
재위기간 |
약사 |
1 |
태조(太祖, 1335~1408) |
1392~1398 |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2 |
정종(定宗, 1357~1419) |
1398~1400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3 |
태종(太宗, 1369~1422) |
1400~14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4 |
세종(世宗, 1397~1450) |
1418~1450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5 |
문종(文宗, 1414~1452) |
1450~145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6 |
단종(端宗, 1441~1457) |
1452~1455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7 |
세조(世祖, 1417~1468) |
1455~1468 |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
8 |
예종(睿宗, 1441~1469) |
1468~1469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9 |
성종(成宗, 1457~94) |
1469~1494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10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
1494~1506 |
|
11 |
중종(中宗, 1488~1544) |
1506~1544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
12 |
인종(仁宗, 1515~1545) |
1544~1545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
13 |
명종(明宗, 1534~1567) |
1545~1567 |
|
14 |
선조(宣祖, 1552~1608) |
1567~1608 |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15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
1608~1623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16 |
인조(仁祖, 1595~1649) |
1623~1649 |
|
17 |
효종(孝宗, 1619~1659) |
1649~1659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8 |
현종(顯宗, 1641~1674) |
1659~1674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19 |
숙종(肅宗, 1661~1720) |
1674~1720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 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20 |
경종(景宗, 1688~1724) |
1720~172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21 |
영조(英祖, 1694~1776) |
1724~1776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문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22 |
정조(正祖, 1752~1800) |
1776~1800 |
휘는 산.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
23 |
순조(純祖, 1790~1834) |
1800~18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24 |
헌종(憲宗, 1827~1849) |
1834~1849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25 |
철종(哲宗, 1831~1863) |
1849~1863 |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26 |
고종(高宗, 1852~1919) |
1863~1907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일어남. |
27 |
순종(純宗, 1874~1926) |
1907~1910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11. 대한민국 대통령 승계표
대한민국(大韓民國, 1945 ~현재 )
代 |
대통령 |
재임기간 |
본관 |
약사 |
1 |
이승만(李承晩, 1875.03.26~1965.07.19) |
1948. 7~1952. 8 |
전주 |
|
2 |
1952. 8~1956. 8 |
|
3 |
1956. 8~1960. 4 |
|
과도내각 |
허정(許政, 1896~1988) |
1960. 4~1960. 8 |
김해 |
|
4 |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1960. 8~1963.12 |
해평 |
|
5 |
박정희(朴正熙, 1917.11.14~1979.10.26) |
1963.12~1967. 6 |
고령 |
|
6 |
1967. 7~1971. 6 |
|
7 |
1971. 6~1972.12 |
|
8 |
1972.12~1978.12 |
|
9 |
1978.12~1979.10 |
|
10 |
최규하(崔圭夏, 1919.07.16~2006.10.22) |
1979.12~1980. 8 |
강릉 |
|
11 |
전두환(全斗煥, 1931.01.18~) |
1980. 8~1981. 2 |
정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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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981. 2~1988.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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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노태우(盧泰愚, 1932.12.4~) |
1988. 2~1993. 2 |
교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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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김영삼(金泳三, 1927.12.20~) |
1993. 2~1998. 2 |
김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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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김대중(金大中, 1924.01.06~2009.08.18) |
1998. 2~2003. 2 |
김해(가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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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노무현(盧武鉉, 1946.08.06~2009.05.23) |
2003. 2~2008. 2 |
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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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이명박(李明博,1941.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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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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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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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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