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전문설명
이 절을 창건한 것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元>나라를 거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으로 전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岩寺修造記>》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스승의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秘記>' 즉 이곳에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佛法>이 흥한다는 믿음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제자 각전<覺田> 등이 262칸의 대규모 사찰의 조성공사를 마쳤다 한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본산으로 승려의 수<數>가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 또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세종조에 들어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회암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절에 승니<僧尼>가 250명이 있었고 규모가 1만여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會岩寺重創記>》에 의하면 성종 3년(1472)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하성부원군 정현조<河城府院君 鄭顯祖>에게 명하여 절을 중창<重創>하였는데 승려 처안<處安>으로 하여금 공역<工役>을 담당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석단<石壇>과 석벽<石壁>, 기단계석<基壇階石> 들은 이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후 명종 때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은 보우<普雨>는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책을 펴 회암사는 전국제일의 수선도장<修禪道場>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고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명종<明宗> 20년(1565) 보우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졌다. 이후 순조<純祖> 21년(1821)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등 세 화상의 부도<浮屠>와 비<碑>를 중수하고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 하여 절이름을 계승하였다. 이 사찰은 가람배치에 있어 평지가 아닌 산간에 있는 절이면서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남회랑<南回廊>을 둔 것은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배치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로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되게 주요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남측에서부터 3칸의 게단을 오르면서 제1단지에서 좌우로 당간지주가 놓이고,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제2단지인데 여기에는 중앙에 천랑만이 남아 있고 좌우 평탄한 공지로 남아 있다. 건물터는 제3단지부터 노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단을 올라서자 바로 3칸×2칸의 문터의 토석과 이를 좌우로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추정 남회랑터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또 중앙에는 역시 남북으로 뻗은 천랑이 있고 그 서편에 종루터와 동편에는 향적전터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제3단에도 앞에는 문터가 있고 천랑 좌우에는 큰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제5단지에는 천랑 서편에 서승당<西僧堂>터와 동쪽에는 4단지와 같이 걸쳐놓은 동객실<東客室>터가 있다. 제6단지에는 천랑을 따라 올라가면 이 사찰의 가장 중심건물인 보광전<寶光殿>터가 잘 남아 있는데 정면이 7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위로 제7단지에는 설법전<說法殿>과 사리전<舍利殿>이 있었고, 제8단 좌우에는 대장전<大藏殿>과 나한전<羅漢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터에서 500m쯤 올라가면 현재의 회암사가 있는데 주요 건물은 1977년에 세운 대웅전<大雄殿>과 삼성각<三聖閣>·영성각<影聖閣> 등이 있다. 그 부근에 거리를 두어 남아 있는 중요 문화재들을 들면,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모신 묘탑<廟塔>이며 1407년에 세워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부도<檜岩寺址 浮屠>와 조선 초기에 건립된 보물 제389호 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나옹선사 부도<懶翁禪師 浮屠> 및 석등<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연고가 확실치 않으나 보우<普雨>의 부도라고 전하고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 부도<檜岩寺址 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어사대비<御射臺碑>·동간지주<瞳竿支柱>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맷돌 등이 있다. 1377년(우왕3)에 세워진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 사비<檜岩寺址 先覺王 師碑>는 나옹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碑石>이나 1997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및 석등<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연고가 확실치 않으나 보우<普雨>의 부도라고 전하고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 부도<檜岩寺址 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어사대비<御射臺碑>·동간지주<瞳竿支柱>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맷돌 등이 있다. 1377년(우왕3)에 세워진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 사비<檜岩寺址 先覺王 師碑>는 나옹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碑石>이나 1997년 화재로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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