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 정부인 경주이씨
찬 인 : 이광덕(李匡德)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지 성균관사(知 成均館事) 이광덕(李匡德)이 찬하고, 완산후인(完山後人) 이광사(李匡師)는 글씨를 쓰다. 그 사신으로 갈 사람을 얻기 어려웠다. 영성군 박문수(靈城君 朴文秀)가 가야했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문수는 죽을병이 들었으니 가서는 안 된다」하였다. 문수가 병을 억지로 하여 일어나서 자신이 주상(主上)을 뵈옵고 가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의 어미가 손수 조복(朝服)을 가지고 신에게 입혀주며 신이 가기를 권하니, 신의 어미 뜻이 이와 같으니 신이 어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것이 효도가 되옵니다」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안색을 고치시고 칭찬하시기를 「경의 모(母)는 어질구나」하시었다. 문수가 이미 가서도 임금께서 여러번 하교하시어 영성군의 모가 무병한가, 안한가를 물으시고, 또 궁중(宮中)사람을 보내시어 영성군 모(母)에게 쌀을하사(下賜)하시고 간섭하시는것 같이 하시었다. 「영성군 박문수의 모(母)가 죽었습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그 어미의 어짊을 알았는데, 지금 그 서거(逝去)함을 들으니 내 마음이 상하고 슬프구나」하시고 유사(有司)에게 영을 내리어 부조를 하사 하시었다. 이에 국내 사람들이 다 영성군이 현모(賢母)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신하를 분변하실 뿐만 아니라, 또 능히 규중(閨中)의 부인에 까지 잘 미치시니 아! 아름답도다. 증 찬성(贈 贊成) 박공(朴公)에게로 시집오니, 바로 구당 문효공(久堂 文孝公)의 손자이다. 이러므로 부인이 나서는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서는 효도하고 근신하는 훈계를 본받아 며느리가 되어서는 공경하고 어미가 되어서는 엄숙하며, 몸가짐은 검소하고 살림살이는 부지런하여 무릇 이른 바, 여자의 행실과 안살림의 법도가 다 질서가 정연하였다.
그러나 천품이 크고, 두터우며 상쾌하고 활달하고, 식견이 심원하며 도량이 위대하여 옛적의 대인과 명사와 같다고 하였다. 평생에 돈목함을 숭상하고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먹을 것을 당하여, 사람의 굶주림을 들으면, 소저를 놓고 주며 막 베를 짜다가 사람의 위급함을 들으면 베틀에서 찢어서 주곤 하였다. 빈궁할때 부터 이미 그렇게 잘하였다.
영성군이 귀하게 되면서는 한해 봉급의 수입을 사방에서 먹을것을 물으러 오는 이에게 다 서서 흩어주고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입고 먹는 음식은 성근 베옷과 나물과 장만을 먹는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은혜와 원망을 분명히 하는것은 장부의 일이 아니다. 은혜는 진실로 마땅히 잊어서는 안되고 원망은 다 기억하지 말고 더욱 좋아하며 오래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구천공 집의 계집종이 심부름을 시키니 노여운 말을 하는자가 있었다. 모든 자제들이 성을 내니 부인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외롭게 살았으니 비복(婢僕 : 종)들이 어찌 알겠느냐 오만하게 구는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영남(嶺南)에 있을적에 구천공 댁의, 옛 종을 고루주어 부리도록 하였다. 전에 오만하던 자가 또한 끼어 있었다. 혹자가 주지 않으려하니 부인이 또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오직 부모께서 일찍이 부리던 바를 잊지 않는다」하였다. 일찍이 교자를 타고 나가다가 길에서 배반한 종을 만났는데 힘으로 잡을수가 없었다.
부인이 교자 안에서 전달하는 자를 시켜 불러 말하기를 「종 아모는 이리 오너라」하니 배반한 종이 깜짝 놀래어 문득 절을 하고 말하기를 「굴레를 잡겠습니다」하고 드디어 굴레를 잡고 또 말하기를 「전에 굴레를 잡은 자라 고」 하였다. 옆에서 살펴보니 배반한 종이 끝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더불어 돌아가서 그 죄를 다스렸다. 사람들이 다 부인을 위하여 걱정하니, 부인이 이미 적이 반드시 패할 것을 점쳐서 안다고 하며 웃으며 염려를 하지 않았는데, 적은 과연 패하였다. 영성군이 바로 영남 관찰사(嶺南 觀察使)에 제배(除拜 : 任命)되어 부인을 맞이하여 돌아오니 사람들이 다 부인을 위하여 하례하니 부인은 또 과히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견식(見識)과 도량이 크게 뛰어나 여느 아낙네 같이 않음이 다, 이와 같았다. 부인(夫人)이 비로소 홀로 되었을 적에 나이 겨우 30여세 이었다. 찬성공의 부모 및 백씨의 아들이 앞뒤로 죽고 끝에 부사공이 젊으나 병이 많고 모든 자녀가 다 아득히 어렸다. 이때를 당하여 박씨가(朴氏家)는 거의 멸문지경 이었다.
부인의 맏동서 권씨(權氏)와 손아래 동서 이씨(李氏)와 더불어 굶주리고, 객지에 말며 천신 만고로 서로 집안 살림살이를 매우 힘썼다. 부인은 길쌈을 잘하고 이씨는 바느질을 부지런히 하여, 그 남는 이익은 다 권씨에게 돌리고 아침제사 지내고 자기의 방에 베틀을 잡고 저녁밥 먹고 아래동서의 손상자에 바느질 거리를 끝내곤 하니 금고(金庫)는 주인의 이름이 없고 아이들은 정한 어미가 없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십수년에 가도(家道)가 이루어졌다. 이때 부인은 이미 늙으셨다. 그래도 병중에는 약물을 손수 지어다 주고 죽어서는 수의를 몸소 갖추어 옷을 준비하였다. 이미 세 초상을 치르고 장사는 지냈으나 「묘는 있어도 주장하는 이가 없으니 누가 수호 하리요」 하고 스스로 백꾸러미 돈으로써 밭을 사고 묘곁에 사람을 사서 하여금 먹이고 수호하도록 하였다.
또 그 외로운 아이를 거두어 스스로 양육하면서 말하기를, 「외로운 아이가 만일 장성한다면 어떻게 가도(家道)를 이루리요」하고 해마다 종제(從弟)의 전장(田庄)에서 들어오는 것을 모이어, 별도로 저축하여 그 장성하기를 기다리고 그 제사의 비용 같은것은 다 부인 스스로 준비하였다. 더욱 쉽지 않으며 자기의 외로운 아이를 성장시키기도 진실로 어려운데 남의 외로운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볼적에 남자가 되었더라면 어지러운 때를 만났더라도 반드시 능히 공화〈(共和) : 서주(西周)때 여왕(女 王)이 출분(出奔)한 뒤에 14년간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협의해서 행한 정치〉의 죽을힘을 다 할텐데 하물며 피아(彼我 : 남과 자기)가 사사로움을 꺼려 나라를 그릇치고 일을 낭패되게 함에랴.
사람이 사생(死生)의 부탁을 받으면 반드시 능히 정영(程榮)이 고아를 수호한 것처럼 해야 하거늘 하물며, 죽은 사람을 속여팔고 남을 져버리고 스스로 이익만을 위하겠는가? 세도(世道)가 쇠하고 신의가 점점 없어졌으니 그 의리를 더욱 표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세도(世道)가 쇠하고 신의가 점점 없어졌으니, 그 의리를 더욱 표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머니 같은 이는, 전기(傳記)에 실려있는 바로 진실로 다 어질다 하겠다. 그러나 그때에 인군이 능히 알아주고 표창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그 혹 한때의 인군의 은례(恩禮)를 받은 이는 장제현(張齊賢)과 채양모(蔡襄母)와 같은 유는 있기는 하나, 또 그 행실이 가히 기록 할만한 것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부인 같은분은 이미, 그 덕이 있고서 또 능히 성상께서 알아 주심을 받았으니 이는 맹모(孟母)와 문백모(文伯母)도 능히 얻지못한 것이고 채양(蔡襄)과 모든 집도 능히 있지 아니한 바이다. 내가 이러므로 부인의 행장(行狀)을 논술하매 첫머리로 부인의 성조(聖朝)의 포양(褒揚)하신 사실을 싣고 부인의 어짊이 유독, 스스로 어진것이 아니라 대개 성상께서 어질게 여기심으로 후에 더욱 어질게 된 것이다. 장지는 공주(公州) 옛 유성현(儒城縣) 기은곡(耆隱谷) 정향(丁向) 언덕 찬성공 묘 아래에 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조부 시술(時術)은 벼슬이 참판(參判)이며 증조 정남(井男)은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며 고조는 백사 문충공(白沙 文忠公) 항복(恒福)이다. 찬성공(贊成公)의 휘는 항한(恒漢)이니 영성군 공훈의 추은(推恩)으로 순충적덕 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영은군(純忠積德 補祚功臣 崇禎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世子貳師 五衛都摠府 都摠管 靈恩君)에 추증(推贈)되었고 부인은 작위(爵位)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다. 고(考) 선(銑)은 벼슬이 군수(郡守)이다. 문효공(文孝公) 장원(長遠)은 벼슬이 판서(判書)이다. 백씨 정자공(正字公)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아들은 인영(仁榮)·구영(久榮)·시영(始榮)이니 구영은 영성군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따님은 사인(士人) 이광운(李匡運)이니 계자로 도사(都事) 민효(閔孝)가 있다. 명(銘)하노니 이르기를 영성군의 어머니답도다.
국역(國譯) : 송창준(宋昌準) 장량으로 하여금 스스로 제(齊)날 3만호를 택하라 하니 양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하비(下批)에서 일어나서 주상(主上)과 유(留 : 지명)에서 만났으니 원컨대 유에 봉하 여 주시면 만족합니다」라 하였다. 곧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태사공(太史公)이 자방 (子房 : 장량)이 장대하고 훤출함을 의심했다고 하였다.
※ 정영(程榮) :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조삭(趙朔)이 도안가(屠岸賈)에 죽음을 당할때, 정영이 공손저구(公孫杵臼)와 모의하고, 조삭의 고아를 수호하기 위하여 공손저구는 타인의 아이를 조씨의 아이라 하고 같이 산에 숨었다.
정영이 이것을 도안가에 고하여 저구와 아이를 죽었다. 스스로 조씨의 진짜 아이를 안고 산에 숨었다가 후에 조씨의 대를 이어주었다. 정영은 성사후에 자살로써 저구에게 보답했다는 고사.
박문수 생가 :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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