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전문설명
경주(慶州)의 남산동록(南山東麓)에 있으며 신라(新羅) 21대왕(代王)인 소지왕시대(炤知王時代)에 삼국유사권일(三國遺事卷一) 사금갑(射琴匣)의 전설(傳說)과 관계 있는 못이다.
소지왕(炤知王)이 즉위 10년(A.D 488)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亭)에 행행(行幸)하였는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서 울어대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지껄였다. 왕(王)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라가 보도록 하였는데,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자 두 마리의 멧돼지가 한창 싸움질을 벌이고 있었다. 기사는 돼지들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한창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낙심한 기사가 근처를 배회하고 있노라니 문득 길옆의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 한 통을 전해왔다. 편지의 겉봉에는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을 것이오 열어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여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왕은 희생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편지를 열어보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관(日官)이「두사람이란 일반인이요 한사람이란 왕을 가르킨다」고 상주하니 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열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금갑(琴匣)을 쏘아라」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즉시 궁으로 돌아와서 금갑(琴匣)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 안에는 내전(內殿)에서 불사(佛事)를 맡아 행하는 승(僧)과 궁주(宮主)가 상간(相奸)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사람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풍속에는 정월의 초해일(初亥日), 초자일(初子日), 초오일(初午日)에는 백사(百事)를 삼가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하여 까마귀에게 제사지내 주는 등의 풍속이 생겨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이란 전술(前述)한 설화(說話)에 등장하여 소지왕(炤知王)을 이롭게 해준 멧돼지, 쥐, 까마귀 같은 짐승에서 연유된 것으로 생각된다.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서(封書)를 왕에게 전했다하여 서출지(書出池)로 불리워지는 이 못은 장축 86m, 단축이 50m에 이르는 타원형이다. 이 연못 속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섬이 없으며 연못 둑에 수백년 된 배롱나무가 30여주, 소나무 20여주, 향나무, 은행나무 등이 함께 수림을 이루고 있다.
1664년 임적(任勣)이 서출지 연못가에 석축을 쌓고 이요당(二樂堂)을 건립하였다. 이요당(20평)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의 ㄱ자형 정자 건물로서 주위는 막돌담(높이 2m)을 쌓아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요당에 앉아 서출지를 바라보면 신라의 설화(說話)가 피어나는 듯 하다.
경주 서출지 전경 경주 서출지 전경 경주 서출지 전경 경주 서출지 경주 서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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