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역대왕계

◈단군조선

오늘의 쉼터 2008. 5. 14. 22:06

 

 

단 군 조 선

초대 단군왕검(제위 93 년)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雄氏)의 왕녀이며

신묘(B.C.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엿다.

무진(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떼에 단국(檀國)으로 부터 아사달의 단목(檀木)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戊辰元年 B.C.2333),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저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서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원(上月)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써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三神)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하느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뜻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잘 쓰일 수가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아들여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 되고 효도함이니라.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 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읽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들을 사랑할지니라.

 저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한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

이에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는 일을 맡기셨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셨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 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帝)께서는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공덕을 기린 비석이 있다.

무오 51년(B.C.2283), 임금께서 운사이신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바로 그것이다.

갑술 67년(B.C.22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에서 우사공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와 영주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경자 93년(B.C.2241), 단군께서 버들궁궐에 계셨는데 흙제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은물건들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10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덮어서 멀리 탐랑에 까지 미쳤으니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 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서 붕어 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多福)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살피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과 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량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제순유우가 유주 영주의 두 주를 남국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 시고, 동무와 도라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 하였다.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은 크게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것이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마음으로 똑같아라.
어아,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임인 2년(B.C.2239), 단제께서는 소련과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치루었으니,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석 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로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 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것으로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써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계묘 3년(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 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하였다.

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도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단위에 올려 놓앗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이 새로 즉위 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B.C.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도를 물어셨다.

보륵은 엄지 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 손을 올려 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뒤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 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九桓)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 길은아비되려는 자는 아비답게 하고, 임금되고자 하는 이는 임급답게 하고,

스승되고자 하는 이는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는 이는 아들답게 하고,

 신하되고자 하는 자는 신하답게 하고, 제자되고자 하는 이는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진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 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7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에는 종훈이 있고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라.

이를 거발한이라 하며 구한(九桓)에게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같이 되었다.

경자 2년(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 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신축 3년(B.C.2180), 신지인고을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B.C2177), 열얄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갖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B.C.2175),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무신 10년(B.C.2173),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 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 하다가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서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B.C.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 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48년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골리한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이를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후 신선불사의 설은 삼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무자 5년(B.C.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경인 7년(B.C.2131), 배만드는 곳을 살수의 상류에 설치 했다.

임인 19년(B.C.2119),하나라 왕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 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령하여 람.진.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는 붕어 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 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계해 2년(B,C.2098), 5월 노란 벌레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찼다.

단제께서 친히 벌레들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

기사 8년(B,C.2092), 인도 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정축 16년(B.C.2084),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단을 봉축하고 많은 한화를 심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하시니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 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무인 원년(B,C.2083)

임자 35년(B.C.2049), 모든 한(汗)들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 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아침 해를 먼저 받는 동녘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세상에 임하셨네.

하느님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신들이 한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 수 없었네.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九桓)을 움직이더라.

어수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는 새롭기만 하더라.

 원한 있는 자 먼저 원한 풀고, 병 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유신되리라.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 추, 저울 그릇과 같음이라.

저울 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 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 이루어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며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을 일어났다가는 망하는 버브 홍폐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을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
마침내 뭇 한(汗)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대저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의 오훈, 신시의 오사를 가지고 끝없이 지켜나갈 일로 삼는도다.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하고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니,

농사는 사람 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아울러 사형과 남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화를 입을 일을 없앴다.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의 경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이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들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곳이었다.
계축 36년(B.C.2048), 단제께서는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갑인 원년(B.C.2047)

정미 54년(B.C.1994),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신 원년(B.C.1993),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기유 2년(B.C.1992),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패였다.

신해 4년(B.C.1990), 단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나라의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세를 고쳤다.

갑인 7년(B.C. 1987),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의 길이가 석 자나 되었다고 한다.

을묘 8년(B.C.198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술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병진 원년(B.C.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길,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하여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진 자를 그냥 놔 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졌던 사람도 마침내는 그 덕에 감화되었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정사 2년(B.C.1984),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법하니,

단제께서 상춘으로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에 창건하게 하시었다.

우지와 우율 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 버리도록 하시고는 3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경인 35년(B.C.195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신묘 원년(B.C.1950),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진 2년(B.C.1949),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을미 5년(B.C.1946),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사는 이들까지 기뻐하였다.

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미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기축 59년(B.C.1892),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9년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의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에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생각하옵건데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였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시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 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사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병도 없이 장수하며 굶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고는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라츰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情)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다.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한웅의 보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이라고 하였다.

사흘 동안 재계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듯 했다.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움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정사 28년(B.C.1864),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이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물건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B.C.1854), 백성들 가운 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을해 46년(B.C.1864),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재주를 관람하시었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시어 천부경에 대해서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

오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 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술 57년(B.C.1835),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동안 근신하며 온누리에 음악, 노래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했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정해 원년(B.C.1834)

무자 2년(B.C. 1833), 여름에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셨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 여흥성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를 한 수 읊었다.

이는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뿍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 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 1806),

청아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무인 52년(B.C.1738),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B.C.1782)

갑오 16년(B.C.1767),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을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누리에 넘쳤다.

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 하였다.

무술 20년(B.C.1763), 소도를 만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무진 50년(B.C.1733),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B.C.1722),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백성들 모두 밥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를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시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 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하고 우가인 고불이 즉위했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1721)

을유 6년(B.C.1716),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 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크다 하느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인데,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추어 구제하게 하소서"하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 5천만인이었다.

기묘 16년(B.C.1662),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또는 후홀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B.C.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 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 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에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B.C.1652) 단제께서는 서쪽 얄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과 고유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오니 염수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B.C.1622),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B.C.1622),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경오 51년(B.C.1611),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우가인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1610)

무술 28년(B.C.1583),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 지냈으니

 하느님,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셨다.

닷새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서 춤을 추며 애한을 함께 노래했다.

애한이란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진 5년(B.C.155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1552)

갑신 52년(B.C.1501)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러 푸른 도포를 압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리며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면서 선인의 백성이 되러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B.C.148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1484)

병신 20년(B.C.1456), 지백특(支伯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B.C.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1435)

기축 24년(B.C.1412),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돌아왔다.

기미 54년(B.C.1382), 지리숙리 주전력과 '팔괘상중론'을 짓다.

경신 55년(B.C.138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1380)

신미 11년(B.C.1370)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B.C.1345)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B.C.1341) 공공인 공홀이 구한(九桓)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B.C.1341)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1337) 은나라 왕 소을(B.C.1349-1339)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B.C.1289),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 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으로 봉해줄것을 청햇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허락하였다.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 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 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 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사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라 부리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 여러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 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 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재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엔 몸소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B.C.1280), 신지인 육우는 "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 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白岳山)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하건데, 성을 쌓으시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소서"라고 상주하였으니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길,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찌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하시었다.

을묘 20년(B.C.1266) 이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빈, 기 지방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는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B.C.1250),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밑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해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계미 48년(B.C.1238),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령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에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B.C.1236),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여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서책을 부수고 깊숙히 오지로 들러가 희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을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씨를 회 땅에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B.C.1233) 이한 및 오가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B.C.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C.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B.C.1160)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B.C.1151),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25년

신해 원년(B.C.1150)

정해 37년(B.C.1114) 기자 서화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B.C.1104)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면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시다.

이에 삼랑 홍운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리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니,

때문에 임금은 성인이 된 후에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대

"옳은 말이로다"하시었다.

기유 59년(B.C.1092)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의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B.C.106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85년

기묘 원년(B.C.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56년(B.C.998),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갑신 원년(B.C.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B.C.990) 큰 가뭄 끝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께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시었다.

기유 26년(B.C.972), 단제 붕어하시고 해모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술 원년(B.C.971) 단제 편찮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시다.

경신 11년(B.C.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B.C.954), 빙해의 뭇 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B.C.944),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B.C.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B.C.936)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B.C.935)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B.C.910),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내휴가 즉위했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는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레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B.C.905)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B.C.87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

정해 원년(B.C.874)

임인 16년(B.C.859)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B.C.850), 단제 붕어하시니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B.C.849)

갑인 3년(B.C.847)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B.C.837) 3월에 월식이 있었다.

병인 15년(B.C.835)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B.C.82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였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819)

계미 2년(B.C.818)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B.C.813) 영고탑 서문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이 있으니,

'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리.

 빈 것과 큰 것은 한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게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으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

을사 24년(B.C.796),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B.C.795)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비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B.C.786),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윽 했다.

무진 23년(B.C.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 했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B.C.772)

갑술 6년(B.C.767), 이 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B.C.759)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지 24년(B.C.748)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B.C.723),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갑술 66년(B.C.707)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시어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B.C.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 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704)

갑진 28년(B.C.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B.C.673)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B.C.670)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B.C.667),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가 모두 평정 되었다.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는 병력을 보내어 연나라와 제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났다.

갑술 58년(B.C.647),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했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B.C.646)

경오 56년(B.C.591),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45년

신미 원년(B.C.590)

을묘 45년(B.C.54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흘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흘 재위 36년

병진 원년(B.C.545)

신묘 36년(B.C.510), 태자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B.C.509)

기유 18년(B.C.4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B.C.47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B.C.471)

기묘 10년(B.C.4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B.C.461)

을묘 36년(B.C.426),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의 군사를 모아 서북 2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 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모시고 배를 타고 해두로 피하신후 얼마후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를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B.C.425),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적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 단제 께서는 군사를 이끌고가 적을 괴멸하고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에게서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 하셨다.

이에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하시고 삼한은 삼조선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으니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았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게 하였다.

정사 2년(B.C.424)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 제사를 지냈다.

3월 2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B.C.409)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 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 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B.C.403) 연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 29년(B.C.397),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 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B.C.380),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 군을 침범하매 수비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B.C.365),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언 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이를 구원하여

대군을 보내어 오더니,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B.C.364), 싸움에진 연나라 사람들이 연운도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공격 할

기미를 보자 우문언이 추격하여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B.C.350),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 말 200필을 바치고 연나라를 칠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B.C.343),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계속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륵 허락하여 조양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기묘 55년(B.C.342)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시어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B.C.341), 12월 번조선의 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 19년(B.C.323),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B.C.304)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 버리니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B.C.298),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B.C.296),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써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고

공도 있었던지라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인 원년(B.C.295)

기묘 14년(B.C.282) 단군왕건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사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 44년(B.C.252)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 왔다.

계축 48년(B.C.248), 시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제께서 허락치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B.C.239), 4월 8일 해모수(解募漱)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사를 일으키니,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계해 58년(B.C.238), 단제 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하고 결단력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날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단제께서는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예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갈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원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는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라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다음날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를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되었다.

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大解募漱)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解募漱)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년 금상 폐하의 천조후 12년 계묘(A.D.1363)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

 

이해 10월 3일 홍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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