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보

국보 제239호 송시열초상 (宋時烈肖像)

오늘의 쉼터 2008. 1. 31. 00:04


종     목 국보  제239호
명     칭송시열초상 (宋時烈肖像)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7.12.26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립중앙박물관
관 리 자국립중앙박물관

일반설명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고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이었다.

이 초상화는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윗쪽에는 정조가 쓴 칭찬의 글인 찬문이 남아있다. 이 두 글에 의해 그의 나이 45세 때 그려진 것이라고도 하고, 깊은 주름과 하얗게 센 수염은 노년의 모습으로 그가 살아있을 때 노년의 모습을 그린 본을 따라 정조 때 옮겨 그려진 것이라고도 한다. 옮겨 그려진 것이라 하더라도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며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과격한 성품이 보이며 옷의 흑과 백의 대조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봉안하기 위한 이모본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로 손꼽힌다.


전문설명


송시열(1607~1689)은 조선중기의 학자로서 노론(老論)의 영수였다.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등이었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후에 이조판서·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었다.

송시열의 초상화는 5점이 전하고 있는데 모두 좌안7분상(左顔7分像)이다. 이 가운데 어용화사(御容畵師)가 그리고 어제(御製)가 쓰여 있는 국박본(國博本)(44세, 좌상(坐像))과 김창업(金昌業)이 그리고 권상하(權尙夏)와 김창협(金昌協)의 찬문(贊文)이 쓰여 있는 황강영당본(黃江影堂本)(73세)이 가장 좋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생시(生時)의 초상화는 3점이었지만 각지의 서원·서당·영당(화양서원(華陽書院)·대노사(大老祠)·매곡서원(梅谷書院)·충현서원(忠賢書院)·표충사(表忠祠)·용문영당(龍門影堂)·황강영당(黃江影堂)·구봉서원(龜峯書院)·초강서원(草江書院)·오봉서원(五峯書院)·화산서원(華山書院)·인산서원(仁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하고 봉안(奉安)하였기 때문에 이모본(移模本)이 많았다. 그린 화가도 한시각(韓時覺)·김진규(金鎭圭)·김창업(金昌業) 등이었다.

안면묘사는 깊게 패인 주름살을 나타내기 위하여 울퉁불퉁한 갈색선으로 그렸으나,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송시열초상

송시열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