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 (고창군) |
---|---|
명 칭 | 백관수선생고택(白寬洙先生古宅) |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생활유적 |
수량/면적 | 일곽(655㎡)안채16.5평, 행랑채17평, 물치5.3평 |
지정(등록)일 | 1997.07.18 |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44번지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백훈외2 |
관리자(관리단체) | 유상기 |
상 세 문 의 | 전라북도 고창군 문화관광과 063-560-2780 |
일반설명
이 건물은 근촌 백관수 선생의 고택으로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규모는 16.5평이다. 주초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기둥은 각주, 기단은 근래에 깬돌로 보수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건물 규모는 17평이다. 근촌 백관수 선생은 고종26년(1889) 1월28일 성내면 덕산리에서 태어나 여섯살때 부터 거유인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익히고, 열여섯 되던 해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 망국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917년 봄 비록 만학의 길이기는 하였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그곳에서 독립운동 대책위원으로 뽑혀 역사적인"2.8선언"으로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1년동안의 옥고를 치루었으며, 이 선언은 바로 3.1운동을 촉진 시킴으로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그는 귀국해서 기독교 청년회와 관련하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하여 이상재와 더불어 조선일보의 이사와 영업,편집 등을 맡아 4년간 근무하였다. 그가 주동한 2.8선언의 전모를 알고 있는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함께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1937년 5월 동아일보사 제7대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7년 대주대표자대회를 거쳐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에 향리인 고창에서 당선되어 초대 법사위원장을 지내다 6·25로 자택에서 공산당에 납북되었다. 당시 나이 62세였으며 그의생사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백관수 고택(안채) 백관수 고택(사랑채,헛간) 백관수 고택(헛간채) |
'문화재 > 전북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라북도 기념물 제92호 정읍 임병찬 창의 유적지 (0) | 2014.05.25 |
---|---|
전라북도 기념물 제91호 임실 이석용 생가 (0) | 2014.05.25 |
전라북도 기념물 제89호 김제 팔효사의 은행나무 (0) | 2014.05.25 |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 무주 적상산 사고지 유구 (0) | 2014.05.25 |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 군산 구군산세관본관 (0) | 2014.05.25 |