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전문설명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 있는 삼국(三國)시대의 토축(土築)성곽으로 둘레 약 1,300m이다. 금호강(琴湖江)과 신천(新川)이 감싼 평원에 다시 달서천(達西川)이 휘감은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루(土壘)를 쌓은 것으로, 안쪽 경사면은 약 6m 정도이고, 바깥쪽은 9m 이상의 험준한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1968년 10월에 현재의 달성 공원 입구에서 남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의 바깥쪽 성벽의 일부를 조사하여, 초기 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지역 일대에 정치 세력이 성장하면서 초기적 국가 형태를 형성한 단계에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新羅) 점해왕(粘解王) 15년(216) 2월에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으로 성주(城主)를 삼았다고 하였는 바, 이것이 곧 달성의 축조 기록이라 믿어지고 있다. 조선(朝鮮) 시대의 각종 지리지(地理誌)들에서는 돌로 쌓고 둘레 944자이며 높이가 4자인데 성안에 우물 세 곳과 두 개의 연못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세종(世宗)때 토루 위에 석축으로 수축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초기까지도 군창(軍倉)이 있었고, 1736년(영조(英祖) 12)에 새로이 대구읍성(大邱邑城)을 쌓을 때까지 읍성(邑城)으로서 대구 지역의 보장(堡障)노릇을 하였다. 이곳은 또한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성의 입지 조건이 경주월성(慶州月城)과 비슷하여,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의 초기 성곽의 전형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68년의 조사 결과 성벽은 흙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차이가 있으나 대략 약 4m 정도였다. 이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인 내당동 일대에는 석실무덤 수십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었으며, 1923년에 그중 일부가 발굴되어 금동관(金銅冠) 등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이를 통하여 삼국시대의 시작은 삼한 시기의 각 지역에서 성장한 정치 세력들이 성벽을 축조할 수 있는 노동력의 징발을 포함한 정치력의 성장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란 역사 발전의 경위를 설명하게 되었고, 이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어진 시기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1969년에는 동물원을 개장하여 시민들의 휴식처와 동시에 공원(公園)으로서 내외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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