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보

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오늘의 쉼터 2008. 1. 19. 17:13



종    목 국보  제6호
명     칭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통일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충주시

 

 

일반설명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설명

이 탑은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강가 높은 토단 위에 건립(建立)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유일한 7층의 거탑(巨塔)으로 높이 14.5m이다.
이 탑이 건립된 지점이 우리나라의 거의 중앙이라고 하여 속칭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1917년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때의 잘못으로 원형(原形)과 달라진 부분이 많아졌다.

현재의 모습은 기단(基壇)은 2중(二重)이고, 상하 각각 10여 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되어, 각 면에는 3주(三柱) 혹은 4주(四柱)씩의 탱주(撑柱)가 있으나 간격이 고르지 않은 것은 수리 때의 잘못으로 보인다. 갑석(甲石) 상면의 받침은 하층기단(下層基壇)에는 각형(角形)과 호형(弧形)의 2단이고, 상층기단(上層基壇)에는 각형(角形) 2단이어서 신라(新羅) 석탑(石塔)의 전형(典型) 양식을 지키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5층까지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고, 6층부터는 한개의 돌로 되어 있다. 각층 탑신석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있고 옥개석 받침수는 각층 5단씩이다.
이 석탑을 해체할 때 6층 탑신석과 기단에서 각각 고려시대(高麗時代) 거울을 비롯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측면전경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기단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전경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탑신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상륜부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