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무는 경남 통영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 칼춤, 입춤이다. 이 춤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영문(營門)에서 각종 의식․하례(賀禮), 이순신 사당의 춘추향사․생신제․기신제에 헌무(獻舞)한 춤이다. 승전무의 북춤은 궁중의 무고와 흡사한 춤으로 활옷을 입고 양손에는 한삼을 낀 원무 4명이 중앙에 북을 놓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북을 울리며 춤을 추고, 협무 12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돌면서 창(唱)을 부른다. 승전무의 흩어졌다 모여드는 형태는 삼진삼퇴를 뜻하며, 전체가 화려하고 웅장하면서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영산회상’가운데 삼현도드리와 타령을 반주음악으로 쓰며, 춤가락은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갖고 있다. 칼춤의 의상은 홍치마에 흰저고리, 흑쾌자, 전립, 홍띠, 색동한삼 등을 갖추며 무구로 1쌍의 칼을 든다. 승전무의 우아한 춤사위와 가락 그리고 치밀한 짜임새는 예술적 가치가 높고 전통에 뿌리를 둔 춤이다.
전문설명 승전무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었던 경상남도 충무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무고(舞鼓)를 말한다.
무고는 북을 뉘어 놓고 무원(舞員) 넷이 가끔 두드리며 추는 춤이며 속칭 북춤이라 이른다. 무고는 『고려사 高麗史 』「악지(樂志)」에 그 기록이 보이기도 하는데, 고려 때 중요한 궁중 정재(宮中呈才)의 하나였다. 고려 때 북춤은 두 사람이 추었고 정읍사(井邑詞)를 불렀다. 조선 때에는 북춤에 네 사람이 추거나 여덟 사람이 추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역시 정읍사를 부르고 정읍을 연주하였으나 조선 말기의 『진찬의궤(進饌儀軌)』 등에 전하는 무고는 정읍사를 부르지 않고 창사(唱詞)를 부르며 음악도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연주하였다.
무고는 지방관아의 연향에서도 추었는데 그 모습이 김홍도의 평양감사좌기도(平壤監司坐起圖, 국립중앙박물관소장)에도 남아 있다. 지방관아의 무고는 통영과 진주의 관아에서 추던 것이 전승되고 있는데 통영지방에 전승되는 것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연향에서 연행되던 것이다. 본래 통제영의 연향에서 연행하던 무고·검무 등 모든 춤을 군영(軍營)에서 추던 것이라는 뜻으로 승전무(勝戰舞)라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무고만이 승전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기 통제영 교방청(敎坊廳) 무원으로 김해근(金海根), 이국화(李菊花)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배운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승전무는 통영 관아의 연향과 충무공(忠武公)의 춘추제향(春秋祭享)과 탄신일에 제승당(制勝堂) 의례에서 연행되었으며, 영문(營門)이 폐지된 일제 때에도 제승당 의례에서 연행되었고 지금도 제승당 의례에서 무고의 연행은 계속되고 있다.
승전무는 원무 4명과 협무(挾舞) 여러 명으로 편성된다. 무원은 활옷을 입고 화관을 쓰고 양손에는 한삼을 끼고 북채를 든다. 원무는 활옷을 입되 사방색(四方色)에 따라 청(靑), 홍(紅), 흑(黑), 백(白)의 한삼(汗衫)을 입는다. 큰 북을 틀에 걸어 가운데에 놓고 원무 4명이 일렬로 서서 느린 6박자 긴 염불에 맞추어 들어와서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오른손으로 일제히 북을 치고 또 왼손으로 친다. 이렇게 북을 치며 사면(四面)으로 돌다가 일제히 멈추어 선 다음 창사라는 노래를 부른다. 자유리듬으로 느리게 달아 높이 고이 돋을사 하고 창사(唱詞)를 4절까지 부르고 나서 타령장단에 씩씩하게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지화 지화 지화자'를 부른다. 끝에는 흥겨운 굿거리 장단에 일렬로 벌려서서 물러나와 춤을 추다가 마친다.
승전무는 춤가락이 순박하면서 예스럽고 아취(雅趣) 있는 모습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독특한 향토적 특색을 갖고 있다.
승전무(원무와협무) 원무 북춤 승전무(원무와협무) 북춤 승전무 원무와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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