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119호 병와 이형상 유품

오늘의 쉼터 2008. 4. 30. 19:29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19호
명     칭병와 이형상 유품 (甁窩 李衡祥 遺品)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수량/면적 일괄(59점)
지 정 일 1982.08.07
소 재 지 경북 영천시  성내동 97-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전주이씨병와공파종중
관 리 자전주이씨병와공파종중

일반설명

병와 이형상(1653∼1733)은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숙종 6년(168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덕유산에 도적이 많아지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추천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도적을 평정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영조 3년(1727)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홍연정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듬해 가선대부가 되고 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그의 유품에는 인장 23점, 호패 9점, 거문고 1점, 화살 9점, 갓끈 5점, 관자 4점, 홀 1점, 옥피리 1점, 칼 2점, 표주박 2점, 벼루 1점, 추구통 1점 등이 있다.

인장 중에는 그의 이름과 호로 된 것들이 있고, 후손의 인장도 상당수 있다.

호패는 그가 문과에 급제한 해에 발급된 것이며 후손들의 것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거문고는 그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인이 한라산 백록담에서 저절로 말라죽은 박달나무로 만든 것으로 그의 선정을 기려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거문고에는 서문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홀은 상아홀로서 그가 관복을 입을 때 손에 들었던 것이다.

옥피리는 일부 파손되어 두 토막으로 갈라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평소에 애용하던 것으로 악학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칼은 곡도와 은장도 2종이 있다. 곡도는 장도로 길이 67.8㎝, 폭 3㎝, 자루 길이 12.3㎝가 되는 것으로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장도형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표주박은 허리에 찰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끈으로 매게 되어있고 벼루는 흑색의 옻칠함에 넣어져 있다. 이외에도 갓끈과 망건줄을 꿰는 관자 등이 있는데, 특히 그와 후손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갓끈과 관자의 재질은 당시의 재위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이 유품들은 그의 귀한 인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은 볼 수 없는 귀한 유물로 가치가 크다.


전문설명


병와 이형상유품은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의 전주이씨 병와공파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형상(李衡祥)의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의 십대손으로 효종 4년(1653)에 태어났다. 숙종 3년(167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동왕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다가 덕유산에 도적이 창궐하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추천되어 금산군수로 부임, 도적을 토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숙종 29년(1703)에 제주목사가 되어 3읍의 성묘(聖廟)를 수리, 덕망높은 선비를 뽑아 교학을 담당케 했으며, 고(高)·부(夫)·량(良)의 삼성사(三姓祠)를 건립하는 한편, 미풍양속을 장려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영조 3년(1727)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홍연정을 세워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후에 한성 부윤에 이르렀다. 영조 9년(1733) 81세로 졸,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유품에는 인장 23과, 호패 9점, 거문고 1점, 홀 1점, 옥피리 1점, 칼 2점, 표주박 2점, 벼루 1점, 추구통 1점, 화살 9점, 입영 6점, 관자 4점 등이 있다. 인장 중에는 그의 이름을 비롯하여 호인 병와·순옹, 중옥과 기타 당호 등이 있으며, 이밖에 상당수 후손의 인장이 간직되어 있다. 호패 중에는 그가 28세(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해)에 발급된 것이 있으며, 이여숙(李如淑) 3점, 이약송(李若松) 1점, 이후송(李後松) 1점, 이기송(李期松) 1점, 이동세(李東世) 2점으로 되어 있다. 거문고는 그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옹이 한라산 백록담에서 저절로 말라죽은 단목으로 만들어 그가 목사를 사임하고 돌아올 때 (숙종 20년(1703)) 그 선정을 기려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금(琴)에는 단금명(檀琴銘)과 서(序)가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무이동(舞以桐)밀이단시(以檀柴 비고야(非古也)연이한나위역양(然以漢拏爲역陽)이적송위단군(以赤松爲檀君)대점야필 (帶點爺筆)자탐라휴환(自耽羅携還)칙후지시령(則後之視令)역고야 (亦古也), 황이성청절이소월(況爾聲淸切而疏越) 오불용촉언속언자음(吾不容燭焉俗焉者音) ?부인태고(?不人太古)이기태고재 (而器太古哉)명(銘)과 백녹담우선담여야(白鹿潭友仙淡如也)영주해양서세여야(瀛州海洋書洗如也) 병와지고역여야(甁窩之鼓繹如也)란 서가 있다. 홀(笏)은 상아홀로서, 그가 관복에 사용하던 것이다. 옥피리는 현재 일부 파손되어 두 토막으로 갈라져 있다. 이것은 그가 평소 애용했던 것이다. 그는 악학(樂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가 깊어 그에 대한 저술도 많이 남아있다. 칼은 곡도(曲刀)와 은장도가 2종이 있다. 곡도는 장도로 길이 67.8㎝, 도폭 3㎝, 병장 12.3㎝이다. 이 칼은 임진왜란 이후의 장도형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길이 71㎝의 철제 화살과 함께 그가 문무를 겸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주박은 모두 흑색으로 옻칠을 하였으며, 허리에 찰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끈을 맬 수 있게 되어있고, 크기는 각각 다르다. 벼루는 흑색 옷칠함에 넣어져 있는데, 크기는 길이 16.8㎝, 두께 3.4㎝, 넓이 11.6㎝로, 그가 일상에 사용했던 것이다. 흑색으로 옷칠한 추구통에는 죽첨(竹籤)이 가득 들어있으나, 사용자는 확실하지 않다. 입영(笠纓) 중에는 상아입영·호박입영·옥입영·흑옥입영 등이 있는데, 이 유품은 그를 비롯하여 후손들이 사용했던 것이라 한다. 관자(貫子)는 망건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옥관자 1쌍, 호박관자 1쌍이 있다. 위의 입영의 장식재료 관자의 재질등은 당시 품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였다.

이 유품들은 그의 고귀한 인품과 함께 이러한 유품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감안해 볼때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병와 이형상 유품

인장

호패

거문고

거문고

거문고

거문고

옥피리

표주박

벼루

추구통

화살

입영

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