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보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오늘의 쉼터 2022. 9. 12. 15:51

종    목 국보 (제329호)
명    칭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公州 忠淸監營 測雨器)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 천문지리기구 / 천문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2020.02.27
소 재 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기상청 
일반설명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는 없고 측우기만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되어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降雨) 측정기이다. 조선의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비합리적인 강우 측정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케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과학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조선시대 측우제도를 유일하게 증명하고 있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들었으며 높이는 평균 1자[尺] 5치[寸], 직경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하며,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울러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표면에 새겨진 이러한 규격 사항은 바로 이 측우기가 조선시대 측우기 제작 지침에 맞게 만들어졌음을 실질적으로 의미한다고 하겠다.

구성을 보면, 원형의 청동 주물로 제작되어 있으며 하단과 중단 3단의 세 단으로 분리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단의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시키는 구조이다. 사용 시에는 접합부에 납땜을 해 고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학적 조사를 통해 중단과 하단의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접합부는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아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고도의 정밀한 형태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평균 치수인 높이 32.1cm, 지름 14.9cm를 주척(周尺, 1자 206~207mm)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高 1尺 5寸]와 직경 7치[經 7寸]’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측우기는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굳이 자를 대지 않아도 몸체가 대력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점에서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비록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증빙해준다. 따라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서만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의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에 이어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도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므로, 인류과학사적 의미가 지대해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