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에는 전설과 설화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전설 따라 삼천리」 수준의 것도 있고, 史實的(사실적)인 내용을 갖춘 것도 있다. 그것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관계없이 일관되게 흐르는 의미는 「積德(적덕)이 명당을 낳는다」는 교훈이다.
銘旌이 날려 포은의 묏자리 점지
포은 鄭夢周 |
경기도 용인에 있는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迎日鄭氏)의 묘와 그 옆에 있는 鄭夢周의 손자사위(孫壻·손서) 樗軒 李石亨(저헌 이석형·延安李氏)의 묘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풍수들의 입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조선 제3대 왕에 오른 太宗 李芳遠(태종 이방원)은 태종 5년(1405) 權近(권근)의 奏請(주청)을 받아들여 鄭夢周에 대한 伸寃(신원) 復權(복권)을 단행했다. 두 차례 「王子(왕자)의 亂(난)」으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王位(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民心(민심)을 아우르고 王權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건국 과정에서 자신이 살해했던 鄭夢周를 「萬世(만세)의 忠臣(충신)」으로 顯彰(현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鄭夢周를 영의정으로 追贈(추증)하는 한편, 鄭夢周의 시신을 고향 永川(영천)으로 移葬(이장)하도록 허락했다. 李芳遠에 의해 살해된 후 방치되어 있던 鄭夢周의 시신은 송악산 스님들에 의해 수습되어 松都(송도) 인근 豊德郡(풍덕군)에 임시로 안장되어 있었다.
伸寃이 된 이듬해인 1406년 포은 선생의 유해는 송도에서 영천으로 영면의 터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후손과 함께 그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는 수많은 선비들이 運柩(운구)행렬을 따랐다.
상여가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상여의 앞장에서 들고 가던 銘旌(명정: 죽은 사람의 관직·성씨 등을 기록하여 상여 앞에 두고 가는 긴 깃발)이 바람에 날려 산자락에 떨어졌다. 명정을 들고 가던 장정이 달려가 명정을 집어 들었으나, 명정은 다시 바람에 날려 저만치 가서 떨어졌다. 다시 가서 잡으니 또 날아가 저만치 가서 멎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한 산기슭에 멎었다. 기이하게 여긴 喪主(상주)가 地師(지사·풍수)에게 물어보니 명정이 떨어져 멈춘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명당 터를 잡아 주는구나」 생각한 일행은 고향 영천까지 갈 것 없이 그 자리에 장사 지내기로 결정했다.
부인 경주李氏와 합장한 포은 선생의 묘소 앞의 비석에는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太宗 李芳遠이 후일 내린 조선왕조의 文忠公(문충공)이란 諡號(시호)와 영의정 벼슬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鄭夢周는 죽어서도 조선 왕의 신하일 수 없다」는 당시 선비들의 완강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옆에 文殊山(문수산)의 龍脈(용맥)이 꿈틀거리며 흘러오다 최종적으로 두 개의 유방(雙乳·쌍유)처럼 나란히 結氣(결기)하여 멈춘 명당 터 중 좌측 주맥에 鄭夢周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우측에 손자사위 이석형이 누워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鄭夢周의 묘소 자리가 주맥인 것 같고, 그 옆의 延安(연안)李氏 發福地(발복지)인 저헌 이석형의 묘소는 곁가지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포은의 묘소는 주맥임이 분명하나 入首(입수)가 거의 직선이어서 힘찬 맥을 얻지 못하고 분묘 부근에 이르러서는 선익이 분명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석형의 묘소는 龍脈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가히 地氣(지기)를 뭉쳐 내려왔으니 氣가 강할 수밖에 없는 형상이다.
결정적인 것은 포은의 무덤은 그동안 보수를 하였으나, 가장자리 護石(호석)들에 이끼가 끼고 뒤틀릴 정도로 水脈(수맥)이 관통하는 자리에 누웠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헌의 묘소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한 생기를 뿜어 내는 眞穴(진혈) 위에 壙中(광중: 시신을 담은 관)이 자리 잡았다.
포은의 묘소가 있는 來龍의 주맥을 옛 풍수가 아주 잘못 짚은 것은 아니었다. 포은의 묘소가 들어간 자리는 水脈으로 失穴이 분명했으나, 포은 묘소의 바로 뒤편(위쪽)의 선익이 뚜렷한 지점에는 이석형의 묘소를 능가하는 眞穴이 있었다.
명당에 가까이 가고도 眞穴을 비켜 무덤을 쓰는 실수는 예나 지금이나 地師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하늘이 명정을 날려 명당을 암시했으나 사람이 眞穴을 찾지 못하고 비켜간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眞穴이란 길이 6자(2m 이내), 너비 한 뼘(1자 이내) 정도의 좁은 공간에 來龍의 기맥이 뭉쳐 있는 장소를 말한다. 명당의 형국을 갖추고도 眞穴을 찾지 못하면 헛일이니 『毫釐之差(호리지차)가 천리나 벌어지게 한다』는 말은 원래 풍수에서 나온 격언이다.
두 묘소의 좌측 靑龍 등에 빈 자리가 또 하나 있었다. 이로써 두 묘소의 主山인 문수산이 명당지처임을 알겠다. 주봉에서 뻗어 내린 두 줄기의 龍脈이 마치 두 개의 유방과 같다고 하여 쌍유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얼른 보면 늘어진 유방을 방불케 한다. 혹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저헌 묘소 쪽의 유방은 명당이나 포은 묘소 쪽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쌍유 모두 명당지지가 분명한데, 다만 失穴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吉凶(길흉)과 禍福(화복)이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포은 며느리가 묏자리 바꿔쳐
포은과 저헌의 묘소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그중 하나가 「포은 선생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던 선생의 손녀가 문제의 銘旌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地官의 말을 듣고 무덤자리를 정하게 되자, 媤家(시가)인 延安李氏 집안을 위해 그 무덤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꾀를 내어 한밤중에 壙中에 물을 부었다. 광중에 물이 찬 것을 본 포은 선생 집안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해 포은의 묏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화는 이곳에 두 무덤을 만든 후 포은 선생의 迎日鄭氏보다 저헌의 延安李氏 문중이 더 화려하게 發福(발복)하자,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저헌 이석형은 포은 선생의 유해를 용인 땅에 이장했던 태종 5년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延安李氏는 표에서 보듯 250명의 文科 급제자, 8명의 정승,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해 조선조 5大 名家의 하나로 떠올랐다. 반면에 포은의 迎日鄭氏 가문은 文科 급제자 11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포은 선생의 직계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벼슬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미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당시 포은 선생의 아들이 경기도 용인에서 처가인 죽산朴氏 가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영천으로 가던 유해가 용인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道詵(도선) 국사 이래 수많은 풍수가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와 필자가 그동안 스스로 답사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남한)에는 수천 개의 「名堂」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인연을 만나 묘소가 들어선 것이 1000여 개소 정도이다. 그중에서 眞穴에 든 경우는 겨우 20% 정도였다. 나머지는 안타깝게도 명당 근처에는 갔으나 眞穴에 들지 못하는 失穴 무덤이었다. 포은 선생의 무덤은 그중 하나였다.
生居鎭川 死居龍仁(?)
포은과 저헌, 두 걸출한 인물의 무덤 자리를 안고 있는 문수산은 경기도 龍仁 땅에 있는 작은 산이다. 바로 문수산을 안고 있는 용인과 관련해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生居鎭川(생거진천) 死居龍仁(사거용인)」이 그것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뜻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말을 「살기에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 묻힐 장소로는 용인이 최고」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얘기다.
용인 땅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남편이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젊어서 죽자, 그 여인은 진천 사람에게 再嫁(재가)해 다시 아들 하나를 얻었다. 후일 그녀가 죽자 용인에 살고 있던 前남편 소생의 아들과 진천에 살고 있던 재가한 남편 사이에 난 아들이 서로 어미의 시신을 제 고장에 묻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시비가 일었다.
訟事(송사)를 맡은 진천 현감은 궁리 끝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노파가) 살아서는 진천에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가서 묻히는 것이 옳다(生居鎭川 死居龍仁)』
공평무사한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이 판결의 어디에도 진천이 특별히 살기 좋은 고장이라거나, 용인이 명당 자리라는 얘기는 없다.
8정승, 3대제학, 3왕비를 배출한 淸風金氏
淸風 金氏 金仁伯의 아내 安東 權氏의 묘. |
용인에서 멀지 않은 곳,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오봉산 아랫자락에 淸風(청풍)金氏가 조상 묘소 하나를 잘 쓰고 3정승 6판서를 배출해 명문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무덤이 있다. 흔히 조선 8大 명당의 하나로 꼽히는 淸風金氏 金仁伯(김인백)의 부인 安東權氏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후손인 淸風金氏 가문이 文科급제 110명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3명을 배출하면서 명문으로 도약하게 한 發福 근원으로 지목됐다.
太祖山(태조산)에서 발원한 龍脈은 東南쪽으로 수십 리 來龍하여 수원 북쪽 20리에서 光敎山(광교산)을 빚어 내고 다시 東南쪽으로 結咽束氣(결인속기)한 후 中祖山(중조산)을 만들고 東北쪽으로 떨어지기를 10리, 몸을 바꾸어 龍脈이 흘러온 방향을 쳐다보면서(回龍顧祖·회룡고조) 小祖山(소조산)인 五峰山(오봉산)에 이른다. 소조산에 이르기까지 용맥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장엄하게 운신하여 辛入首(신입수·酉坐卯向)했다. 東南에서 물을 얻고 東北으로 빠지며 다시 西北으로 유장하게 흐른다.
오봉산 中出脈(중출맥)에서 흘러내린 來龍은 강렬한 기맥을 부드러운 흙 속에 감추면서 흘러내려 우측으로 白虎(백호)를 만들고 主龍이 좌측으로 뻗으면서 앞으로 감싼다. 닭이 알을 품듯(金鷄抱卵·금계포란) 靑龍·白虎가 감싸 안은 속에 다시 內靑龍·內白虎가 아늑한 명당을 빚었으며, 그 가운데 생기 眞穴이 있으니 淸風金氏 가문 金仁伯의 부인 安東權氏는 정확하게 眞穴에 터를 잡았다.
상놈이 免賤하고 發福한 名堂
安東 金氏 김번의 묘. |
조선 8大 명당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大발복한 묘소인지라 이 자리에 들기까지 설화가 없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봉산 아랫자락을 지나가던 道僧(도승) 두 사람이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 중이 말했다.
『저 자리에 무덤을 쓰면 오는 8월에 상놈이 免賤(면천)하고 발복할 것이다』
다른 중이 반박했다.
『아니다. 9월 보름이 돼야 발복한다』
아랫마을 李대감댁 머슴 金총각이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다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달려가 코를 박고 무릎을 꿇었다.
『보다시피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면천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마침 제 어미가 죽었으나 무덤 자리가 없어 이리 헤매고 있던 중입니다. 무덤 자리를 보아 주시면 백골난망이겠습니다』
두 道僧은 총각의 기골이 범상치 않은데다 소원이 하도 간절하여 무덤 자리를 가르쳐 주고 내친김에 장사까지 지내 주었다. 그런 다음 『오는 9월 보름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떠나갔다.
그해 8월 추석날이었다. 李대감은 식솔을 데리고 뒷동산의 先塋(선영)에 제사를 올리려고 갔다. 가서 제물을 차려놓고 보니 炙(적)이 빠져 있었다. 제상에 적이 없으면 차림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李대감은 머슴 金총각에게 『어서 가서 적 한 접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金총각은 집에 돌아와서 적을 찾았다. 마침 홀로 집에 남아 있던 李대감의 딸이 『뒤란의 큰 항아리 속에 있다』고 가르쳐 줬다. 金총각이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니 과연 적이 있었으나 항아리가 워낙 크고 깊어서 혼자서는 몸을 굽혀 꺼낼 수 없었다.
옆에서 보던 李대감댁 딸이 항아리 속에 머리를 박고 적을 꺼내고, 머슴은 대감댁 딸이 항아리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붙들어 주었다. 얇은 옷을 입은 처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총각에게 전달됐고, 총각의 뜨거운 열기도 처녀에게 전달됐다. 항아리 속에서 적을 꺼내다 말고 처녀와 총각은 몸을 합치고 말았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李대감은 어쩔 수 없이 머슴을 면천시키고 딸과 결혼을 시켰다. 혼례날짜는 9월 보름날이었다. 재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두 道僧이 혼례에 참여해 축복해 주었다.
李대감댁 딸은 남편을 열심히 뒷바라지했고, 머슴 살던 金총각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해 大학자가 되었다. 淸風金氏는 이후 肅宗(숙종)·英祖(영조) 때 威名(위명)을 떨쳤고,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3명을 줄줄이 배출했다.
地師 말 엿듣고 남의 집터에 묏자리 마련
또 다른 설화에 따르면 安東權氏의 무덤이 있는 자리는 오봉산 아랫자락으로 원래 石氏 성을 쓰는 부자가 살던 집터였다. 어느 해 풍수 두 사람이 전국을 유람하다가 이 마을에 이르렀다. 이들은 石氏 집터를 보고 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에 이끌려 명당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어 주인 몰래 마루 밑에 솔잎을 묻어 두고 떠나면서 몇 월 며칠에 다시 와서 확인하기로 했다.
마침 이 집에 들렀던 淸風金氏 집안의 金克亨(김극형)이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金克亨은 地官들이 다시 온다는 날에 앞서 石氏 집을 찾아가 마루 밑을 살폈다. 솔잎이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과연 명당이라고 판단한 金克亨은 地官들을 속이기 위해 그 솔잎을 버리고 대신 말라비틀어진 솔잎을 가져다 놓았다.
地官들이 와서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실망하여 돌아갔다. 金克亨은 石氏 집안과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하던 石氏 집안에서는 갑자기 집에 불이 나고 재앙이 오자 할 수 없이 金克亨에게 집을 팔았다.
金克亨은 그 자리에 어머니 權氏를 묻었다. 현재 묘소의 바로 앞에는 옛 집터였던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드넓은 집터에는 동네 아낙들이 들어와 쑥을 뜯고 있었다.
모든 설화가 다 그렇지만 이상의 설화에는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명당 주변에 또 다른 眞穴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安東權氏 무덤 부근 龍脈에서 약간 좌측으로 벗어난 자리에 酉坐(유좌·東向)의 眞穴이 빈 채로 남아 있었다.
逆의 형세인 安東金氏 김번의 묘
金祖淳 |
安東金氏는 조선 말기 60년에 걸쳐 권세를 누린 勢道(세도)가문이다. 安東金氏는 조선왕조 全기간에 걸쳐 인물을 냈는데, 특히 조선 중기부터 번창하여 무려 315명의 文科 급제자를 배출했다. 정승은 왕족인 全州(전주)李氏 다음으로 많은 19명을 배출했고,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냈다.
安東金氏는 金祖淳(김조순)의 딸이 純祖(순조)의 妃(純元王后·순원왕후)로, 金祖根(김조근)의 딸이 憲宗(헌종)의 妃(孝顯王后·효현왕후)로, 金汶根(김문근)의 딸이 哲宗(철종)의 妃(明純王后·명순왕후)로 계속 간택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이 주로 서울 壯洞(장동)에 살았기 때문에 壯洞金氏, 줄여서 壯金이라고 불렀다.
安東金氏 60년 세도의 문을 열어 준 蔭德(음덕)의 發源地(발원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석실마을에 있는 玉壺貯水形(옥호저수형) 명당으로 金?(김번·1479~ 1544)의 묘소다.
金?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평양부 庶尹(서윤: 조선시대 한성부와 평양부에 소속된 종4품의 관직으로 人事를 담당)으로 나갔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을 건의하고 백성의 稅를 감면하여 추앙을 받았다. 부인 南陽(남양)洪氏와 합장한 그의 무덤은 學祖禪師(학조선사)가 點所(점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묘소는 천마산 龍脈이 동북쪽에서 來龍하여 西北으로 방향을 바꾸고, 남쪽에서 入首하여 빚어낸 명당으로 局(국)이 넓고 잘 짜인데다 南向의 묘소 한가운데로 강한 생기가 발산되는 眞穴을 깔고 앉았다.
이 묘소는 풍수 상식에 벗어난 몇 가지 형상적 특성을 갖고 있어 과거에는 명당으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독 氣를 감응할 줄 아는 몇몇 地師만이 명당으로 꼽았는데, 오늘날에는 이 묘소가 조선 8大 명당 중 하나이며 壯金 발복의 근원지로 판단하는 데 異見(이견)이 거의 없다.
다만, 묘소의 朱雀(주작·앞면)이 높은 지형이므로 逆(역)의 형세인데, 王權을 깔고 앉은 勢道정치 역시 逆의 또 다른 형태임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이 묘소의 좌측 후방에 판서 등 후손들의 무덤 몇 基가 散在(산재)했으나 眞穴은 아니었다. 安東金氏 일족의 무덤은 「명당이 명당을 낳는다」는 논리 그대로 이곳 말고도 전국에 수없이 많은 명당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근원을 거슬러 발복의 원천을 고르라면 서윤공 김번의 묘소라 하겠다.
現代의 土木技術로 名堂을 만들 수 없나?
여기서 幽宅(유택)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의문 한 가지를 답하고 넘어가야겠다.
『풍수들은 左靑龍·右白虎가 어떻고, 안산과 주산이 어떠하며, 결인이 좋고 나쁘다거나, 선익이 분명하다 아니다 하는 등의 지형지세와 물과 바람의 흐름을 가지고 형국 판단의 자료로 삼는다. 현대의 토목기술과 중장비의 위력으로 그까짓 형국 만들기는 누워서 떡먹기와 같다. 인공으로 명당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근래에 작고한 유명 재벌 한 사람의 사례를 들어보면 대답은 자명해진다. 생전에 거칠 것 없이 살아온 그 재벌의 후손들은 死後(사후)에도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음일까, 중장비와 토목기술을 동원하여 人工으로 명당의 형국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이런 행위를 마땅치 않게 보았는지 바로 그해 홍수에 무덤 앞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언덕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자연의 이치를 억지로 거스르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吉凶禍福은 토목기술과 중장비의 힘으로 빚어낼 수 없는 천지조화와 우주운행의 비밀이다. 풍수는 그 비밀의 한 단면만을 찾아내어 경계하고 활용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