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의 자리는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5년(1405)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것은 태조가 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방원(후에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하였다. 무덤을 옮긴지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왕후의 무덤인 보호하였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의 무덤 제도는 고려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정릉의 사각명등석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인 현재 정릉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설명
조선조(朝鮮朝) 태조대왕(太祖大王)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릉(陵)이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본관(本貫)이 곡산(谷山)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추증(追贈)된 강윤성(康允成)의 여(女)로 탄강(誕降)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이고 6월 14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친가(親家)는 고려조(高麗朝)의 권문세가(權門勢家)였다. 태조(太祖)는 여대(麗代)의 풍습(風習)에 따라 향리(鄕里)와 개경(開京)에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각각 두었는데 강씨(康氏)가 경처(京妻)였다. 향처(鄕妻)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한씨(韓氏)는 태조(太祖)가 등극(登極)하기 전인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3년(1391년) 9월 23일 이미 서거(逝去)하였으며, 강씨(康氏)는 태조(太祖)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원년(元年)(1392년) 8월 7일 현비(顯妃)로 책봉(冊封)되었다. 현비(顯妃)는 조선조(朝鮮朝) 최초(最初)의 왕비(王妃)였고 태조(太祖) 5년(1396년) 8월 13일 병환(病患)으로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 사제(私第)에서 승하(昇遐)하였으며 소생(所生)은 방번(芳蕃), 방석(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의 2남1녀이고 춘추(春秋)는 미전(未傳)이다. 이 해 9월 28일 현비(顯妃)의 존호(尊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로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으로 하였다. 이듬해인 태조 6년(1397년) 1월 3일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현 서울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예장(禮葬)하였으며 태조(太祖)의 뜻에 따라 정릉(貞陵)을 풍후(豊厚)히 조영(造營)하였다 한다. 강비(康妃) 소생(所生) 방번(芳蕃)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던 방석(芳碩)은 태조(太祖) 7년(1398년) 8월 왕위계승(王位繼承) 다툼인 왕자(王子)의 난(亂)으로 죄사(罪死)되었으며, 태조(太祖)는 이 해 9월 5일 제2자(第2子) 방과(芳果) 정종(定宗)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위(上王位)에 있었고 정종(定宗) 2년(1400년) 11월 11일 정종(定宗)이 왕위(王位)를 태종(太宗)에게 양위(讓位)하였다. 태종(太宗) 5년(1405년)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왕(帝王)의 릉묘(陵墓)가 모두 도성(都城) 밖에 있는데 정릉(貞陵)만이 도성(都城) 안에 있고 릉역(陵域)이 광대(廣大)하다는 논란(論難)이 있었고 사신(使臣)이 묵는 관사(館舍)에 가까우니 도성(都城) 밖으로 천장(遷葬)하여야 한다는 상언(上言)이 잇따름에 태조(太祖) 승하(昇遐) 후인 태종(太宗) 9년(1409년) 2월 23일 도성(都城) 밖 양주(楊州) 남(南) 사을한록(沙乙閑麓) 경좌갑향(庚坐甲向)(서(西)에서 동향(東向))에 천장(遷葬)하고 구릉(舊陵)의 목재(木材)와 석재(石材) 일부는 태평관(太平館)에 쓰고 태종(太宗) 10년(1410년) 홍수(洪水)에 유실(流失)된 광통교(廣通橋) 복구(復舊)에 썼다.
정릉(貞陵)은 종묘(宗廟)에 부묘(부廟)되지 아니하여 봉번(奉蕃)이 없은지 오래되어 후릉(后陵)이 아닌 민묘(民墓)나 다름이 없는 형편(形便)이었고, 릉(陵)의 존재(存在)마저 잊혀졌으나 200여년(餘年)이 지난 선조대(宣祖代)에 이르러 왕후(王后)의 친정(親庭) 후손(後孫)이 국묘태사자(國墓泰祀者)로서 군역면제(軍役免除)를 선조(先祖) 가전(駕前)에 호소(呼訴)함에 정릉(貞陵)을 수탐(搜探)하였으나 능침(陵寢)을 찾지 못하던 중 변계량(卞季良)의 이장축문(移葬祝文)으로 찾았다고 전한다. 그후로도 한식절(寒食節)에만 봉사(奉祀)하는 등 박대(薄待)가 여전하였으나 현종대(顯宗代)에 이르러 송시열(宋時烈) 등의 상소(上疏)에 따라 현종(顯宗)10년(1669년) 9월 29일 정릉(貞陵)이 회복(回復)되고 현비(顯妃)의 태묘배향(太廟配享)이 이루어지고 의례(儀禮)에 의한 상설(象設)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정릉(貞陵)은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였다. 릉전(陵前)의 상석(床石) 1좌(座)와 그 양측(兩側)의 망주석(望柱石)이 1쌍이고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1쌍이 배치(配置)되었으며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제1계(第1階)를 이루고 있다. 제2계(第2階)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치(配置)되었으며 중앙(中央)에 사각옥개형(四角屋蓋石)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고 제3계(第3階)는 없다. 상설(象設) 내용(內容)으로 볼 때에 상석(床石)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과 명등석(明燈石)은 구릉(舊陵)의 것을 이설(移設)한 것이며 현종(顯宗) 10년(1669년) 정릉(貞陵) 회복시(回復時) 상설의물(像設儀物)을 설치(設置)함에 있어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호석(虎石), 양석(羊石)은 각 1쌍으로 반감(半減)하고 제3계(第3階) 무석(武石) 또한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비릉(妃陵)에 비하여 빈약(貧弱)하다.
정릉(貞陵)은 조선건국(朝鮮建國) 후 최초(最初)로 설릉(設陵)되었으며, 조선왕릉(朝鮮王陵)의 능제(陵制) 상설(象設)이 고려왕릉제(高麗王陵制)를 기본(基本)으로 하고 일부(一部)를 변화(變化) 수용(受容)하였던 것이므로 구(舊) 정릉(貞陵)의 실재(實在)를 현재(現在)로서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하겠으나 정릉(貞陵)의 사각명등석(四角明燈石)이 여말(麗末)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현(玄)·정릉(正陵)의 명등석(明燈石)을 충실(充實)히 따르고 있음을 보아 조선왕릉(朝鮮王陵)이 고려왕릉(高麗王陵)을 규범(規範)으로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북측(北側)에 비각(碑閣)이 있고, 비면(碑面)에는 전서(篆書)로 대한신덕고황후정릉(大韓神德高皇后貞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어필(御筆)로서 광무(光武) 4년(1900년)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있다. 재실(齋室)은 1970년대 초(初)에 노후(老朽) 멸실(滅失)되었다. 구(舊) 재실지(齋室址)의 북측(北側)에 있는 한식(韓式) 건물(建物)은 정릉관리사무실용(貞陵管理事務室用)으로 건립(建立)된 것이다.
정자각 주변 정릉 홍살문에서 본 정릉 나무사이에서 본 정자각 및 봉분 정자각 및 봉분 우측에서 본 정자각 정면에서 본 정자각 나무잎에 가린 정자각 나무사이에서 본 정릉 정릉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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