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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

오늘의 쉼터 2015. 5. 4. 16:35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


 
신문 한 귀퉁이, 눈에 뜨이기도 힘든 일단기사에서 당신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것입니다.
 
주류출고량이 크게 줄었다는 기사는 같은 지면에 2단으로,

 

여자면도사 해고기사는 3단으로 실려있었습니다.
 
당신이 태어난 지구 한 모퉁이, 이 좁은 반도 위에서 이미 당신은 육신을 거두었습니다.
 
당신이 형장으로 끌려간 그날,

 

찌는 듯이 내리쪼인 폭양은 당신이 숨을거둔 다음에도 그대로 내려쪼이고 있습니다.

 

서울의 거리는 여전히 붐비고 '남북공동성명'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하며

 

비오홀에선 나체의 춤이 기승을 부립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드시 그렇게 말입니다.
 
강요된 생명의 박탈이 당신으로 해선 온 우주가 무로 돌아간 단절이었건만

 

살아 있는 무리들은 천년장생을 누리기라도 할듯이 세속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당장에 나와 인연이 없고 이해관계가 없는 일은 심지어 '법에 의한 살인'까지도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불행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당신의 죽음이 일단짜리 기사로 끼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죽기는 매한가지인데 1단이면 어떻고 5단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괜히 산 사람의 감상이 지어낸 넋두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미국의 연방대심원에서 사형제도의 위헌을 선언하여

 

생명의 불가침이 크게 재인식된 터이라 유달리 착잡한 느낌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후진국에 태어난 목숨이라고 해서 선진국 사람의 그것보다 가벼운 것도 아니고

 

천한 것도 아닌데 실상은 엄청나게 다른 대덥을 받는구나 싶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이미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40개 국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예 법률상으로 폐지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법에는 사형제도가 남아있어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한 나라도 있습니다.

 

혹은 사형을 선고는 하지만 실제로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나라까지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사형제도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을 하조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다면 만일 당신이 한국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났었더라면

 

최소한 오랏줄에 목을 매이는 그런 최후는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가정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부질없는 아쉬움에

 

'만일'이나 '혹시'를 얹어 '…했더라면'을 들먹이는 것이 숙명에 쫓기는

 

인간의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말하기 좋게 '조국'을 들먹이지만 바로 그 잘못 태어난 조국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죽어야 될 때도 있습니다.

 

더러는 사회질서의 명분으로 또 더러는 국가방어의 이름으로 요컨대

 

전체주의의 어떤 목적 밑에 개체의 존엄이 무너져 가는 경향이 한탄스럽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한 사형선고가 타당한 판결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에 대한 장황한 고소사실이 엄격한 증명을 통하여 밝혀진 것인지 그것도 확실히 모릅니다.

 

당신이 저질렀다는 행위가 과연 처단법조에 해당되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직 법관만이 자기 심증으로 흑백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성한 사법판단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경솔한 억측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도 무작정 판결을 예찬하고 승복할 수 만도 없는 -

 

그런 갈등을 살다보면 드물지 않게 겪어야 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지존의 자리에 있다 해도 전능 일 수 없다는 것,

 

심판하는 단상의 성직자도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기에 그들의 판단,


그들의 권한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엄연히 있다는 것 -

 

이런 사리쯤이야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는 상깅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리를 외면하는 곳에 인간의 비극이 싹트고 죄악이 머리를 듭니다.

 

권력이 전능을 탐하고 심판이 완전을 착각하기 때문에 절대의 생명이


상재적 판단 앞에 아침 이슬이 되곤 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통치권력'도 법의 한계를 지켜야 하게끔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법권을 쥔 법관 또한 법률과 양심에 따라서만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률이 규범으로서의 타당성을 잃지 않아야 하고, 법관의 양심이

 

제대로의 바탕을 갖추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만 재판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가지 전제가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고장이 생긴다면 범죄를 다루다는 재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범죄를 범할 위험도 있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혹은 주위의 정세에 눈치를 보면서,

 

아니면 추상같은 엄단만이 능사라는 생각에서 엄청난 오판이 나오기도 합니다.
 
법에 사형을 규정한 조항이 너무 많다는 입법의 과오,

 

생명이 아닌 다른 형벌을 선택할 권한을 용기있게 행사하지 못하는 과오 -

 

아런 것이 어쩌면 당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앗아갔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이라기보다 권력과  법의 이름 밑에 횡사(橫死)한

 

추상적 인간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법정 단상의 그네들이 인간조재의 엄숙한 의미와 심판하는 자로서의 상재성을

 

조금만 깨달았더라면 오늘 나는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좋았을 것입니다.
 
지하에 누워있는 당신에게 이 장황한 이야기가 무슨 소용 무슨 위로가 되지 못함을 잘 압니다.

 

그러나 아직은 살아 숨쉬는 '남은 자' 또한 잠재적인 범인이요,

 

언젠가는 죽어갈 운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생각지도 못할 일로 해서 당신의 그 처첨한 길을 뒤따를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앞날의 '미확정 사형수'를 위한 인간의 절규를 높이는 결의이기도 합니다
 
사라져야 할 최후의 야만에 희생된 당신에게 뼈아픈 사죄와 위로를 드랍니다.
 
이 세상에서 좌절된 당신의 소망이 명부(명부)의 하늘 밑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한을 잠 재우고 편히 쉬쉽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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