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충남문화재자료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2호 영식필 산신도

오늘의 쉼터 2014. 9. 13. 09:59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2-1호

명 칭

영식필 산신도 백운사본(永植筆 山神圖 白雲寺本)

분 류

유물 / 불교회화/ 사경화/ 사경화

수량/면적

1점

지정(등록)일

2014.09.01

소 재 지

충남 보령군 성주면 심원계곡로 259-200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백운사

관리자(관리단체)

백운사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보령시 관광과 041-930-4809

 

일반설명

 

보령 성주산 남서릉에 위치한 백운사(白雲寺)는 주불전인 극락전과 요사로 이루어진 규모가 작은 사찰이다. 요사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는 감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1694년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오른편에 1869년에 제작된 산신도가 걸려 있다. 산신도의 화기에는 “동치팔년기사십월십사일봉안우공충우도남포북령성주산백운사산신탱화(同治八年己巳十月十四日奉安于公忠右道藍浦北嶺聖住山白雲寺山神幀畵)”이라 적혀있음. 화기에 기록된 공충우도(公忠右道)는 충청남도(忠凊南道)의 옛 명칭으로, 공청도(公忠道)는 1825년(순조 25년)에 사용되었다가 1834년에 충청도(忠凊道)로 고쳤다가 1862년(철종 13년)에 공충도(公忠道)로 개칭하였다. 특히 이 화기를 통해 이 불화가 성주산 백운사(白雲寺) 산신탱화(山神幀畵)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신도를 조성한 영식(永植)은 알려지지 않은 화승이며 <백운사(白雲寺) 산신도(山神圖)>가 현재 알려진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조선 후기 산신도는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산신 즉,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의 형식을 하고 있다. <백운사(白雲寺) 산신도(山神圖)> 또한 화면 오른편에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이 불화의 주인공인 산신(山神)이 호랑이에 기대어 앉아 있다. 호랑이를 기댄 산신의 자세는 조선 후기 산신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으로 화면 속의 산신은 하얀 눈썹과 수염을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유건을 쓰고 도포를 걸친 선인(仙人)의 형상을 하고 있고 어깨에는 선인을 의미하는 나뭇잎을 걸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신은 지물로 파초선과 같은 부채나 불로초, 지팡이 등을 들고 있으나 <백운사(白雲寺) 산신도(山神圖)>의 산신은 특이하게 용뿔을 들고 있다. 산신과 호랑이 주변에는 4인의 동자와 동녀가 서 있으며 이들 중 3인은 과일을 든 과반(果盤)을 들고 있다. 색채는 황색 바탕에 산신을 비롯한 동자, 동녀는 홍색과 녹색을 사용해 화면에서 부각시키고 인물에 둘러싸인 호랑이는 황색을 칠해 그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조선 후기 산신도는 현재 18세기 이후에 조성된 작품만이 전하고 있다. 이 중 충남 지역의 산신도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한 산신도가 집중되어 있으며, 이 중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예는 <백운사 산신도>(1869년), <수덕사 산신도>(1877년), <마곡사 영은암 산신도>(1918년), <무량사 산신도>(1920년), <대련사 극락전 산신도>(1924년), <갑사 신흥암 산신도>(1933년) 등에 불과하다.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백운사본(白雲寺本)은 충남 지역의 현전하는 산신도 가운데 제작연대가 앞서는 사례이자, 산신에 기대 앉은 호랑이, 과반을 든 동자와 동녀 등 19세기 산신도의 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과 표현이 우수하다.

 

 

 

영식필 산신도 백운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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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2-2호

명 칭

영식필 산신도 장곡사본 (永植筆 山神圖 長谷寺本)

분 류

유물 / 불교회화/ 사경화/ 사경화

수량/면적

1점

지정(등록)일

2014.09.0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장곡사

관리자(관리단체)

장곡사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청양군

 

일반설명

 

청양 장곡사(長谷寺)는 신라 문성왕 12년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사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철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174호), <금동약사여래좌상>(1346년, 보물 제337호>, 그리고 조선후기에 제작된 <장곡사 미륵괘불탱>(1673년, 국보 제330호) 등의 중요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장곡사(長谷寺)에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장곡사 아미타회상도>(1708년, 동국대박물관 소장), <장곡사 영산회상도>(18세기, 동국대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장곡사본(長谷寺本)>은 종무소에 보관 중이지만 원 봉안처는 상대웅전 권역에 있는 산신각에 모셔졌던 것으로 된다.
현재 산신도는 유리액자로 표구하여 보관중으로 새로 표구하면서 화면 사방에 그려진 장황 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보존 상태는 바탕재료가 종이인 관계로 화면 일부가 긁히거나 안료가 지워졌고 습기로 인한 얼룩은 있지만 비단이나 모시를 사용한 불화에서 나타나는 심한 박락 현상은 없다.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장곡사본(長谷寺本)>은 1869년(동치8 기사년)에 화승 영식(永植)이 조
성한 불화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에 조성된 산신도는 수하인물(樹下人物) 즉, 소나무 아래에 산신을 배치하는데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장곡사본(長谷寺本)> 역시 화면 오른편에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고 나무 아래의 편편한 바위 위는 불화의 주인공인 산신(山神)이 등 뒤에 웅크려 앉은 호랑이에 한쪽 팔을 얹은채 기대어 앉아 시선은 몸을 틀어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호랑이를 기댄 산신의 자세 또한 조선후기 산신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이다. 다만 산신도를 제작한 영식(永植)은 둥근 얼굴에 하얀 눈썹과 수염을 한 인자한 노인처럼 산신으로 묘사하고 선인(仙人)임을 강조하기 위해 붉은 도포 위에 나뭇잎을 걸친 형상으로 표현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산신을 그려내고 있다. 산신도의 호랑이는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희화화(戱畵化)된 호랑이로 표현되는데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장곡사본(長谷寺本)> 역시 황갈색에 검은 점이 있는 민화풍의 호랑이로 그려져 있다. 산신과 호랑이 주변에는 이들을 시봉하는 동자와 동녀가 과반(果盤)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외에 배경이 되는 소나무의 둥지, 바위 등은 황갈색 바탕을 살려 먹으로 소나무 껍질과 바위 질감을 살리는 준법을 사용해 표현하였다. 언제부터 산신도가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전하는 산신도 중
비교적 연대가 올라가는 예가 의성 <고운사 백련암 산왕도>(1820년), <운람사 산신도>(1827년), <함양 영각사 산신도>(1831년)인 점으로 보아 대체로 19세기부터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 지역에 전하는 년명 산신도는 <장곡사 산신도>(1869년),<백운사 산신도>(1869년), <대련사 산신도>(1877년), <마곡사 청련암 산신도>(1899년), <향천사 산신도>(1899년),<갑사 대성암 산신도>(1910년), <정혜사 산신도>(1910년), <마곡사 영은암 산신도>(1918년), <무량사 산신도>(1920년), <대련사 극락전 산신도>(1924년), <갑사 신흥암 산신도>(1933년), <마곡사 대원암 산신도>(1935년), <정혜사 석굴암 산신도>(1937년) 등 모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음. 이 가운데 청양 <영식필(永植筆) 산신도(山神圖) 장곡사본(長谷寺本)>과 보령 <영식필 산신도(白雲寺) 백운사본(白雲寺本)>는 충남에서 제작연대가 앞서는 산신도로 1869년에 영식(永植)이라는 동일한 화승이 제작하였다. 영식(永植)이 남긴 불화는 현재 <장곡사본>과 <백운사본>만 전하고 있다. <장곡사본>과 <백운사본> 산신도의 화기를 비교해 보면, 장곡사본은 1869년 기사 8월초 3일(同治八年己巳八月初三日), 백운사본은 이보다 2달 뒤인 10월 14일(同治八年己巳十月十四日)에 조성되었다. 장곡사본에는 “신조성봉안(新造成奉安)”이란 용어가 기록된 반면 백운사본에는 “봉안(奉安)”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영식(永植)이 새로 출초(出草)해서 장곡사 산신도를 조성하였고 <백운사본>은 <장곡사본>을 모본삼아 제작하였음을 시사한다. 두 산신도는 크기가 거의 같고 모두 종이를 바탕재료로 사용하였다. 구성에 있어 왼편에 소나무를 그리고 화면 전면에 호랑이 등에 기댄 산신을 그렸으며, 황갈색의 바탕, 수묵풍의 소나무, 황갈색에 검은 반점이 있는 호랑이, 푸른 두건에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의 모습 등 기본 구성과 색의 사용 또한 비슷함.

다만 <백운사본>은 산신이 용뿔을 든 자세로 변화를 주고 시동은 2명에서 4명으로 그리고 배경으로 산을 표현하는 등 세부적인 표현을 더하여 <장곡사본>과 화면을 보다 복잡하게 구성하였다. 영식(永植)이 조성한 <장곡사본>에서 보이는 황갈색의 바탕색, 수묵풍의 소나무 표현, 산신을 보좌하는 시동의 표현은 이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금호(錦湖) 약효(若效)가 조성한 <상세동 산신도>에도 계승한 충남 지역 산신도의 특징이다.

 <장곡사 산신도>는 1869년에 영식(永植)이 조성하였다. 현재 영식(永植)의 불화는 청양 장곡사와 보령 백운사에 전하고 있다. <영식필 산신도 장곡사본>은 안정된 구성으로 소나무 아래 호랑이에 기댄 산신을 포치하였으며, 호랑이와 수묵풍의 소나무는 황갈색의 배경색과 어우러져 푸른두건을 쓰고 붉은 도포를 걸친 산신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처럼 <영식필 산신도 장곡사본>은 존상 묘사 및 구성, 색의 사용에 있어 전체적으로 수준 있는 작품이며 이와 더불어 충남 지역의 산신도 가운데 제작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으로서 19세기 중엽 산신도의 유형을 보여 줄뿐만 아니라 장곡사 산신도의 설채법과 시동의 표현이 이후 19세기 말 금효(錦湖) 약효(若效)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충남지역의 산신도의 정형으로 자리하게 된다. <영식필 산신도 장곡사본>은 조선 후기 충남지역의 산신도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불화로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영식필 산신도 장곡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