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물

보물 제3호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오늘의 쉼터 2008. 1. 27. 12:22

 



종     목 보물  제3호
명     칭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종로구

일반설명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전문설명

이 종은 조선 세조(世祖) 14년(1468)에 주조되어 원각사(圓覺寺)에 있다가 절이 폐사된 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지고 다시 선조(宣祖) 30년(1597) 명례동현(明禮洞峴)(현 명동성당 부근)에 옮겨진 뒤, 광해군(光海君) 11년(1619) 현재의 자리에 옮겨져 파루(罷漏:오전 4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울려 도성(都城)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높이 3.18m, 지름 2.28m, 무게 19.66톤이며 이 종의 양식은 쌍두(雙頭) 용뉴(龍紐)로 되어 있고 종신복(鍾身腹)에는 3조의 굵은 띠를 돌리고 있다. 또한 종구(鍾口)에는 윗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2조의 띠를 돌리고 있어 이것이 하대(下帶) 역할을 하는 문양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종의 몸체에는 “성화 4년 월 일…”이라는 장문의 명문이 새겨 있어 주조년대가 확실한 임진왜란 이전의 범종임을 알 수 있다.

종루(鍾樓)은 태조(太祖) 4년(1395)에 창건된 이래 네 차례의 소실과 여덟 차례에 걸쳐 중건이 있었고, 고종(高宗) 32년(1895)에 ‘보신각’이란 현판을 걸게 됨에 따라 이때부터 보신각이라 불리어졌다. 현재의 건물은 서울특별시가 1979년 8월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세운 것이다.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우측면

비신 상단 측면(쌍용 꼬리와 구름 무늬)

귀부 뒷 부분 (귀갑문과 꼬리)

비신 상단 정면 (쌍용과 제액)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좌측면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이수반룡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