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충남유형문화재

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 당진 안민학 애도문 및 백자명기

오늘의 쉼터 2018. 12. 24. 16:02

명 칭분 류수량/면적지 정 일소 재 지시 대소 유 자관 리 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43

당진 안민학 애도문 및 백자명기(唐津 安敏學 哀悼文 및 白磁明器)

유물/

애도문: 2매 / 백자명기: 21점

2018.08.10

충남 당진시 밤절로 2-10(원당동 921-4)

조선시대

안승환

안승환

 

일빈설명

 

1978년 안 씨 문중에서 조모(현풍곽 씨)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애도문은 16세기의 것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의 표기법, 음운, 어휘 등 중세 국어의 모습을 살피고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사대부가의 생활 문화사적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백자명기는 16세기 후반의 전형을 보여주는 백자이다.

『당진 안민학 애도문 및 백자명기』는 중세 시기 국어 및 생활 문화 연구와 조선 백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에 대한 역사적, 문화사적, 국문학적 가치가 높다.

 

“어찌하여 내 몸에 죄앙이 쌓여서 병을 둔 나는 살았고 병 없던 그대는 백년해로 할 언약을 저버리고 엄홀히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중략) 차라리 죽어 (그대에게) 가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유별한 남녀가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서로 귀히 여기며 쌓은 지고지순한 연모의 정은 400년 장구한 시간도 함부로 허물 수 없는 애틋한 것이었나 보다. 40년 전인 1978년 봄, 안씨 문중이 선대 조모(祖母) 곽씨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안민학(安敏學)의 애도문(哀悼文)은 미라가 된 시신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이듬해 ‘안민학의 애도문 고(攷)’를 집필한 충남대 구수영 교수는 “400여 년 지하에 묻혔던 것이지만 한지의 색이 약간 변했을 뿐 묵색은 그대로 생생한 채 기적처럼 남아 있었다”며 “이 애도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된 안민학이 시신 곁에 앉아 눈물로 비통한 정회(情懷)를 고백한 글로 진실하고 곡진(曲盡)하여 가슴을 뜨겁게 한다”고 평가했다.
극적으로 세상에 나와 빛을 본 부부의 사랑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종 37년인 1542년 태어난 안민학은 어려서부터 독서에 매진했고 문장과 필법에 능해 율곡 이이 등 당대 명류(名流)들과 교류한 조선조 학자이자 문신으로 기록돼 있다. 안민학은 26세에 열네살 소녀 현풍곽씨와 혼인해 10년 만에 1남 1녀를 둔다. 빈한한 살림에도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금실이 좋았다고 전해진다.하지만 고고하고 속세에 초연한 유가(儒家)의 삶을 한 여인이 지탱한다는 건 녹록지 않았다. 안민학은 “그대는 겨울이라도 아무런 저고리 하나 하고 장옷(부녀자의 내외용 쓰개) 하나나 하고 찬 구들에서 서어한 자리하고서 견디니…(중략) 궁한 집에 과부 어머님 위에 있고 나 하나 오활하고 옹졸하여 가사 쪽으로는 아주 챙기지 못하니”하면서 자신의 가난과 지아비로서 회한을 드러낸다.끝내 이 부부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다. 곽씨부인은 봄이면 자다가도 코가 찬 냉수를 달라 하고 혓바늘이 돋더니 스물둘이 되던 해 태기가 있었으나 유산한다. 이때 이미 병이 깊었고 지아비의 간병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숨진다. 곽씨부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짝 잃은 남편의 비감(悲感)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안민학은 “내가 병든 것이 이리 망극한 상혼을 보고 얼마나 오래되어서 죽을고. 죽지 않은 적에는 꿈에나 자주 보이고 서러운 뜻 말하소. (중략) 잊고 가셨음이 망망하고 서럽고 그리운 정이야 평생을 잇는다 한들 끝이 있을까”라고 고운 한지를 눈물로 적셨다. 20대 청년이 10대 소녀를 아내로 맞아 손아래 누이 기르듯 한 연민과 부부로 깊은 정을 나눈 세월은 단장(斷腸)의 고통으로 승화한다.충남도는 안민학의 애도문이 임진왜란 이전 중세국어의 표기법과 음운, 어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국문학 자료로 귀중하고 함께 발견된 명기(백자) 21점은 조선 사대부가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라며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