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1851∼1895)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난처로 지은 집이다. 원래는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채가 있었으나, 사랑채와 별당채는 헐려 없어지고 현재 안채와 행랑채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ㄱ'자형의 안채와 행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안마당의 안쪽에 동남향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정면의 대청과 건넌방을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이 대청 옆에 세로로 꺾여 있는데, 부엌의 왼쪽 옆으로 칸을 넓혀서 아궁이 부엌과 찬방을 꾸며놓은 점이 특이할 만하다. 안방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제법 널찍한 크기이다. 부엌 윗부분은 다락을 만들었는데 안방에서 드나들 수 있다.
행랑채는 사대부집 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대문간의 왼쪽에 부엌과 방 3칸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마굿간·마부방·아랫방·곳간·쌀광이 있다. 행랑채는 모두 안마당쪽으로 동선이 연결되었으며 대문 옆의 방들은 모두 사랑방처럼 만들었다. 앞쪽의 사랑마당은 원형이 많이 파괴되었고, 안방 서쪽의 뒤뜰과 집 뒤로는 정원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건축된 주택으로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있다면 명품으로 손꼽힐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집 뒤 매봉재를 진산(鎭山)으로 삼고 그 줄기가 좌우로 돌아 청룡백호(靑龍白虎)를 이룬다. 집 앞은 너른 들이 펼쳐지고 멀리 낮은 토성형상(土城形象)의 산이 둘렀으며 그 너머로 도랍산이 조공(朝貢)하고 있다. 동구(洞口)에는 조그만 냇물이 흐르는데 안산(案山)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냇가를 따라 회나무를 심어 정취를 돋운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별당채는 지대석(址臺石)만 남긴 채 헐리고 없으며 튼ㅁ자 모양인 살림채만 남아있다. 외부공간은 행랑채앞의 사랑마당, 집안의 안마당, 안채뒤의 뒤뜰로 이루어졌다. 살림채는 ㄴ자형의 행랑채와 꼬리가 달린 ㄱ자형의 안채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일반적인 ㄱ자형집과 같아서 부엌, 안방을 세로로 두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하였는데 부엌 뒤(가로)로 광과 뒷방을 곁달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성은 사대부(士大夫)집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보간은 모두 간반(間半)으로 했는데 다만 뒷방쪽만 단간(單間) 크기로 만들었다. 도리간은 부엌, 안방, 대청이 2간 길이이고 기타는 단간이다.
행랑채는 사대부집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서쪽 아래로부터 부엌, 아래·위문간방, 광, 대문간, 마구간, 구들이 배치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2간부엌, 2간뜰아랫방, 고방(庫房)(쌀광), 2간광의 순서로 놓였다. 모두 안마당으로 동선이 연결되는데 전면구들들은 안쪽으로 문을 내었다. 안채의 구조는 가로, 세로 모두 1고주5량이며 대청 중앙은 긴보5량으로 처리했다. 물론 뒷방(채)쪽은 맞걸이3량이다. 대청의 앞 중도리 아래에는 기둥과 비슷한 벽선을 세워서 1고주5량처럼 만들고 여기에 분합문(分閤門)을 설치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기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지대석은 두벌대로서 화강암을 잘 다듬어 곱게 배열했고 높은 주초이다. 기둥은 네모꼴인데 실오리모로 접었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격식에 맞춰 잘 다듬었으며 장혀는 없다. 다만 종도리에만 작은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헛창방을 보냈다. 대공은 사다리꼴이며 보는 둥근 네모꼴이다. 지붕은 합각으로서 한식기와를 얹었다. 부엌 웃간 상부에는 다락을 시설했는데 그 앞에 만들어진 선반은 당초 무늬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까치발로 받치고 있어서 인상깊다. 행랑채의 구조는 맞걸이3량이며 기와지붕 맞배집이다. 전체적으로 건축기법은 조선조 말의 기법을 따르고 있으나 매우 정교하게 건축되었다. 행랑채 앞의 사랑마당은 원형이 많이 파괴되어서 정원(庭園)다운 것은 남아 있지 않으며 안마당에도 별다른 정원시설물은 없다. 그러나 안방 서쪽에 마련되는 뒤뜰에는 우물과 전나무, 잣나무, 앵두나무, 복숭아등을 심고 집뒤로는 화강암 장대석을 한벌 돌려서 나무를 식재하여 정원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행랑채 용마루 망와에 1682년(강희(康熙)21년)이라는 명기(銘記)가 있으나 실제의 건축년대는 건축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훨씬 뒤인 19세기말 정도로 추정된다. 강희년간의 망와는 경기·충청지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아마 당시까지는 제작년대를 기록했으며 그때 기와를 계속해서 새집에 옮겨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집의 명기(銘記) 있는 망와를 보면 이후에 제작했던 기와인데 거푸집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옛 것을 그대로 글자까지 모사(模寫)하여 구운 것도 있다. 따라서 이 집은 조선조말 민비(閔妃)의 피난처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는 전언(傳言)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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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https://t1.daumcdn.net/cfile/blog/997BDC4E5DF2092111)
대청마루에서 본 안방 ![](https://t1.daumcdn.net/cfile/blog/9917684E5DF2092315)
당초무늬 선반 ![](https://t1.daumcdn.net/cfile/blog/99E2B04E5DF2092417)
안채와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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