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6호 (의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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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조정숙공 사당기비(趙貞肅公 祠堂記碑) |
분 류 |
기록유산/ |
수량/면적 |
1기 |
지정(등록)일 |
2014.05.09 |
소 재 지 |
경기 의왕시 청계동 12 |
시 대 |
고려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청계사 |
관리자(관리단체) |
청계사 |
상 세 문 의 |
경기도 의왕시 |
일반설명
조정숙공 사당기비(趙貞肅公 祠堂記碑)는 청룡산 청계사는 바로 고려조의 시중 조정숙공의 별장이다. 공의 휘는 인규요 자는 거진인데,평양부 상원군 사람이다.어머니 토산군부인 이씨의 꿈에 해가 품에 들어와서 임신하여 원나라 태종 9년 정유에 공을 낳았다. 공의 많고 넉넉한 덕과 공적은 가승과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다시 논해 저술한 바 없다. 그래서 잠시 고인이 공을 칭송한 바를 들어 증명하면, 가정 이곡이 쓴 사당기이다. 사당에 이르기를 “공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명민하였고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말이 적고 풍채는 수려하였는데 4대의 왕을 보필하여 아름다운 대신이 되었다” 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비로소 관을 쓰고 띠를 매 조정에 나아가 빈객과 논하였고 마침내 국왕을 존중하고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의 중요한 신하가 되었다. 또 이르기를 “권간을 몰아내어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화목하고 편하게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원나라 세조 역시 일찍이 공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고려인 같지 않도다. 어찌 그 진술하고 접대함이 그리 상세하고 분명한가. 언사와 행동거지가 고려인과는 같지 않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릇 가정이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이다. 원나라 세조와 같은 영주도 이와 같이 삼가 탄복하였으니 공의 현명함을 엿볼 수 있다. 고려말에 북방에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원에 이를 진주할 때마다 공을 보냈고 공이 가면 일이 잘 해결되어 얻은 바가 많았다. 필마로 원으로 간 것만도 수십여 회나 되었다고 한다. 대덕 을사년에 충렬왕은 공을 평양백에 봉하고 관료들을 배치하여 조회 때는 홍개와 옥대를 갖추도록 하였으니 왕은 지극한 의례로써 공을 총애하심이 이러하였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공에게 자문을 받아 일을 결정하였다. 공은 일찍이 청계산에 별장을 짓고 또 소당을 지어 그곳에서 시를 읊었다. 또 청계사를 창건하여 왕을 위하여 축원하였다. 정미년 4월 25일을 지나자 병이 위독해져,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단정하게 앉아 운명하니 나라 안의 선비와 백성들이 다 분주히 달려와 통곡하였다. 공이 졸한 뒤에 자손들이 공과 흥양군부인 조씨의 초상을 그려 별장 소당에 간직하고 뜰에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새겼으며 전답과 노비를 두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공의 장남 장민공 휘 서와 부인 상당한씨, 차남 충숙공 휘 연과 상락군부인 김씨, 충숙공의 아들 문정공 휘 덕유와 변한국부인 오씨, 문정공의 아들 문충공 휘 준과 부인 고성이씨의 초상도 아울러 소장하였다. 공의 아들 가운데 또한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으나 출가하여 승려가 된 분이 있었는데, 이는 호가 현오대선사인 삼중대광 자은군이다. 이가 일찍이 이 별장에서 살았는데, 이의 초상 역시 여기에 있다.세월이 흘러 관리가 소홀하여 장민공과 그 부인의 영정은 자못 결손되고 더러워졌으므로 정통 정묘년에 6대손 첨지 인득과 외현손 상국 남지가 여러 자손들과 더불어 초상을 다시 그렸다. 가정 병인년 겨울에는 공의 10대손 만종과 문충공의 6대손 현령 현, 현손 현감 창훈, 공의 외운손 상국 이준경, 상국 ▨▨ 등이 함께 중수하였다. 융경 정묘년에 현과 판서 이부 등이 영당에 제사하고 장차 역사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마침 국상이 있어 즉시 행하지 못하고 무진년 봄에 이르렀다. 이에 내외의 제손 1200여명을 동원하여 역사하였는데, 상국 권철, 상국 홍섬이 돈을 내고, 이상 오겸과 이상 이탁 이하 50여명이 유사가 되고, 판서 원곤, 판서 조수언, 판서 홍담, 판사 정종영 등 모두가 이에 참여하였다. 기사년 봄에 현이 우·창훈·순빈·철명·희생·경복·응양 등과 함께 공인을 모아 역사를 일으켜, 무릇 영정의 결손 되고 더럽혀진 곳을 깨끗이 고치고 기울어지고 허물어진 사우를 고쳤다. 또한 보관소 하나를 짓고 여섯 칸의 함을 만들어 정숙공 이하의 영정을 비단으로 싸서 함속에 안장하고 당우의 동쪽 따뜻한 방에 봉안하였다. 일이 있을 때에는 이를 받들어 당중에 내어 걸어 예를 올리고, 예가 끝나면 다시 함속에 봉안하여 자물쇠로 잠구어 두었으며 사사로이 열고 닫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공의 팔대외손 초당 허엽이 청계사 영당중수기를 짓고, 여성군 송인이 이를 기록하였으나, 만력 임진년에 이르러 여러 영당이 전부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 청계사는 폐세자가 점유하고 있었고 또한 전답과 노비는 궁가나 토호들이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 비석의 비문을 갈아버렸는데 이는 대개 그 전답과 노비를 비에 새겼기 때문이다. 숙종 15년은 즉 청나라 강희 28년인데, 이해 봄 삼월에 청계사에 화재가 나서 5백년 고찰이 흔적 없이 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승려들만 함께 탄식함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공의 자손들 역시 심히 탄식하였으니, 불제자로서 성의가 있는 자가 있어 기부를 받아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 재화를 시주한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고 또한 공의 정령이 끝없이 빛나서 음으로 도와준 바가 아니겠는가. 이에 사찰의 전우와 낭무 등이 완연하고 한결같이 새롭게 되었고, 또 장차 청계사의 사적을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니 내 비록 문사에 졸렬하나 공의 후손으로서 어찌 사양하겠는가. 삼가 기록한다. 정숙공 11대손 새로 급제한 운은 글을 짓고 생원 윤창적은 글을 쓰다. 숭정 기원후 기사 6월 일
淸溪寺事蹟記碑
貞肅公 十 一 代 孫 新 及 第 橒 撰 生 員 尹 昌 績 書
조정숙공 사당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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