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09호 남양주 사릉

오늘의 쉼터 2008. 2. 20. 06:58


종     목 사적  제209호
명     칭남양주 사릉 (南楊州 思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160,232㎡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65-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동부지구관리소

일반설명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명등석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전문설명


사릉(思陵)은 제6대(第6代) 단종대왕(端宗大王)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릉(陵)이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는 본관(本貫)이 여산(礪山)이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여(女)로서 세종(世宗) 22년(1440년)에 탄생(誕生)하였고 생월생일(生月生日)은 미전(未傳)이다. 단종(端宗) 2년(1454년) 1월 22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15세였다. 단종(端宗) 3년(1455년) 윤(閏) 6월 11일 단종(端宗)이 왕숙(王叔)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이 됨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올렸다. 세조(世祖) 3년(1457년) 6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성삼문(成三問) 등의 상왕복위사건(上王復位事件)으로 단종대왕(端宗大王)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니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으로 내려졌으며 이 해 10월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 의하여 사사(賜死)되자 왕후(王后)는 궁실(宮室)을 떠나 성동(城東)의 숭인동(崇仁洞)에 초가수간(草家數間)을 지어 거처(居處)하면서 정업원(淨業院) 주지(住持)라 칭하고 왕실(王室)에서의 수급(需給)을 일체(一切) 고사(固辭)하여 백의소찬(白衣素饌)으로 종생(終生)하였다.

대왕(大王) 단종(端宗)의 능소(陵所) 영월(寧越)인 동쪽을 바라보기 위하여 올랐던 봉우리는 동망봉(東望峰)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정업원(淨業院) 터에 영조(英祖) 어필(御筆)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碑閣)이 있다.

중종(中宗) 16년(1521년) 6월 4일 소생(所生) 없이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82세였으며,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남(南) 군장리(群場里) 계좌정향(癸坐丁向)(북북동(北北東)에서 남남서향(南南西向)) 언덕에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예(禮)로 장사(葬事)지냈다. 왕후(王后)는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정씨가(鄭氏家)의 묘역(墓域)에 장례(葬禮)하였으며, 봉사(奉祀)도 정씨가(鄭氏家)에서 하여왔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단종(端宗)의 묘호(廟號)가 추복(追復)되고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에 부묘(부廟)되면서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사릉(思陵)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고, 능침(陵寢) 앞에 상석(床石)이 1좌(座) 있으며,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양석(羊石) 1쌍과 호석(虎石) 1쌍을 능침(陵寢) 주위(周圍)에 배치(配置)하고,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을 세웠다. 한 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설(配設)되고, 중앙(中央)에 사각옥개형(四角屋蓋形) 명등석(明燈石)이 설치(設置)되었으며, 제3계(第3階)는 없다.

영월(寧越) 장릉(莊陵) 추봉시(追封時)에도 병석(屛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수석(獸石)을 각 1쌍으로 한 것은 추봉릉(追封陵)의 예(例)에 따른 것이고 사각옥개형(四角屋蓋形) 명등석(明燈石)은 장릉(莊陵)과 같은 것으로 숙묘(肅廟) 연대(年代)의 양식(樣式)이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정순왕후사릉(朝鮮國定順王后思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47년(1771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재실(齋室)은 홍살문(紅箭門) 동남측(東南側) 금곡-퇴계원문(金谷-退溪院問) 대로변(大路邊)에 있다.




사릉 정자각 설경

사릉 설경

사릉 석물

사릉 비각

사릉 재실

사릉 제향

사릉 원경

사릉 재실 앞

사릉 좌측 석물

사릉 우측 석물

사릉 예감

사릉 혼유석

사릉 봉분 뒷쪽

사릉

사릉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