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게시판

17. 조선의 大 名堂 모음

오늘의 쉼터 2008. 5. 4. 00:29
- 조선의 大 名堂
 
하늘이 점지한 鄭夢周의 묘
「淸風金氏」金仁伯 妻의 묘
 
延安李氏 李石亨의 묘(경기 용인)
250명의 文科 급제자, 8명의 정승, 7명의 대제학 배출

安東金氏 김번의 묘(경기 남양주)
60년 勢道정치 發福의 근원

金聖洙 尋穴名堂硏究所長
1935년 구례 화엄사 아랫마을 출생. 호 靈目. 건국大를 졸업하고 건설부에서 근무하던 중 뜻한 바 있어 사임하고 나와 사업에 투신하여 성공한 후 세계를 일주하며 동서양 풍수지리학을 섭렵했다. 특히 한국 풍수지리학의 鼻祖인 玉龍子 道詵國師의 비법을 연구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저서로 「名堂」이 있다.
金聖洙 尋穴名堂硏究所長
「덕을 쌓아야 名堂 얻는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鄭夢周의 묘(왼쪽)와 그의 사위 李石亨의 묘.
 名門(명문), 즉 「좋은 집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代(대)에 걸쳐 사회적으로 기여한 인물을 배출해 낸 집안을 말한다. 그런 집안이 만들어진 내력을 추적해 보면 예외 없이 名堂(명당)을 만날 수 있다. 조상의 누군가 명당에 들지 못한 채 「우연히」 형성된 명문은 없다. 당대에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있다가도 명당을 얻지 못하면 후손들이 寒微(한미)해지거나 絶孫(절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당에는 전설과 설화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전설 따라 삼천리」 수준의 것도 있고, 史實的(사실적)인 내용을 갖춘 것도 있다. 그것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관계없이 일관되게 흐르는 의미는 「積德(적덕)이 명당을 낳는다」는 교훈이다.
 
 
  銘旌이 날려 포은의 묏자리 점지
 
포은 鄭夢周

  경기도 용인에 있는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迎日鄭氏)의 묘와 그 옆에 있는 鄭夢周의 손자사위(孫壻·손서) 樗軒 李石亨(저헌 이석형·延安李氏)의 묘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풍수들의 입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조선 제3대 왕에 오른 太宗 李芳遠(태종 이방원)은 태종 5년(1405) 權近(권근)의 奏請(주청)을 받아들여 鄭夢周에 대한 伸寃(신원) 復權(복권)을 단행했다. 두 차례 「王子(왕자)의 亂(난)」으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王位(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民心(민심)을 아우르고 王權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건국 과정에서 자신이 살해했던 鄭夢周를 「萬世(만세)의 忠臣(충신)」으로 顯彰(현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鄭夢周를 영의정으로 追贈(추증)하는 한편, 鄭夢周의 시신을 고향 永川(영천)으로 移葬(이장)하도록 허락했다. 李芳遠에 의해 살해된 후 방치되어 있던 鄭夢周의 시신은 송악산 스님들에 의해 수습되어 松都(송도) 인근 豊德郡(풍덕군)에 임시로 안장되어 있었다.
 
  伸寃이 된 이듬해인 1406년 포은 선생의 유해는 송도에서 영천으로 영면의 터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후손과 함께 그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는 수많은 선비들이 運柩(운구)행렬을 따랐다.
 
  상여가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상여의 앞장에서 들고 가던 銘旌(명정: 죽은 사람의 관직·성씨 등을 기록하여 상여 앞에 두고 가는 긴 깃발)이 바람에 날려 산자락에 떨어졌다. 명정을 들고 가던 장정이 달려가 명정을 집어 들었으나, 명정은 다시 바람에 날려 저만치 가서 떨어졌다. 다시 가서 잡으니 또 날아가 저만치 가서 멎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한 산기슭에 멎었다. 기이하게 여긴 喪主(상주)가 地師(지사·풍수)에게 물어보니 명정이 떨어져 멈춘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명당 터를 잡아 주는구나」 생각한 일행은 고향 영천까지 갈 것 없이 그 자리에 장사 지내기로 결정했다.
 
  부인 경주李氏와 합장한 포은 선생의 묘소 앞의 비석에는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太宗 李芳遠이 후일 내린 조선왕조의 文忠公(문충공)이란 諡號(시호)와 영의정 벼슬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鄭夢周는 죽어서도 조선 왕의 신하일 수 없다」는 당시 선비들의 완강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옆에 文殊山(문수산)의 龍脈(용맥)이 꿈틀거리며 흘러오다 최종적으로 두 개의 유방(雙乳·쌍유)처럼 나란히 結氣(결기)하여 멈춘 명당 터 중 좌측 주맥에 鄭夢周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우측에 손자사위 이석형이 누워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鄭夢周의 묘소 자리가 주맥인 것 같고, 그 옆의 延安(연안)李氏 發福地(발복지)인 저헌 이석형의 묘소는 곁가지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포은의 묘소는 주맥임이 분명하나 入首(입수)가 거의 직선이어서 힘찬 맥을 얻지 못하고 분묘 부근에 이르러서는 선익이 분명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석형의 묘소는 龍脈이 꿈틀거리는 형상이 가히 地氣(지기)를 뭉쳐 내려왔으니 氣가 강할 수밖에 없는 형상이다.
 
  결정적인 것은 포은의 무덤은 그동안 보수를 하였으나, 가장자리 護石(호석)들에 이끼가 끼고 뒤틀릴 정도로 水脈(수맥)이 관통하는 자리에 누웠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헌의 묘소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한 생기를 뿜어 내는 眞穴(진혈) 위에 壙中(광중: 시신을 담은 관)이 자리 잡았다.
 
  포은의 묘소가 있는 來龍의 주맥을 옛 풍수가 아주 잘못 짚은 것은 아니었다. 포은의 묘소가 들어간 자리는 水脈으로 失穴이 분명했으나, 포은 묘소의 바로 뒤편(위쪽)의 선익이 뚜렷한 지점에는 이석형의 묘소를 능가하는 眞穴이 있었다.
 
  명당에 가까이 가고도 眞穴을 비켜 무덤을 쓰는 실수는 예나 지금이나 地師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하늘이 명정을 날려 명당을 암시했으나 사람이 眞穴을 찾지 못하고 비켜간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眞穴이란 길이 6자(2m 이내), 너비 한 뼘(1자 이내) 정도의 좁은 공간에 來龍의 기맥이 뭉쳐 있는 장소를 말한다. 명당의 형국을 갖추고도 眞穴을 찾지 못하면 헛일이니 『毫釐之差(호리지차)가 천리나 벌어지게 한다』는 말은 원래 풍수에서 나온 격언이다.
 
  두 묘소의 좌측 靑龍 등에 빈 자리가 또 하나 있었다. 이로써 두 묘소의 主山인 문수산이 명당지처임을 알겠다. 주봉에서 뻗어 내린 두 줄기의 龍脈이 마치 두 개의 유방과 같다고 하여 쌍유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얼른 보면 늘어진 유방을 방불케 한다. 혹자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저헌 묘소 쪽의 유방은 명당이나 포은 묘소 쪽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쌍유 모두 명당지지가 분명한데, 다만 失穴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서 吉凶(길흉)과 禍福(화복)이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포은 며느리가 묏자리 바꿔쳐
 
  포은과 저헌의 묘소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그중 하나가 「포은 선생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던 선생의 손녀가 문제의 銘旌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地官의 말을 듣고 무덤자리를 정하게 되자, 媤家(시가)인 延安李氏 집안을 위해 그 무덤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꾀를 내어 한밤중에 壙中에 물을 부었다. 광중에 물이 찬 것을 본 포은 선생 집안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해 포은의 묏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화는 이곳에 두 무덤을 만든 후 포은 선생의 迎日鄭氏보다 저헌의 延安李氏 문중이 더 화려하게 發福(발복)하자,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저헌 이석형은 포은 선생의 유해를 용인 땅에 이장했던 태종 5년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延安李氏는 표에서 보듯 250명의 文科 급제자, 8명의 정승,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해 조선조 5大 名家의 하나로 떠올랐다. 반면에 포은의 迎日鄭氏 가문은 文科 급제자 119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포은 선생의 직계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벼슬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미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당시 포은 선생의 아들이 경기도 용인에서 처가인 죽산朴氏 가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영천으로 가던 유해가 용인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道詵(도선) 국사 이래 수많은 풍수가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와 필자가 그동안 스스로 답사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남한)에는 수천 개의 「名堂」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인연을 만나 묘소가 들어선 것이 1000여 개소 정도이다. 그중에서 眞穴에 든 경우는 겨우 20% 정도였다. 나머지는 안타깝게도 명당 근처에는 갔으나 眞穴에 들지 못하는 失穴 무덤이었다. 포은 선생의 무덤은 그중 하나였다.
 

 
  生居鎭川 死居龍仁(?)
 
  포은과 저헌, 두 걸출한 인물의 무덤 자리를 안고 있는 문수산은 경기도 龍仁 땅에 있는 작은 산이다. 바로 문수산을 안고 있는 용인과 관련해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生居鎭川(생거진천) 死居龍仁(사거용인)」이 그것이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뜻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말을 「살기에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 묻힐 장소로는 용인이 최고」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얘기다.
 
  용인 땅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남편이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젊어서 죽자, 그 여인은 진천 사람에게 再嫁(재가)해 다시 아들 하나를 얻었다. 후일 그녀가 죽자 용인에 살고 있던 前남편 소생의 아들과 진천에 살고 있던 재가한 남편 사이에 난 아들이 서로 어미의 시신을 제 고장에 묻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시비가 일었다.
 
  訟事(송사)를 맡은 진천 현감은 궁리 끝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노파가) 살아서는 진천에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가서 묻히는 것이 옳다(生居鎭川 死居龍仁)』
 
  공평무사한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이 판결의 어디에도 진천이 특별히 살기 좋은 고장이라거나, 용인이 명당 자리라는 얘기는 없다.
 
 
  8정승, 3대제학, 3왕비를 배출한 淸風金氏
 
淸風 金氏 金仁伯의 아내 安東 權氏의 묘.

  용인에서 멀지 않은 곳,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오봉산 아랫자락에 淸風(청풍)金氏가 조상 묘소 하나를 잘 쓰고 3정승 6판서를 배출해 명문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무덤이 있다. 흔히 조선 8大 명당의 하나로 꼽히는 淸風金氏 金仁伯(김인백)의 부인 安東權氏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후손인 淸風金氏 가문이 文科급제 110명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3명을 배출하면서 명문으로 도약하게 한 發福 근원으로 지목됐다.
 
  太祖山(태조산)에서 발원한 龍脈은 東南쪽으로 수십 리 來龍하여 수원 북쪽 20리에서 光敎山(광교산)을 빚어 내고 다시 東南쪽으로 結咽束氣(결인속기)한 후 中祖山(중조산)을 만들고 東北쪽으로 떨어지기를 10리, 몸을 바꾸어 龍脈이 흘러온 방향을 쳐다보면서(回龍顧祖·회룡고조) 小祖山(소조산)인 五峰山(오봉산)에 이른다. 소조산에 이르기까지 용맥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장엄하게 운신하여 辛入首(신입수·酉坐卯向)했다. 東南에서 물을 얻고 東北으로 빠지며 다시 西北으로 유장하게 흐른다.
 
  오봉산 中出脈(중출맥)에서 흘러내린 來龍은 강렬한 기맥을 부드러운 흙 속에 감추면서 흘러내려 우측으로 白虎(백호)를 만들고 主龍이 좌측으로 뻗으면서 앞으로 감싼다. 닭이 알을 품듯(金鷄抱卵·금계포란) 靑龍·白虎가 감싸 안은 속에 다시 內靑龍·內白虎가 아늑한 명당을 빚었으며, 그 가운데 생기 眞穴이 있으니 淸風金氏 가문 金仁伯의 부인 安東權氏는 정확하게 眞穴에 터를 잡았다.
 
 
  상놈이 免賤하고 發福한 名堂
 
安東 金氏 김번의 묘.

  조선 8大 명당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大발복한 묘소인지라 이 자리에 들기까지 설화가 없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봉산 아랫자락을 지나가던 道僧(도승) 두 사람이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 중이 말했다.
 
  『저 자리에 무덤을 쓰면 오는 8월에 상놈이 免賤(면천)하고 발복할 것이다』
 
  다른 중이 반박했다.
 
  『아니다. 9월 보름이 돼야 발복한다』
 
  아랫마을 李대감댁 머슴 金총각이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다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는 달려가 코를 박고 무릎을 꿇었다.
 
  『보다시피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면천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마침 제 어미가 죽었으나 무덤 자리가 없어 이리 헤매고 있던 중입니다. 무덤 자리를 보아 주시면 백골난망이겠습니다』
 
  두 道僧은 총각의 기골이 범상치 않은데다 소원이 하도 간절하여 무덤 자리를 가르쳐 주고 내친김에 장사까지 지내 주었다. 그런 다음 『오는 9월 보름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 떠나갔다.
 
  그해 8월 추석날이었다. 李대감은 식솔을 데리고 뒷동산의 先塋(선영)에 제사를 올리려고 갔다. 가서 제물을 차려놓고 보니 炙(적)이 빠져 있었다. 제상에 적이 없으면 차림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李대감은 머슴 金총각에게 『어서 가서 적 한 접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金총각은 집에 돌아와서 적을 찾았다. 마침 홀로 집에 남아 있던 李대감의 딸이 『뒤란의 큰 항아리 속에 있다』고 가르쳐 줬다. 金총각이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니 과연 적이 있었으나 항아리가 워낙 크고 깊어서 혼자서는 몸을 굽혀 꺼낼 수 없었다.
 
  옆에서 보던 李대감댁 딸이 항아리 속에 머리를 박고 적을 꺼내고, 머슴은 대감댁 딸이 항아리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붙들어 주었다. 얇은 옷을 입은 처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총각에게 전달됐고, 총각의 뜨거운 열기도 처녀에게 전달됐다. 항아리 속에서 적을 꺼내다 말고 처녀와 총각은 몸을 합치고 말았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李대감은 어쩔 수 없이 머슴을 면천시키고 딸과 결혼을 시켰다. 혼례날짜는 9월 보름날이었다. 재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온 두 道僧이 혼례에 참여해 축복해 주었다.
 
  李대감댁 딸은 남편을 열심히 뒷바라지했고, 머슴 살던 金총각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해 大학자가 되었다. 淸風金氏는 이후 肅宗(숙종)·英祖(영조) 때 威名(위명)을 떨쳤고,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3명을 줄줄이 배출했다.
 
 
  地師 말 엿듣고 남의 집터에 묏자리 마련
 
  또 다른 설화에 따르면 安東權氏의 무덤이 있는 자리는 오봉산 아랫자락으로 원래 石氏 성을 쓰는 부자가 살던 집터였다. 어느 해 풍수 두 사람이 전국을 유람하다가 이 마을에 이르렀다. 이들은 石氏 집터를 보고 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에 이끌려 명당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어 주인 몰래 마루 밑에 솔잎을 묻어 두고 떠나면서 몇 월 며칠에 다시 와서 확인하기로 했다.
 
  마침 이 집에 들렀던 淸風金氏 집안의 金克亨(김극형)이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金克亨은 地官들이 다시 온다는 날에 앞서 石氏 집을 찾아가 마루 밑을 살폈다. 솔잎이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과연 명당이라고 판단한 金克亨은 地官들을 속이기 위해 그 솔잎을 버리고 대신 말라비틀어진 솔잎을 가져다 놓았다.
 
  地官들이 와서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실망하여 돌아갔다. 金克亨은 石氏 집안과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하던 石氏 집안에서는 갑자기 집에 불이 나고 재앙이 오자 할 수 없이 金克亨에게 집을 팔았다.
 
  金克亨은 그 자리에 어머니 權氏를 묻었다. 현재 묘소의 바로 앞에는 옛 집터였던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드넓은 집터에는 동네 아낙들이 들어와 쑥을 뜯고 있었다.
 
  모든 설화가 다 그렇지만 이상의 설화에는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명당 주변에 또 다른 眞穴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安東權氏 무덤 부근 龍脈에서 약간 좌측으로 벗어난 자리에 酉坐(유좌·東向)의 眞穴이 빈 채로 남아 있었다.
 
 
  逆의 형세인 安東金氏 김번의 묘
 
金祖淳

  安東金氏는 조선 말기 60년에 걸쳐 권세를 누린 勢道(세도)가문이다. 安東金氏는 조선왕조 全기간에 걸쳐 인물을 냈는데, 특히 조선 중기부터 번창하여 무려 315명의 文科 급제자를 배출했다. 정승은 왕족인 全州(전주)李氏 다음으로 많은 19명을 배출했고,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냈다.
 
  安東金氏는 金祖淳(김조순)의 딸이 純祖(순조)의 妃(純元王后·순원왕후)로, 金祖根(김조근)의 딸이 憲宗(헌종)의 妃(孝顯王后·효현왕후)로, 金汶根(김문근)의 딸이 哲宗(철종)의 妃(明純王后·명순왕후)로 계속 간택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이 주로 서울 壯洞(장동)에 살았기 때문에 壯洞金氏, 줄여서 壯金이라고 불렀다.
 
  安東金氏 60년 세도의 문을 열어 준 蔭德(음덕)의 發源地(발원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석실마을에 있는 玉壺貯水形(옥호저수형) 명당으로 金?(김번·1479~ 1544)의 묘소다.
 
  金?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평양부 庶尹(서윤: 조선시대 한성부와 평양부에 소속된 종4품의 관직으로 人事를 담당)으로 나갔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을 건의하고 백성의 稅를 감면하여 추앙을 받았다. 부인 南陽(남양)洪氏와 합장한 그의 무덤은 學祖禪師(학조선사)가 點所(점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묘소는 천마산 龍脈이 동북쪽에서 來龍하여 西北으로 방향을 바꾸고, 남쪽에서 入首하여 빚어낸 명당으로 局(국)이 넓고 잘 짜인데다 南向의 묘소 한가운데로 강한 생기가 발산되는 眞穴을 깔고 앉았다.
 
  이 묘소는 풍수 상식에 벗어난 몇 가지 형상적 특성을 갖고 있어 과거에는 명당으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독 氣를 감응할 줄 아는 몇몇 地師만이 명당으로 꼽았는데, 오늘날에는 이 묘소가 조선 8大 명당 중 하나이며 壯金 발복의 근원지로 판단하는 데 異見(이견)이 거의 없다.
 
  다만, 묘소의 朱雀(주작·앞면)이 높은 지형이므로 逆(역)의 형세인데, 王權을 깔고 앉은 勢道정치 역시 逆의 또 다른 형태임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이 묘소의 좌측 후방에 판서 등 후손들의 무덤 몇 基가 散在(산재)했으나 眞穴은 아니었다. 安東金氏 일족의 무덤은 「명당이 명당을 낳는다」는 논리 그대로 이곳 말고도 전국에 수없이 많은 명당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근원을 거슬러 발복의 원천을 고르라면 서윤공 김번의 묘소라 하겠다.
 
 
  現代의 土木技術로 名堂을 만들 수 없나?
 
  여기서 幽宅(유택)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의문 한 가지를 답하고 넘어가야겠다.
 
  『풍수들은 左靑龍·右白虎가 어떻고, 안산과 주산이 어떠하며, 결인이 좋고 나쁘다거나, 선익이 분명하다 아니다 하는 등의 지형지세와 물과 바람의 흐름을 가지고 형국 판단의 자료로 삼는다. 현대의 토목기술과 중장비의 위력으로 그까짓 형국 만들기는 누워서 떡먹기와 같다. 인공으로 명당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근래에 작고한 유명 재벌 한 사람의 사례를 들어보면 대답은 자명해진다. 생전에 거칠 것 없이 살아온 그 재벌의 후손들은 死後(사후)에도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음일까, 중장비와 토목기술을 동원하여 人工으로 명당의 형국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하늘이 이런 행위를 마땅치 않게 보았는지 바로 그해 홍수에 무덤 앞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언덕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자연의 이치를 억지로 거스르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吉凶禍福은 토목기술과 중장비의 힘으로 빚어낼 수 없는 천지조화와 우주운행의 비밀이다. 풍수는 그 비밀의 한 단면만을 찾아내어 경계하고 활용할 뿐이다. ●

 

 

 

 

 

도선국사와 나옹화상이 점지한 黃喜 정승 할아버지의 묘
 
부사의 묘를 양보받은 동래鄭氏 :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배출
관청 안에 묘를 쓴 한산李氏 : 牧隱 李穡 배출
장인에게 명당 양보받은 광산金氏 : 문과 급제자 265명, 정승 5명 배출

金聖洙
1935년 구례 화엄사 아랫마을 출생. 호 靈目. 건국大를 졸업하고 건설부에서 근무하던 중 뜻한 바 있어 사임하고 나와 사업에 투신하여 성공한 후 세계를 일주하며 동서양 풍수지리학을 섭렵했다. 특히 한국 풍수지리학의 鼻祖인 玉龍子 道詵國師의 비법을 연구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저서로 「名堂」이 있다.
金聖洙 尋穴名堂硏究所長
白頭大幹의 龍脈이 멈추는 동래
한산李氏 시조 무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다』(천하 만물은 주인이 따로 있다)거나 『積德(적덕)해야 명당을 얻는다』고 강조해 왔다.
 
  대개의 명당들이 가문의 積德으로 점지되고, 그 덕분에 후손들이 번창하여 명문을 낳는 善(선)순환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특별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의 척추인 白頭大幹(백두대간)이 南으로 흘러내리다가 중간에 소백산맥으로 갈라져 지리산에 이르고 한 줄기는 그대로 南下하여 부산 서쪽에서 낙동강을 만나 마침내 멈춘다. 백두대간의 龍脈(용맥)이 멈추어 기상이 한 자리에 뭉쳐 있는 부산 인근의 지형 중에 東萊(동래)는 가히 압권이다.
 
  백두대간이 千聖山(천성산)을 빚고 천성산의 용맥이 金井山(금정산)과 華池山(화지산)을 지나면서 두 갈래로 벌어지는데, 왼쪽은 靑龍(청룡)이 되어 荒嶺山(황령산)에서 불끈 솟았다가 바다로 떨어지고, 오른쪽은 白虎(백호)가 되어 九德山(구덕산)·天馬山(천마산)을 지나 역시 바다와 만난다. 靑龍과 白虎가 갈라지는 어간에 동래가 들어 있다.
 
 
  조선 500년, 가장 크게 發福한 땅
 
  동래를 감싸고 있는 금정산과 금정봉을 각각 太祖山(태조산)과 中祖山(중조산)으로 하고, 화지산을 主山으로 하여 겹겹이 펼쳐진 白虎脈(백호맥)이 한 줄기 靑龍脈(청룡맥)을 감싸안는 也字形(야자형) 지세를 만든 후 생기가 한 곳에 모인 진혈처에 자리 잡은 묘소가 있다. 東萊鄭氏(동래정씨) 中始祖(중시조) 戶長公(호장공) 鄭文道(정문도)의 묘소이다.
 
  外靑龍과 外白虎에 못지않게 화지산 자체도 內靑龍과 內白虎로 갈라지면서 야자형의 名局(명국)을 빚으니 그 사이에 천하 명당이 만들어졌다. 東北 방향에서 100리를 꿈틀거리며 내려온 龍脈이 西北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가 北北東에서 入首(입수)하니 무덤은 南向으로 앉았다. 지세만 명당 大局인 것이 아니라 생기가 솟아나는 眞穴(진혈)에 壙中(광중)이 정확하게 들어가 있었다.
 
  東萊鄭氏 문중의 묘소로는 호장공 정문도의 묘소와 함께 경북 예천군 지보면 익장마을에 있는 鄭賜(정사)의 묘소가 兩大(양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鄭氏 문중 대발복의 근원으로 동래에 있는 야자형 명당을 꼽는 데 이견이 없다. 이 묘소는 휴전선 너머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문화柳氏 시조산과 함께 조선조 500여 년 동안 가장 크게 발복한 땅으로 알려져 있다.
 
  東萊鄭氏는 조선시대에 文科(문과)급제 198명, 정승 17명을 배출했다. 이는 왕실인 전주李氏와 외척세도를 부렸던 안동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였다. 그 외에 대제학 2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을 배출했다.
 
 
  府使에게 명당자리 양보받아
 
東萊鄭氏 중시조 정문도의 묘소.

  東萊鄭氏는 왕비는 한 사람도 배출하지 않았는데, 외척으로 행세한 적이 없으면서 이만 한 인물을 배출해 낸 것이 특이하다. 이 문중에서는 조선조 500년 동안 그 많은 벼슬을 했으면서도 賜死者(사사자: 사약을 받고 죽은 사람)나 유배당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진기록을 남겼다.
 
  東萊鄭氏는 신라의 6부 촌장 가운데 자산진부 촌장 智白虎(지백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신라 때 安逸戶長(안일호장)을 지낸 鄭繪文(정회문)이나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고려 때 戶長이었던 鄭之遠(정지원)을 1세로, 정지원의 아들로 戶長을 지낸 鄭文道를 中始祖로 삼고 있다.
 
  戶長이란 鄕職(향직)의 우두머리로 신라 때부터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城主(성주)나 豪族(호족)을 말한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이들을 戶長 또는 副戶長이라는 명칭으로 재편하여 고려 王權에 협조하도록 유도했다. 조선조에 와서 戶長이라는 직분은 고을의 수령 밑에 있는 衙前(아전)으로 전락했지만, 신라·고려 때의 戶長은 지방의 土豪(토호)들이었다.
 
  戶長 정문도는 청빈한 사람으로 동래 부사 고익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부사 고익호는 유명 地師(지사)가 점지해 준 화지산의 야자형 명당을 답사하는 길에 정문도와 아전 한 사람을 대동했다. 혈처와 국세를 살펴본 후 부사는 그 자리에 날달걀 하나를 묻어 두고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생기가 있는 혈처에 달걀을 묻어 두면 부화하여 닭 울음소리를 낸다는 것은 옛 사람들이 명당을 가리는 하나의 징조로 원용됐다. 달걀이 하룻밤 사이에 부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다.
 
  실망한 부사가 여러 원인을 생각해 본 결과, 명당은 분명하나 흉석이 많은 앞산(황령산)이 너무 험산이라 그 때문에 닭이 울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명당에 조상을 묻기를 단념해 버렸다. 이후 부사가 영전하여 송도로 올라갈 때 정문도는 『그 명당 자리를 저에게 주십시오』 간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아들 鄭穆(정목)에게 『나를 그 자리에 묻으라』고 명했다.
 
 
  金棺 대신 보리짚으로 棺을 싸서 장사
 
정문도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부산 시가지(양정동).

  정목이 유언대로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다음날 가보니 누군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다시 봉분을 만들어 놓은 후에 다음날 가보면 역시 누군가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있었다.
 
  격분한 정목은 밤을 새워 무덤을 지켜보았다. 한밤중이 되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무덤을 파헤치며 말하기를 『金棺(금관)이 들어갈 자리에 누가 함부로 들어가』 하는 것이었다.
 
  金棺이라면 金으로 만든 棺이라는 뜻인데 가난하게 살던 정목으로서는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상심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황금빛 나는 보리짚으로 棺을 싸서 덮으면 도깨비들이 金棺일 줄 알 것이니 그대로 해보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날 밤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자고 나서 보니 앞산(황령산)의 흉석이 지난밤의 벼락에 깨져 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덤이 무사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金棺 대신 보리짚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삼척에 있는 이성계의 조상 무덤에 얽힌 설화와 비슷하다. 필요할 때마다 「노인」 또는 「고승」이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많은 명당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다.
 
  어쨌든 정문도의 아들 정목은 아버지를 화지산에 장사 지낸 후 수도인 송도로 올라갔다. 그는 송도에서 아버지 정문도가 모셨던 前 부사 고익호의 집에서 11년이나 기거하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익호의 사위가 되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조상의 무덤 하나를 제대로 쓰기 위해 후손들이 기울이는 지극한 정성이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모의 장지를 구하지 못하여 거적에 시신을 싸서 짊어지고 야산에 내다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세태 속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부모의 장지를 좋은 곳에 마련하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는 자식들에게 문득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왔다는 설정은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까지 교훈을 준다.
 
 
  道詵國師가 예견하고 懶翁禪師가 점지한 長水黃氏 묘소
 
황희 정승

  후삼국시대에 「秘記(비기)」를 남겼던 玉龍子(옥룡자) 道詵國師(도선국사)와 고려 말 공민왕의 王師(왕사)로 指空(지공)·無學(무학)과 더불어 3大 和尙(화상)으로 불렸던 懶翁禪師(나옹선사)가 50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점지한 명당이 있다. 전남 남원읍 대강면 풍산리 산촌마을의 鴻鵠斷風形(홍곡단풍형) 묘소, 즉 黃喜(황희·1363~1452) 정승의 祖父(조부) 黃均庇(황균비)의 묘소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鼻祖(비조)인 도선국사는 남원 풍악산의 飛鴻峙(비홍치)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홍곡단풍형은 여긴데 淸相(청상: 청빈한 재상)은 어디 있는가』 했다고 한다. 그 후 『비홍치에는 청빈한 재상을 낳을 명당이 있다』는 입소문이 퍼졌으나 누구도 그 명당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수년 동안 남원의 山寺(산사)에 머문 적이 있었다. 화상은 계획한 불사를 위하여 시주가 필요했고, 때마침 화상의 이름을 듣고 비홍치에 있다는 명당을 점지받을 욕심을 지니고 있던 윤진사가 나옹화상에게 1000냥을 시주했다.
 
  나옹화상이 윤진사와 함께 비홍치를 찾아갈 때마다 고개 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려 도무지 혈처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지고 의심이 생긴 윤진사는 홧김에 나옹화상을 묶어 놓고 심한 매질을 한 후 시한을 주고 『홍곡단풍형 명당을 찾아내라』고 엄포를 놓았다.
 
  매질을 당하고 死境(사경)에 이른 나옹화상이 지금의 광한루 부근을 지나갈 때 황군서가 화상을 모시고 가서 치료해 주었다. 황군서는 더 나아가 1000냥을 윤진사에게 대납했다.
 
  윤진사의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옹화상은 어느 화창한 날 황군서와 함께 비홍치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윤진사와 함께 올 때는 안개가 자욱했던 비홍치는 거울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나옹은 그 자리에서 명당의 혈처를 잡아 주었고, 황군서는 일찍 타계한 부친 황균비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나옹화상은 황군서에게 두 가지를 일렀다. 하나는 『홍곡단풍형 혈처가 큰 인물을 배출할(出大貴之地·출대귀지지) 명당이기는 하나 후손이 가난하게 살게 될 형세(貧局·빈국)이므로 富局之地(부국지지)인 宿虎形(숙호형) 자리를 하나 더 봐줄 터이니 다른 조상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또 그는 『하루 빨리 송악으로 이사를 가라. 2代 후에는 名재상 둘이 나오고 충장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 후사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황군서는 나옹화상의 말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겼다. 화상이 추가로 잡아준 순창군 동계면 현포리 황골의 숙호형 명당에는 황균비의 부인 묘를 쓴 후 황군서는 남원골을 떠나 송악으로 이사를 했다. 그 뒤 세상에 나온 황균비의 손자가 黃喜였다.
 
  그렇다면 빈국을 보완하기 위하여 부국을 하나 더 얻었는데 어찌하여 황희 정승은 생전에 반찬 세 가지 이상을 상에 올려놓지 않았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黃정승이 청빈하게 살았던 것은 선비의 道를 실행하기 위함이지 가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황희의 아들 黃守身(황수신·1407~1467)도 父子 2代에 걸쳐 정승을 지냈다. 2代 정승을 낳은 집안이 어찌 가난하기만 했겠는가. 다른 관리들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富를 축적하지 않았고 스스로 백성들과 같이 살고자 몸을 낮추었을 뿐이었다.
 
 
  黃喜 父子 이후 인물 배출 못 해
 
  풍악산 비홍치는 글자 그대로 「기러기가 날아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이 산에는 비홍치말고도 실안치(시라재)·안치(그럭재) 등 기러기와 관련된 명칭의 고개가 두 개 더 있다. 산이 깊고 기맥이 넘쳐 예부터 명산으로 알려졌고 많은 풍수가들의 발길을 끌어온 곳이다.
 
  鴻鵠斷風(홍곡단풍)이란 『기러기가 크게 날갯짓을 하여 비상하면서 바람을 끊는다』는 뜻으로 바람을 거스르며 비상하는 기러기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鳴鴻漕風形(명홍조풍형)」이라고 하는데 「기러기가 울면서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다」는 뜻에서 비슷한 표현이다.
 
  풍악산의 주봉은 鷹峰(응봉)이다. 주봉에서 흘러온 용맥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첩첩한 白虎가 앞으로 휘돌고 靑龍이 힘차게 뻗었으며 멀리 일자문성의 안산이 名局(명국)을 빚어 놓은 한가운데로 온 산의 지기를 한데 모아 위험할 정도로 좁게 불끈 솟아오른 용맥이 있으니 그 좁은 용맥 위에 계단식으로 상하 7기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었다.
 
  맨 아래쪽부터 황전의 무덤, 그 위로 陳公(진공)의 무덤, 光州金氏(광주김씨)의 무덤, 黃廷彦(황정언)과 남원 양씨의 합장 무덤, 黃進(황진)의 부인 晉州蘇氏(진주소씨)의 무덤, 陳夢日(진몽일)의 무덤을 차례로 지나 마침내 무덤군의 맨 위쪽에 닿으니 황균비의 묘소가 나타났다. 西向(서향)이다.
 
 
  명당의 요소 못 갖춘 黃喜 父子의 묘
 
황희 정승의 조부 무덤(맨 위쪽).

  여기에 이르러 바라보니 비로소 靑龍 白虎와 안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풍악산의 용혈이 이 한 곳에 뭉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덤에서는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강한 생기가 솟았다. 아쉬운 것은 나옹화상이 말했듯이 外局(외국)의 局勢(국세)가 좋고 용혈이 강한 생기를 지니고 있으나 앞의 破口(파구: 물이 흘러가는 방향)가 直去水(직거수: 물이 직선으로 흘러 빠져버리는 형상)라 貧局이라는 점이었다.
 
  나옹화상은 이 무덤이 후세에 끼칠 영향에 대해 한마디 더 이르기를 『赤城江(적성강)의 흐름이 화산에서 멀어진 이후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무덤을 쓴 지 60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처음 장사 지낼 때는 적성강 물이 華山(화산) 바로 밑으로 흘렀으나 그 사이 토사가 밀려 적성강 한가운데 섬이 생기면서 물줄기가 바뀌어 화산에서 1km 쯤 밖으로 물러나 흐르고 있다. 몇백 년 후의 일을 내다본 나옹화상의 밝은 눈이 두렵기만 하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는 黃정승과 아들 황수신 2代 정승의 묘소가 서로 건너다보는 산록에 묻혀 있다. 그러나 두 묘소 모두 失穴(실혈)하거나 명당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 자리였다. 따라서 장수黃氏 문중은 부자 2代 정승을 배출하고도 그 뒤로는 그에 버금할 만한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다. 나옹화상이 『적성강 물이 화산에서 멀어진 후의 일은 알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현청 안에 무덤을 쓴 李穡의 조상
 
한산李氏 시조 무덤. 솔숲 저쪽에 면사무소(옛 현청)가 있다.

  우리나라에 풍수사상을 본격 도입하여 한국적 풍토에 접목시킨 인물은 도선국사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고려조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풍수사상의 근저에 자리 잡은 것이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후손이 번영을 누린다」는 發福(발복)신앙이었다. 발복신앙이 도를 넘어 이미 발복한 명문가의 묘소 인근이나 묘소 위에 몰래 투장하거나 무덤을 쓸 수 없는 자리에 무덤을 쓰는 경우도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런 풍습은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명당으로 알려진 東萊鄭氏 중시조 정문도의 묘소 부근에는 문중에서 2~3년마다 몰래 쓴 무덤을 「청소」하는데 대개 10여 구의 偸葬(투장) 사례가 적발된다고 한다. 필자도 답산을 하다 보면 봉분이 함몰된 흔적을 자주 발견하는데, 이는 누군가 남의 묘소 한가운데의 봉분을 뚫고 몰래 투장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대개 산에 쓴다. 가끔 들판이나 전답의 한가운데, 또는 마을 가운데나 부근에 쓰는 경우도 있다. 局勢가 다소 모자라더라도 생기가 넘쳐나는 眞穴이라면 그곳이 마을 가운데든 집 안이든 상관 않고 조상의 葬地(장지)로 활용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한산李氏 시조 李允卿(이윤경)의 묘소는 묘지를 山野(산야)가 아닌 人家(인가)에 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도 보통 인가가 아닌 縣廳(현청) 안에 偸葬(유장)한 것이다. 후일 그 사실이 알려졌으나, 무덤을 옮기는 대신 현청을 옮겼다. 그 묘를 쓰고 태어난 후손이 크게 출세하여 임금을 설득할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高麗 戶長 李公之墓」의 비문을 보자.
 
  <옛 노인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호장공의 묘소가 한산 고읍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관부를 옮겨 세울 때 그 담 안으로 들어갔노라고 하였다. 일찍이 거기 세운 지석을 보았으나 이를 숨기는 자가 있어 드디어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고을에 아직 살아 있는 노인이 그곳을 가리키며 슬퍼한 지 오래였으나 이제껏 찾아내지 못한 것은 대개 관아의 청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병자년에 관아의 안채가 무너졌는데 이듬해에 여러 종족들이 현감 승우를 보내어 나흘 동안이나 파헤쳐 해좌지점에서 석곽을 찾아내니 이곳은 바로 관아의 청사 터로서 과연 족보에 기재되어 있었던 바와 같았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칭송하며 이르기를 이는 틀림없는 한산이씨 묘소라 하니 전해 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이리하여 왼쪽 수십 보 되는 곳으로 군청사를 옮기고 묘소를 고쳐 봉분을 쌓았는데…>
 
  비문을 요약하면 호장공 이윤경은 한산 고읍의 관청 내부에 묻혔으나(일설에는 현청 마루 밑이었다고 전한다) 몰래 쓴 무덤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소문만 전해 내려 올 뿐 무덤의 흔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관청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때마침 현감이 한산李氏 이승우였으므로 문중이 모여 나흘 밤낮을 파헤친 결과 마침내 석곽을 찾게 되었다. 관청 안에서 몰래 쓴 무덤의 석곽을 찾아냈다면 당연히 무덤을 옮기는 것이 순리이겠으나, 거꾸로 관청을 옮기고 무덤은 봉분을 제대로 쌓아 그 자리에 두었다는 내용이다.
 
 
  文科 급제자 195명 배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윤경의 무덤 때문에 한산고을의 관청을 바로 옆으로 옮기게 한 사람은 고려 말 文臣(문신)이자 三隱(3은) 중의 한 사람인 牧隱 李穡(목은 이색·1328~1396)이었다고 한다.
 
  이윤경의 무덤 자리를 관청 내부에 점찍어 준 지사(풍수)는 고려 말 名師(명사)였던 金仁西(김인서)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호장공 이공지묘」는 현재의 한산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었다. 한산면 사무소는 지난날 한산군이 서천군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한산군청이었고, 그 이전에는 한산현청이었다. 이윤경의 비문에 새겨진 대로 옛날에는 이윤경의 묘소가 있는 자리에 군청이 있었으나 관아 내부에서 한산李氏의 무덤이 발견된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乾芝山(건지산) 來龍(내룡)이 서쪽으로 흘러와 결인속기한 후 地氣를 모아 놓은 眞穴에 정확하게 앉았다. 무덤의 坐向(좌향)은 東南向으로 「金鷄抱卵形(금계포란형)」이다. 전면으로 안산은 매우 수려하고 생기는 있으나 좌우에 靑龍·白虎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局勢는 이루지 못했으나 생기가 넘치는 眞穴에 들어간 경우이다.
 
  이 무덤의 發蔭(발음) 때문일까. 한산李氏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 195명에다 정승 4명, 대제학 2명을 배출한 굴지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문중 인사 중에는 이색 말고도 「土亭秘訣(토정비결)」로 유명한 李之?(이지함)이 있다.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한 장인
 
맨 위쪽부터 장인 박예, 朴씨 부인, 앞쪽이 김극유의 묘.

  명문 또는 명가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光山金氏(광산김씨) 문중이다. 巨儒(거유)인 沙溪 金長生(사계 김장생)을 필두로 석학과 거유를 줄줄이 낳은 집안으로 조선조에 265명의 문과 급제자(본관별 서열 5위)와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 청백리 4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靑丘永言(청구영언)」의 金天澤(김천택), 「九雲夢(구운몽)」의 金萬重(김만중)이 김장생의 후손이다.
 
  沙溪의 후손들은 부귀를 겸전하여 다른 문중의 부러움을 샀는데 풍수가들은 일찍부터 光金 발복의 근원을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沙溪의 증조부 大司諫(대사간) 金克?(김극유)의 「天馬東走形(천마동주형)」 명당의 發蔭으로 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묘소는 「300년 大發福(대발복)에 萬年香火之地(만년향화지지)」라 한다. 김극유의 묘소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김극유는 咸陽朴氏(함양박씨 11세손인 朴隸(박예)의 사위였다. 박예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뿐이었다. 박예는 유명한 지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신후지지를 마흘리의 천마동주형 명당에 정해 놓고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던 까닭에 고심 끝에 마음을 바꾸어 그 자리를 사위인 극유에게 주기로 하고 자신은 명당으로 꼽은 자리의 위쪽에 장사 지내 주도록 부탁했다. 장인 박예가 먼저 세상을 뜨자 유언대로 명당 자리 위쪽에 묻었고, 장인과 사위의 중간에 박예의 딸이 묻혔다. 그리고 맨 아래쪽 眞穴로 알고 있던 자리에 사위 극유가 들어갔다. 그 은공으로 박예는 400년 동안 外孫奉祀(외손봉사)를 받아 왔다>
 
  마흘리의 천마동주형 명당을 찾아보니 전해 오는 말 그대로 맨 아래쪽에 극유의 무덤이 있고, 가운데 朴씨 부인(극유보다 17년 전 사망), 그리고 맨 위쪽에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하고 스스로 穴이 아닌 곳에 들어갔다는 박예의 무덤이 층층으로 있었다.
 
  극유의 묘소는 풍수가들 사이에 『驚天之賢(경천지현)이 나올 자리』라고 회자되어 왔다. 경천지현이란, 沙溪 김장생을 염두에 두고 후세 사람이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필자가 살펴보니 명당 地穴에 누웠다는 극유의 묘소는 眞穴이 아닌 虛穴(허혈)이었다. 반대로 사위에게 眞穴을 주고 스스로 명당 아닌 곳에 누웠다는 박예의 무덤은 眞穴이었다.
 
  대개 眞穴은 결인 지점에서 결인의 높이만큼 상거한 곳에 맺혀지는 것이 지금까지 증명된 풍수의 상식인데, 박예의 무덤은 이 상식에도 부합한 거리에 南南東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무덤 중앙의 壙中 위치에서 강한 생기가 지금도 발산되고 있었다.
 
  선익은 적은 편이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선익의 흙을 무덤 조성 때 혹은 중수 때 봉분을 돋우는 데 사용한 흔적이 있으니 선익이 없었다거나 약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지세였다. 그리고 亥坐(해좌)는 兩性發福地(양성발복지)라 아들이든 딸이든 가리지 않고 음덕을 입히니, 결국 박예의 무덤이 스스로 외손에게 음덕을 입힌 것이지, 사위의 음덕으로 외손봉사를 받아온 것이 아니었다. 결과는 같다 하겠지만 발복의 근원은 이처럼 달랐다.
 
  광산金氏의 묘소들은 극유의 무덤 말고도 명당이 허다하다. 광산金氏는 신라 말 왕자였던 金興光(김흥광)이 광산에 거주하면서 시작되는데, 오늘날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있는 시조 김흥광의 묘소는 「飛鳳抱卵形(비봉포란형)」의 명당이다. 이 무덤으로 인하여 고려 때 平章事(평장사)를 배출하였기에 마을 이름이 지금도 「평장동」이다. 그러나 역시 光金의 묘소들 중 가장 명당에 자리 잡은 것은 마흘리의 천마동주형이고 그중에서도 眞穴은 극유의 장인 박예의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