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조는 동이족이다
환웅이 신시에 도읍하고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일컫는 삼황오제 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삼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말하며.,
오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그런데 뒤에 일어난 오제는 삼황에 뿌리를 두고있기 때문에,
삼황의 뿌리만 밝히면 중국의 시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삼황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훤원]을 말하고,
오제는 [소호금천] [전웅고양] [제곡고신] [제요도당] [제순유우~순임금] 등을 말한다.
그 마지막인 순임금 시대 이후에 차례로 일어난 왕조가 [하] [은] [주] 이다.
중국인들은 이들 삼황오제를 자신들의 시조라하여 뒤에 일어난 모든 왕조의
뿌리를 이들에게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황오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고사변] 은 전 7 권으로된 방대한 문헌으로, 현대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이다. 바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제준][제곡][제순] [소호] 그리고 [설]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삼황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가 세운 [하] 나라도 멸망한뒤 들어선 나라가 [은]나라이다.
일명 [상]나라 라고도 하는 은나라는 저 유명한 갑골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데 [고사변] 은 고대 중국의 문헌과 근래에 발굴된 유물등에 근거하여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은나라는 그 시조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를 갖고 있는데,
고구려, 신라, 가야,의 예에서 보듯이 난생설화는 동이족의 공통된 특징이다.
어쨌든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사변] 은 삼황오제 가운데 [태호...태호복희]
[제준...은나라에서 섬기던 동방의 상제] [제곡...제곡고신] [제순...순임금]
[소호..소호금천] 와 은나라의 조상이라고 하는 [설] 등이 모두 동이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중국의 정사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 도
삼황오제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황제훤원] 으로부터 순임금. 우 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일한 성이며,
그들이 세운 나라의 호칭만 달랐을 뿐이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결국 고대 동이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말이된다.
당시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그 뒤의 단군 조선에서 갈라져나간
[구한족], 즉 구이들은 중원대륙의 대부분을 활동무대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서량지는 [중국사전사화]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부터 은나라와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활동범위는 실로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산동성 존부와 하북성의 발해 연안, 하남성의 서북, 안휘성의
중북부지역, 호북성의 동쪽, 그리고 요동반도(요녕성) 와 조선반도 등
고아대한 구역이며, 산동반도(산동성)가 그 중심 지역이다.]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중국인들의 시조인 삼황
오제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 스스로 수많은 자료와 문헌,
유물등을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며, 저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자신들의 뿌리를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을 할리는 만무하다.
결국 고대 중국의 역사는 곧 동이족의 여러 지류가 중원으로 흘러 들어가서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성립된 왕조들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도 넓은 대륙에 산재한 56 개의 소수민족은 그 잔영임에 틀림이 없다.
수많은 중국의 사서들이 고조선의 실체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동이족을 한낱
오랑캐로 비하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것도 이러한 저들의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식민사관, 반도사관, 사대사관,을 계승하고있는
한국의 사학자들이다.
남의 것을 떠받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역사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사서에는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엄연히 동이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음에도, 한단의 역사는 물론 그 이후의 고조선의 역사조차
철저히 무시되어 고대 동이족의 역사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공중에
붕 떠있는 실정이다.
하다못해 고구려의 역사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 보아도 한국 사학계의
역사 인식이 어느정도로 한심한 수준인가를 여실히 알수있다.
5대 한웅과 태호복희
앞에서 본것처럼 중국의 학자들조차 자신들의 시조가 동이족임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제 이러한 사실을 우리의 역사와 문헌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로하자.
태호복희는 삼황오제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제왕으로, 그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앞서[고사변]에서 말한것과 같다.
그런데 [태백일사]는 태호복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웅 천황에서 5대를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있었다. (...)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 한웅(6대한웅) 이라하고 막내는 [태호라 하니 복희] 라고도 한다]
삼황오제 중 첫 번째인 [태호복희] 가 바로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 의
막내아들이라는 분명한 기록이다. 태호복희는 5대 한웅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배달국에서 우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중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태백일사] 는 이러한 사정에 대해 여러 문헌을 인용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밀기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풍씨로 성을 삼았다. (...) 지금 산서성의 제수에 [희족]의 옛거처가 남아있다.]
[대변경] 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고 신시의 계해로 시작되는 역법을 갑자로 시작되는 것으로 고쳤다.(...) 복희의 무덤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태호복희는 배달국의 5대 황웅의 막내로 태어나 배달국(신시)에서 우사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환역이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를 복희 팔괘, 혹은 선천 팔괘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국 고대 동양의 음양오행설은 환단의 문화에서 나온것임을 짐작할수 있는데, 이러한 체계는 천부인 3 개의 가르침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서량지 교수도
[중국사전사화]에서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 이며 소로 이전에 이미 발명 되었다.]
또한 중국의 학지 필장복은 자신의 저서 [중국인종 북래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 인조의 오�관념은 원래 동북아시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역법과 오행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생각하면, 중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역법과 음양오행이 모두 동이족의 문화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편 복희의 성이 풍씨라고 하였는데, [사기] 에도 복희는 풍씨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복희는 당시 동이족의 아홉갈래인
[견이, 방이, 적이, 백이, 우이, 황이, 현이, 양이, 풍이,]
가운데 풍이에 속해 있었음을 알수 있으며, [규원사화] 에도 복희는 풍족이기 때문에 성을 풍씨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태백일사] 는 복희가 배달국의 5대 한웅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러한 복희의 탄생에 대해 [사기]와 [중국고대신화]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복희의 어머니 화서시가 어느날 동쪽에 있는 울창한 숲속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그녀는 뇌택 이라는 연못가에서 노닐다가 우연히[대인] 의 발자욱을 밟게 되었는데, 그후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이가 곧 복희이다.]
여기서 복희의 어머니 화서씨가 동방에 있는 뇌택이라는 연못으로 갔다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뇌] 는 팔괘 중에서 진 괘를 말하며, 진괘는 팔괘중 동방과 동북방에 배치된 괘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은 복희가 배달국에서 출생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수신 하백의 딸이며 신라의 박혁거세와 왕비 역시 모두 우물가에서 태어난것에서 알수있듯이 , 수생설은 난생설과 함게 동이족 탄생설화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 한다면 복희가 뇌택이라는 연못가에서 잉태되었다는 것
역시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복희의 어머니 화서씨가 뇌택에서 대인의 발자국을 밟고난뒤에
복희를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대인이 환웅을 의미한다는데 대해서는
이미 검토했었다.
[사기] 에서는대인을 신인 리라고 하였는데이는 신시의 대인을 말하는
것이며, 또 삼국유사 에서는 환웅을 신웅 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므로 대인과
신인은 모두 배달국의 역대 한웅을 일컫는 말임을 짐작할수 있다.
한편 복희의 부인 혹은 누이동생 이라고 하는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복희와 여와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농사와 의약의 시조로 불리고 있는 염제신농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태백일사]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신농] 은 여러 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그는 뒤에 열산으로 옮겨갔다.]
갈라져 나간 소전 이라는 사람이 염제신농의 부친인 것이다.
그 소전은 배달국의 8대 [안부련] 한웅의 명으로 강수라는 곳에서 병사를
감독하는 직책에 있었다.
[사기] 에 의하면 염제신농은 성이 강 씨 인데, 이는 신농이 강수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전의 아들 신농이 처음 정착한 곳도 복희씨가 도읍했다는 하남성의[진]
이며, 후에 산동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열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신농은 소진의 아들이며 소호와 함께 고시씨 방계 지류이다]
했는데, 고시씨는 배달국에서 대대로 우가의 직책에 있으면서 곡식, 즉
농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먼 후손이라는 것이다.
소전이 고시씨의 방계지류라면 결국 염제신농 역시 고시씨의 집안이 된다.
여기서 다시 농사와 곡식을 관장하고 있던 고시씨의 집안 내력과 신농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규원사화]의 기록을 보자.
고시씨는 짐승을 잡아서 기르는 법과 농사짓는법, 그리고 불씨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쳤다.]
만물이 각기 자리를 갖춤을 보시고는 [고시례]로 하여금 먹여살리는 임무를
담당하게하니 이를 주곡이라 한다.]
주관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곡식, 질병, 생명, 형벌, 선악, 등을 5 사라고 하며,
이러한 5사를 관장하고 있던 다섯가지 관직을 5 가라고 했다.
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에서 농사의 시조라는 염제신농을 [인신우수] 라
하여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사기] 삼황본기의 기록을 보자.
즉 고시씨에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대목임을 알 수 있고,
아버지 소전을 따라 중원으로 들어가 농사를 가르치고 의약을 만들어
의농의 시조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신농이 대대로 [우가[라는 직책에 있었던 배달국 고시씨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기]에서 그를 가리켜 인신우수라 한 것이며,
그배경에는 배달국의 역사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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