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117호 청원 전(傳) 박장군 묘 출토유물

오늘의 쉼터 2008. 4. 30. 16:18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17호
명     칭청원 전(傳) 박장군 묘 출토유물 (淸原 傳 朴將軍 墓 出土遺物)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복식공예/ 의복
수량/면적 일괄(35점)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충북대학교
관 리 자충북대학교박물관

일반설명

충청북도 청원군 노계산에서 대청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박장군 묘라고 알려진 무연고 분묘를 이장하던 중에 나온 의복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시대 남자 겉옷의 일종인 중치막 2점, 직령포 2점, 관복, 구의, 도포, 동방형포(東方型袍)가 각 1점씩 나왔는데 특히 저고리 11점, 적삼 2점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겹유고, 겹유바지, 상의에 딸린 치마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조선초의 단배자와 숙종이후의 당의의 중간치인 조끼모양의 배자 저고리가 3점 있는데 이들의 길이는 각각 66㎝, 65㎝, 66㎝이다. 또한 소매의 끝단에는 다른 천으로 덧댄 삼수가 10∼15㎝정도 달려있고, 적삼의 경우는 39㎝정도이고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19㎝나 되어 저고리 길이보다 소매가 더 길다.

깃모양이 둥글어 단령이라고 불리우는 옷에는 옆에 협삼(脇衫)이 달려있어 김위묘에서 나온 의복과 비슷하고 흰색의 무명으로 만든 구의의 앞 여밈은 두루마기와 같다. 앞길 98㎝, 뒷길 60㎝로 소매는 단령이나 창의나 모두 중간 크기로 되어있어 임진왜란 전후의 다른 포들과 비슷하다.

도포는 현존하는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도포가 문헌상 선조대에 비롯되었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매통이 32㎝로 밋밋하여오늘날과 같이 도포의 소매가 넓어진 것은 18세기부터 임을 알 수 있다. 구의는 백색 무명으로 되어있고, 직령포는 짙은 청색의 소매가 좁은 포로서 소매끝에는 33㎝의 삼수가 달려있는데 왼쪽 소매를 조각조각 이은 것이 이휴정묘에서 출토된 직령포와 비슷하다.

창의는 청색의 목면으로 지었으며 소매가 좁고 70㎝의 옆트임이 있다. 동방형포는 백색 명주로 만든 중들이 입던 옷의 일종인 납의로서 소매가 길고 저고리의 길이가 길다.

무명바지는 여자용으로 보이며 바지밑이 있고 바지부리의 넓이가 넓다. 치마는 진한 갈색의 모란무늬가 있는 치마와 백색 명주치마가 있다.

모자는 높이 17㎝, 아래직경 25㎝, 둘레가 50㎝인 청색 비단으로 된 모자와 흰색과 갈색과 명주로 된 작은 모자가 있다. 이밖에 누비치마와 흰색의 무명 홀이불과 천금(시신을 넣는 관의 뚜껑에 안에 덮는 이불), 멱목(시신의 얼굴을 싸던 천), 악수(시신의 손을 싸던 천)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옷의 형태와 질감, 무늬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임진왜란 전후의 의복으로 보이며 당시의 사회상이나 의복 양식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설명


이 유물은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 노계산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대청댐 수몰지역내에 있던 무연고 분묘를 이장하던 중에 출토된 유의이다. 이 유의는 박장군묘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분묘에서 출토된 것이므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유의의 형태와 질감, 무늬 등을 통해 볼때 임진왜란 전후의 의복으로 판단된다. 수습된 유의 가운데 저고리의 옷감에는 동자좌불상(童子座佛像)과 그 좌우에 연꽃무늬와 상부에 만자(卍字)무늬가 있어 특이하다. 또한 시신의 머리 모양이 쌍상투를 틀고 있는데, 이는 총각의 쌍발로서 당시 일부 남자들의 머리모양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복식면에 있어서도 출토유의는 그 종류가 다양해서 선조대 전후의 복식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종류별로는 중치막(창의) 2점, 직령포(直領袍) 2점, 관복(冠服), 구의, 도포(道袍), 동방형포(東方型袍)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그 중 특이한 것은 저고리 11점, 적삼(赤衫) 2점으로 조선전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겹유고(겹유袴), 겹유바지, 상(裳)이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우선, 조선시대 초기의 단배자(短褙子)와 숙종이후의 당의(唐衣)의 중간치인 배자(褙子)저고리 3점은 각각 길이(트임)가 66cm(27cm), 65cm(27cm), 66cm(29cm)이다. 또한 수단(袖端)에 삼수가 10~15cm정도 달려 있고, 적삼의 경우는 39cm정도 달려 있고 화장이 119cm로 저고리 소매보다 길어 한삼(汗衫)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철릭이 소매가 긴 것에 비해 다른 점이다.그 중 수단(袖端)에 4cm 정도의 회장(回裝)이 달려 있는 저고리도 있다.

단령(團領)은 옆에 협삼(脇衫)이 달려있어 김위묘출토유의와 같고, 구의는 겉섶을 양쪽에 달아 고리단추로 여미게 되어있으며 앞의 여밈은 두루마기와 같다. 앞길이는 98cm이며 뒷길이는 60cm로 되어 있다. 소매는 단령이나 창의가 밋밋한 중간수로 되어 있는 점도 임란전후의 다른 유의와 같다. 아울러 도포(道袍)는 현존하는 유의중 최고의 것으로 문헌상 도포가 선조대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특이한 점은 도포의 소매가 소매통이 32cm로 밋밋한 것이 오늘날 도포의 소매가 넓어진 것은 18세기에 변형된 것임을 나타낸다.

구의는 소색 무명을 겹으로 만들었고 겉섶이 겹치게 되어 있으며, 고리 단추가 3개 달려있다. 직령포는 아청색목단겹유착수로서 소매에 33cm의 삼수가 달려 있는데 좌수는 조각조각 이은 것으로 이휴정(二休亭)옷의 직령포와 같다.

중치막은 청색 목면 겹으로 역시 착수이고 70cm의 옆트임이 있다. 동방형포는 소색무명이며 겹유 바지는 바지밑이 있고 바지부리의 넓이가 40cm로 여자바지 인것같다. 치마는 진갈색 목단 당초문단과 소색명주 치마가 있다. 모자는 높이 17cm, 아래직경이 25cm, 둘레가 50cm되는 청색견(靑色絹)모자와 또한 소색, 갈색, 명주 소모자가 각각 있다. 그 중 하나는 6폭의 삼각주를 합하여 높이 14cm, 지름 30cm이고 다른하나는 아래가 10cm, 높이 15cm의 삼각주 6개를 만든 후 아래를 밑단 높이 10cm의 천으로 마무리하여 높이 25cm, 둘레 58cm로 만들었다. 이는 초기의 만주족 모자같아 이휴정(二休亭)의 모자와 유사해서 우리의 풍속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 밖에 누비치마, 소색 무명 홑이불, 천금, 멱목, 악수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청원 전(傳) 박장군 묘 출토유물

후곡리 소색명주삼수 저고리

남색명주누비겹유 저고리

소색명주누비겹유 저고리

소색명주누비겹유 저고리

남색명주겹유 저고리

갈색명주겹유 저고리

소색명주겹유 저고리

갈색목단문단겹당 저고리

갈색목단문단겹당 저고리

갈색목단문단겹당 저고리

갈색운문단겹당 저고리

아청색소화당초문단겹당 저고리

소색무명 적삼

소색삼베 관복(단령)

소색무명겹 창의

소색무명겹 창의

청색무명겹 창의

아청색무명겹유 직령포

소색무명 도포

소색명주누비 동방형포

농갈색무명 직령포

소색무명겹유 창의

청색무명겹유고

소색무명겹유 바지

소색명주겹유 누비상(내작무명)

진갈색목단당초문단겹치마

소색명주겹유 치마

소색무명홑이불

농갈색무명천금

소색명주명목

세조대

소색명주악수

소색견편직모자

상투

소색명주감투

갈색명주감투

갈색명주감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