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전문설명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한 자리는 이른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점지(占地)된 전형적인 묘지로서의 지형을 갖추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 거리에 능산리천이 서류하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이다. 고분은 전열 3기 후열 3기, 그리고 맨 뒤 제일 높은 곳에서 1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은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고분의 분구는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크기는 대형·중형·소형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대형인 전열의 3기는 분구의 직경이 약 25∼30m이고, 중형인 후열의 분구는 직경이 약 20∼25m이며, 최후의 1기는 분구의 직경이 20m 내외이다.
이들 고분은 일제에 의하여 6기가 발굴조사되었고, 뒤편의 1기는 1971년 보수공사시 발견되어 추가되었다. 1915년에 2호(중하총(中下塚))·3호(서하총(西下塚))·5호(중상총(中上塚))가, 1917년에 1호(동하총(東下塚))·4호(서상총(西上塚))·6호(동상총(東上塚))가 각각 조사되어 내부구조를 알게 되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의 구조형식도 세 종류로 분류된다. 평천정식석실(平天井式)-벽상면에 판석만을 올려놓은 것)·평사천정식석실((平斜天井式)-벽상면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세우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놓은것)·터널형천정식설실(양쪽의 긴 벽상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 곡면을 이루어 한 것) 등이다.
1호분인 동하총은 장방형현실(현실(玄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이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片麻巖)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다. 석실 바닥의 중앙부에 모전석(模塼石)을 사용하여 길이 238cm·너비 125cm·높이 17.5cm 규모의 관대(棺臺)를 만들었는데, 상면을 들고 내부를 보면, 당초에는 1인용 관대였으나 뒤에 양측으로 확장하여 2인용 관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석실과 연도 사이는 너비 104cm·길이 63.5cm의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석문[문비석(門扉石)]을 닫도록 하였다. 연도는 비교적 길고, 넓게 하였는데, 밖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나팔형으로 되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내연도·외연도로 구분하였는데, 내연도는 석실과 같은 1매의 판석으로 하고, 외연도는 돌을 쌓은 후 표면에 두텁게 회발이를 하였다. 연도 입구는 잡석을 쌓아 폐쇄하였다. 현실의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를 그렸다. 1매로 된 거대한 판석의 표면을 물갈이[수마(水磨)]하여 반질반질하게 하고, 그 표면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 천정에 연화문과 유운문(流雲紋) 등을 각각 그렸다. 이 사신도의 양식을 송산리 6호분으로 연결되며, 멀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추축된다. 석실전장은 759cm이고, 현실 길이 326cm·너비 151cm·벽고(천정고) 194cm이며, 연도 길이 370cm·너비 143cm·천정고 168cm의 규모이다.
2호분인 중하총은 장방형의 석실과 비교적 긴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형식은 터널형이며, 벽체는 긴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다. 마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형식을 재료만 벽돌에서 장대석으로 바꾸어 놓은 형식이다. 석실전장은 672cm이고, 현실 길이 349cm·너비 215.1cm·벽고 130.4cm·천정고 234.3cm이며, 연도 길이 290cm·너비 112.2㎝·천정고 126.1cm이다.
3호분인 서하총은 장방형석실과 비교적 짧은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의 형식은 평사천정이며, 벽체는 거대한 판석 1매로 구성하였다. 이 형식은 7세기경 부여지방에서 크게 유행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석실전장은 471.6cm이고, 현실 길이 314cm·너비 136cm·벽고 131cm·천정고 165cm이며, 연도 길이 131cm·너비 122cm·천정고 131cm이다.
4호분인 서상총·5호분인 중상총·6호분인 동상총 등은 판석조의 단실묘이며, 천정형식은 평사천정으로 이루어졌다.
7호분은 장방형석실과 짧은 연도로 된 단실묘이며, 벽체와 천정은 각면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석실전장은 355cm이고, 현실 길이 139cm·너비 62.5cm·벽고 100cm·천장고 145cm이며, 연도 길이 55cm·너비 90cm·천장고 100cm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되어 조사시에는 약간의 유물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2호분에서 칠기편 금동원두정(金銅圓頭釘), 5호분에서 두개골파편 도칠목관편(塗漆木棺片)·금동투조식금구(金銅透彫飾金具)·금동화형좌금구(金銅花形座金具) 등만이 발견되었고, 분구 외에서 토기기대·호 등이 수습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은 연대순으로 보면 중하총·동하총·서하총 순으로 축조되었다. 중하총을 제일 이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터널형식은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과 6호분의 형식과 같고, 단지 재료만 전에서 돌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분 주인공의 추정은, 중하총은 웅진에서 즉위하여 사비에서 사망한 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다음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으로 추정하며, 서하총 이하 평사천정형식은 사비시대 중기 이후에 유행한 형식이므로 각각 시기에 맞는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고분군의 서쪽 200m 거리에서 능사(陵寺)(원찰(願刹))터가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의 출토는 능산리 고분군이 왕실묘지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부여능산리고분군 1호분 부여능산리고분군전경 1호분(동하총) 1호분내부벽화 금동용봉봉래산향로 부여능산리고분군 1호분 입구 2호분,3호분 3호분,4호분과 부여 나성 5호분,6호분 7호분에서 내려다 본 전경 능산리 고분군 근경1 능산리 고분군 근경2 능산리 고분군 근경3 능산리 고분군 원경 능산리 고분군 전경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내부1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내부2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내부3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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